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령한 것에 대한 지식의 필요성 (살전 04:13-18)

첨부 1


오늘은 13-14절과 18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 벌써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수 있지요.
제가 보기에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나아가 보면, 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다녀 왔지요. 3:6절에 보면 디모데가 짧은 기간동안 데살로니가에 바울을 대신하여 가서 목회를 하고 왔습니다. 이 돌아온 디모데의 보고를 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또, 권면하기 위해서 쓴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인데, 지금 4:13절에 있는 말씀의 동기는 [예수님의 재림이 곧 있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우리 교회에서는 죽은자들이 여러명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보기 전에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보지 못했으니까 구원을 받을수 있을까요 그들은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하는 디모데를 통해서 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그들의 질문 골자를 다루기 전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자기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하는 신앙을 아주 철저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 반드시 예수님은 재림하신다는 신앙을 어떻게 가질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틀림없이 그것은 그 교회를 개척한 바울이 가르치고 온 것입니다. 이제 갓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지나지 아니하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을 잘 지키고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그러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믿었다고 해서 그들이 잘못된 것 아닙니다. 그리고 바울도 보면 그들이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믿었다고 해서 나무라는 내용도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바울을 비난합니다. 바울이 두가지 실수를 했는데, 하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속단해 버린 것도 바울의 잘못이고, 또 하나는 바울 자신도 자기가 죽기 전에 꼭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흔적도 많이 있는데 그것을 보아도 바울이 크게 잘못 판단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을 너무 성급하게 가르치고 기다리다가 자기도 실족을 당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실족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무오하게 가르치는 데는 실수를 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바울이 기록한 성경도 잘못될수 있다는 의혹이 생깁니다. 이렇게 되면 큰일 나지요.

바울이 자기가 살았을 동안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다고 믿고 가르친 것이 잘못이냐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잘못이 아닙니다. 왜 그런고하면, 재림 신앙은 항상 지금입니다. 내일도 아니에요. 오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 재림하실지를 정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시간에 대해서는 분명히 자기도 모르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확실하게 재림을 맞이할수 있는 방법은 오늘이요. 지금이라고 하는 자세로 살아야지,10년 후다-100년 후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성경을 벗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제 죽을지 죽을 날짜와 시간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죽음을 생각할 때에, [오늘일 수도 있다] [지금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죽음을 사랑하는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비판할수 있습니까 오히려 그런 사람이 더 현명하지요.
내 죽음은 오늘일수도 있고, 내일 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한시간을 진지하게 삽니다. 그 사람이 지혜자지요.
마찬가지로 재림에 대한 시간을 일체 가르쳐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에 예수님의 재림을 가르칠 때에는 [오늘, 지금이라도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가르치면서 [아,여러분,아직도 멀었습니다. 한 2000년 더 기다려야 합니다.]하고 가르쳤다면 그게 무슨 재림 신앙입니까 또 바울이 생각하기를 [내 당대에는 안 오시겠지] 그게 무슨 신앙이요
그러므로 바울이 생각하기를,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면 주님이 오신다고 했는데, 바울이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할려고 얼마나 서둘렀는지 모릅니다. 당시의 땅끝은 로마와 스페인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 밖에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로마와 스페인까지만 복음을 전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바울은 스페인까지 두번이나 같다왔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까 시간 계산은 분명히 잘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의 자세와 그의 교훈은 절대로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에게 하나님이 정확한 시간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에 모르신다고 하셨는데 바울에게 가르쳐 주실리도 없지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계시 하실 때는 때와 시간을 계시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고,우리가 어떤 영광을 누리리라는 것을 보여 주셨읍니다.그러므로 바울이 시간에 대해서 너무 성급하게 말한 것 같이 느껴질지 모르지만, 바울로서는 정상적으로 믿고 정상적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나요. 마 25:13절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시간은 알지 못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상하시지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에는 예수님이 자신이 오시는 일에 대해서 모르실리가 없을 텐데... 깨어 있으라. 잠자지 말라 고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입니다.
자 예수님도 그렇게 가르치셨는데, 바울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을리가 없지요.
[자,여러분, 깨어 있으십시요.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하고 가르치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몹시 초조하게 기다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재림 광신론자 는 아니었습니다.
재림광신론자란 무조건 사람들을 흥분시켜서 예수님이 꼭 언제 재림하신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생활을 다 포기하게 만들고,그 다음에 하얀 옷을 입혀서 산꼭대기로 끌고 올라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무엇인가 알고 있었던 것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3절에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2절을 잠간 봅니다.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동심하거나,두려워 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이 지금이다 오늘이라도 오실수 있다고 믿고 가르쳤으면서도 그것 때문에 미혹을 받아 가지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에서 탈선하는 일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런 유혹이 분명히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계시를 받았다. 이렇게 하면서 예수님은 몇년 몇월 몇일에 재림하신다. 고 말한 사람들이 역사상 여러명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여호화의 증인을 창설한 럿셀이라고 하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영접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끌고 두번이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부인들을 신부드레스를 입혀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일에 미혹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재림에 대해서는 언제나 오늘이다. 지금이다 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도 멀었다고 믿지 마세요. 생각지도 않은 때에 주님이 오시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처럼 항상 지금, 오늘이라도 주님이 오실 수 있다는 자세를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주님이 오늘이라도 오신다는 신앙이 환난을 이기는 지렛대가 되었습니다.그들이 당하는 환난은 잘은 모릅니다만 보통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온 도시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침 뱉음을 당하고,감옥으로 끌려 가기도하고, 재산을 하루 아침에 빼앗기기도 했고, 자녀들은 학교에서 쫒겨 오기도 했고,그야말로 말로 표현할수도 없었지만, 그 많은 환난과 시험을 이길수 있었던 원동력이 어디 있었느냐 주님이 곧 오신다하는 믿음과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강한 능력을 우리에게 줍니다.
과거에 일제시대에 우리의 선배들이 감옥에서 6-7년씩 그 고된 시련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던 그 힘이 어디서 왔느냐하면 전부가 재림신앙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요한계시록강해가 대 인기를 끌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세상 살기가 고달프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어려움을 많이 겪으니까, 이 세상을 바라보면 어디에 마음을 붙일데가 없어요. 오직 소망할 수 있는 것은 주여,언제 오시렵니까 재림 신앙으로 그들의 신앙은 철저하게 무장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오늘이라도 오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환난과 고난을 극복할수 있는 믿음을 유지할수 있었습니다. 이 재림신앙이 없었다면 한국교회가 뿌리째 뽑혔을지 모릅니다.

