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거듭남의 산 소망 (벧전 01:3-12)

첨부 1


3절 말씀은 또한 산 소망이 "거듭남으로 시작되었음" 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언제부터 산 소망이 있게 되었다고 말씀합니까 거듭나는 순간, 산 소망을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태어날 때 우리는 어떤 상태로 태어납니까 소망 없이 태어납니다. 우리는 절망에 이르는 존재로서 태어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합니다.

1:24절을 봅시다. 우리가 만약 스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의 삶은 24절의 고백과 같을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마르는 풀처럼, 시들어지는 꽃처럼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마르는 풀, 시드는 꽃과 같은 운명을 지향하고 있는 삶, 예수 없는 우리의 삶은 바로 그러합니다. 우리는 희망 없이 태어납니다.

바울도 <엡 2:12>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우리는 소망 없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소망을 갖기 시작했습니까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무엇으로 거듭났습니까 <벧전 1:23> 절을 봅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는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말씀을 접촉하기 시작했을 때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알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저는 예수 없이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 있었던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에 연결되었고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생명을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거듭났습니다. 그 순간부터 내 속에는 산 소망이 임했습니다. 이 사건이 여러분에도 있었습니까 참으로 여러분이 거듭나서 이 산 소망이 여러분의 것이 되었습니까 묻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는 정말 산 소망이 있는지요 아니면 희망 없이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매주일 어김없이 교회에 출석하지만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것은 아닌지요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신뢰함으로 거듭나는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4.산 소망의 능력

벧전 1:4절부터 12절까지는 산 소망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럼 산 소망은 어떤 능력을 갖고 있습니까 산 소망은 우리의 미래의 삶과 현재의 삶에 똑같이 영향을 미칩니다.

<미래적인 면> 우선 우리는 미래의 삶에 미치는 산 소망의 능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첫째:기업의 보걍漆 1장 4절을 보면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산 소망은 미래의 기업을 보증합니다. 이 살아 있는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도들이기 때문에 주께서 장차 나에게 허락하실 그 기업을 보증받았다는 사실을 확신케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산 소망을 더욱 살찌우는 것이며 이 소망을 잃지 않고 계속 보존하며 기뻐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 기업은 어떠한 기업입니까 1장 4절을 보십시오 "썩지 않고,더럽지 않고,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꼍 것이라" 하늘에 우리를 위해 주께서 간직하신 영원한 기업이 있는데 그 기업은 다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첫째, 썩지 아니하는 기업 둘째, 더럽혀지지 않는 기업 셋째, 쇠하지 않는 기업

"썩지 않고" 어떤 형태의 부패에서부터도 방지되는 기업. 다시 말하면 이것은 불후의 기업입니다. 결코 썩지 아니하는, 결코 부패할 수 없는 기업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많은 희망과 꿈을 가지고 있으나 그러한 희망과 꿈은 모두 부패할 것들입니다. 육체의 소멸과 함께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늘늉 간직해 놓으신 이 소망 이것은 그 누구도 훔쳐갈 수 없습니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은행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저축해 놓아도 다 빼앗길 수 있지만 하늘 나라의 "영생 기업은행" 에 간직된 이 소망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후의 소망입니다.

 "더럽지 않고" 이 말은 본래 "불에 타지 않는" 혹은 "다른 색깔로 염색되지 않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결코 변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더럽지 않고" 라는 말을 "불변하며" 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기업은 불변의 기업입니다. 불후의 기업입 니다.

 "쇠하지 아니하는" 이 말은 본래 "영원히 그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다 순간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그 기업은 쇠하지 아니하는 찬란한 영광을 그 불멸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늘 나라에 간직해 놓으신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그 영광스러운 기업은 불후의 기업이며, 불변의 기업이며, 또한 불멸의 기업입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에 우리를 위해서 간직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살아 있 는 소망은 이 기업으로 연결됩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영광 스러운 기업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이 산 소망의 능력이며 혹은 산 소망의 결과입 니다.