저는 오늘도 저 이북이나,시베리아 같은 데에서 주님의 이름 때문에 고통 당하는 많은 위대한 성도들이 수년에서 수십년을 예수 이름 때문에 환난을 당하고 있지만, 어떻게 그들의 믿음이 유지 될수 있겠는가 제가 볼 때에는 재림신앙이라고 봅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의 원한과 우리의 고난을 다 살펴 주실 것이라는 이 신앙 때문에 그들이 오늘도 살아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렇게 아세요. 재림신앙의 긴박성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여러분의 신앙은 잠든 신앙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처럼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신다는 재림신앙을 늘 마음에 담아두고 신앙생활 하지 않는 사람은 잠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의미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전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고 기다리고 있던 그들인데 그만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자꾸만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 때의 성도가 몇명이나 되었을까요 아무리 많이 보아도 100명은 넘지 않았을 것 아니에요. 극히 적은 교회였어요. 그러니 첫 믿음,첫 사랑,또 그 주변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없습니다.자기들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농도가 깊었겠어요. 너와 내가 없어요. 한 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온갖 환란 가운데서 오직 주님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만 병들어서 한사람씩 한사람씩 죽는다. 어떤 사람들은 끌려가서 순교를 당한다. 이런 일을 볼 때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저렇게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면, 그 사람들 참 이상하다. 아, 그렇게 순진하고 아무것도 몰랐을까 사실이 그랬어요. 당시에는 성경도 없었고, 목회자도 없었습니다. 단지 처음에 바울에게 들은 몇마디의 복음을 붙잡고 믿었던 것입니다. 구약도 그들의 손에까지 들어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지식이 없어요. 전혀 바탕이 없는데다가 단 순한 한가지 말씀을 들었으니까 그것이 그들을 꽉 붙드는 놀라운 힘이 되었지요. 그저 들은 말씀을 잊어 버릴 수가 없어요. 자도 그 말씀을 생각하고, 눈을 뜨면 그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신앙이 단순할 수 밖에 없지요.
그리고 뜨겁고요. 열렬하고요.

오늘날도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을 많이 연구했다고 하는 학자들은 미지근한 사람들이 참 많아요. 너무 성경을 지적으로 공부하다가 보니까 나중에는 혼란이 생겨서 회의주의자가 되고,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되기가 쉬운데,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들,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들, 그저 하나 들으면 그 것이 전부에요. 두개 들으면 그 두개가 하늘나라 전부에요. 그 세상은 없어요. 그 것 붙들고 생명을 거는 거에요. 그러니까 얼마나 강하고 뜨겁습니까

그러나 한가지 약점이 있어요. 이런 믿음은 쉽게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랬어요. 뜨겁긴 뜨거웠는데 뭘 알아야지
지식이 부족하면 이런 어려움이 생깁니다. 쉽게 흔들리고 분별력이 약해 집니다. 이것이 흠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렇게 무식한 사람들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좋아하는 말 한마디를 여기에 또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읽은 4:13절에 무엇이라고 썼나요. [형제 여러분, 자는 자들에 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그래서 교인들을 가르쳐 줄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은 바울이 아주 잘 쓰는 좋아하는 말입니다. 서신서를 쓰면서 7번 정도 씁니다.