둘째:구원의 완성 벧전 1:9-12절은 구원의 완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9절을 봅시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의 결국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그 순간부터 물론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품에 안길 때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이미 구원이 확실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계속해서 자라나야 할 소망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오늘날 신앙에 관한 구구한 논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그리고 보수적이고 낙후된 비진보적이고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외치는 소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성경의 영광스러운 한 주제는 [구원] 입니다.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나시기 전 천사가 이렇게 전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마1:2> 구원의 주님, 이 구원이 성경의 가장 영광스러운 주제입니다. 사회에 아무리 혁혁한 공훈을 세워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은 사람이 가진 소망만이 살아 있는 소망이며 불멸의 소망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게 만듭니다.

10절 이하는 이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오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에 대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연구하고 살피며 기도했을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계시하셨습니윱  어떻게 계시하셨습니까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 승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즉 수난과 영광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의 길이 명확하게 열렸습니다.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 주님이 다시 오셨고 그 주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이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가 가진 산 소망은 우리가 장차 하늘 나라에 가서 영원한 기업을 누릴 것이라는 보증이며 구원의 완성으로 이끕니다. 이것이 미래에 대한 산 소망의 능력입니다.

 <현재적인 면> 우리의 산 소망은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어떠한 능력을 지닙니까

첫째:하나님의 보호 5절을 봅시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손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호" 라는 말은 군대 용어입니다. 군인들이 든든하게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우리의 구원을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았다가 읾어버릴 수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말입니다. 누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는 '나 몰라' 하시면서 우리를 내버려 두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존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손 안에 있는 나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를 그분의 능력으로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든든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둘째:시련의 극복 6-7절을 보면 우리의 산 소망은 시련을 극복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산 소망으로 구원이 보존되고 시련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시련" 이라는 말은 당시 두 가지 용도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1>순금과 가짜 금을 구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시련이란 당시 순금과 가짜 금을 감정할 때 쓰던 단어입니다. 시련이 왜 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련이 왜 올까요 진짜 성도와 가짜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시련이 올 때 고난이 찾아올때 우리는 우리가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시련이 올 때 가짜 그리스도인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도망갑니다.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자처합니다.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처음부터 불신앙인이었습니다.

"믿다가 타락했다"는 말을 믿지 않싻윱구  타락의 원인을 찾아보면 대부분 처음부터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척하다가 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결코 주님 앞에서 완전히 후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잠시의 방황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에는 주님 안에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게 될 것입니다.

 2>의사고시를 일컬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의대생이 치르는 시험을 "시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용례를 통해 시련을 통과할 때 우리는 더 높은 단계를 향해서 성숙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6-7절을 보면 시련은 실로 여러 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여려가지 시험이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부딪쳐 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시험은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근심합니다. 그 사실을 성경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6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 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리스도인들도 근심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근심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연약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련은 잠깐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근심도 잠깐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한 가지 비밀을 압니다. 이 시련은 결국 나를 유익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셋째:그리스도인의 인격 형성 우리의 산 소망은 우리의 구원을 보존하며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형성합니다. 어떤 인격을 형성할까요 주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을 수 있는 인격을 준비시켜 주십니다 즉 이 시련 속에서 우리는 성숙합니다. 이 시련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순금보다 더 귀하게 정련된 인격을 가지고 이 불같은 시험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얼굴을 하늘을 향해서 드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시선을 주님이 오시는 영광스러운 그 순간을 향해서 던지십시오 그리고 그때 나를 위한 칭찬과 영 광과 존귀의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지금까지 현재적인 면에서 본 산 소망의 능력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결 론

이제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련이 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찬송해야 합니다.

1장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찬송해야 합니다. 시련이 올 때 찬송해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이 산 소망 때문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시련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찬양 대상은 산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살아 있는 소망을 갖게 해 주신 그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둘째로,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8 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그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그 예수님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계속 말씀을 보십시오 "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도 나에게 산 소망을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며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벧전 1장의 첫번째 부분에서 산 소망의 삶을 가르치며 사도 베도로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