자 그리고 또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중에 믿음이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후서 1:5절에 보면 우리가 신앙인격을 갖추는데 있어서 제일 기초가 무엇입니까 믿음이다. 덕이다.지식이다.
예 그렇습니다. 알아야 돼요.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성경도 없고, 교역자도 없고, 지식이 약했어요.그래서 재림이 오기전에 세상을 떠나는 형제들을 보면서 마음에 큰 흔들림이 있었습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 영적 세계에 대한 지식은 꼭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들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 모르고 있었던 것들이 재림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몰랐고, 또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잘 몰랐고, 세상 떠난 사람과 주님과의 관계를 잘 몰랐고....., 도대체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쳐 줄려고 펜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아는 것에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 구원의 도리, 교회에 대해서, 거룩한 삶에 대해서 ... 등등 깊이 알아야 하겠지만,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이 영적지식입니다. 영계에 대한 지식이 어느정도 있어야 합니다. 영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서 무식하면 유혹을 빨리 받게 됩니다.왜냐하면 호기심을 갖게하는 내용들이 바로 영적 세계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예를들까요 요즈음 사람들이 귀신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왜 그럴까요 영계에 관한 것이니까. 잘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호기심이 간단 말이에요. 호기심이 갖고 있는데 좀 무엇을 안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금방 혹 하고 빠져 버려요. 그러니까 귀신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그와같은 유혹을 받을 때에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혼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습니까 혼백이 이렇다.저렇다 말이 많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일찍 죽은 혼이나,억울하게 죽은 혼은 공중에 떠 다닌다고 가르칩니다. 떠다니는 혼이 사람에게 와서 붙으면 그것이 병이 되고, 귀신들린 사람이 된다고 말합니다. 아주 간단하고 쉽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어려서부터 듣던 무속신앙 아니에요 처녀귀신,총각귀신,무슨 귀신..., 해서 그것을 달래고,섬기는 것이 무당이고,점쟁이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성경의 진리인 양,믿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다면 어디 무서워서 살수 있겠어요. 죽은 귀신들이 공중에 가득하고 밤마다 찾아와서 괴롭힐 텐데요..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오는 혼란입니다. 성경의 지식을 조금만 알면 이런 문제는 금방 해결되어 버립니다.
성경에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로말씀하실 때에 죽은 부자가 혼이 밖에서 날라 다녔습니까 아니면 어디로 갔나요. 신령한 것에 대한 지식의 필요성
지옥에 갔는데, 거기에 간 부자의 영혼이 나를 세상에 보내 주든지, 나사로의 영혼을 나에게 보내 달라고 했을 때에 갈수 있다고 했나요 못간다고 했습니다.
성서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하신 것에 권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보다는 말씀 자체에서 분명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은 그것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요즈음에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못 가르쳐 주었으면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것에 유혹을 받아서 넘어 간다는 말입니다. 영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믿음과 호기심은 다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 배우고 싶다. 알고 싶다. 그것을 알고 나니까 좋더라고 해서 그 사람의 믿음이 좋다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믿음과 호기심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계에 대한 지식은 꼭 알아야 하는데,한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서 바울이 너희가 예수의 재림이나 죽은 자의 영혼이나 죽은 자의 그 후의 생활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지요. 그러나 세밀하게 이야기는 안했어요.

한가지 원칙은 하나님이 출입금지라고 줄을 쳐 놓은 거기까지만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알게 해주시는 것 까지만 알아야 합니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사탄의 유혹에 빠집니다.
예를들면 16절에 보면 [그 때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 쫒차 강림하신다]했는데, 아,그 때는 호령소리가 나는구나. 주님이 말씀으로 호령을 하는구나. 천사장이 무슨 소리를 하는구나.하나님이 나팔을 부는구나하는 정도만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여기까지가 하나님이 줄을 쳐 놓은 부분입니다.
그런데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이것 가지고는 차지가 않아요. 그래서 천사장이 어떻게 생겼을까 옷은 어떻게 입었는가 하나님의 나팔의 길이는 얼마나 클까 이렇게 파고 들어 가는 겁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순수히 자기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하나의 불신앙의 태도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이 이상은 나에게는 별로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안 가르쳐 주셨구나] [내가 지금은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안가르쳐 주셨구나]하고는 그냥 그대로 만족해 버립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영계에 대한 것은 알기는 알되 절제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영계에 대한 지식은 성경 말씀 만이 분별할수 있는 표준입니다.

저 사람하는 말이 옳은 말인가, 그른 말인가를 무엇을 가지고 분별할수 있습니까 성경을 가지고 분별합니다. 그 이상은 없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아 저사람의 말은 성경하고 틀리구나!]했으면 그것으로 끝나야 돼요.

이렇게 영계에 대한 것은 아는 것이 중요하고, 알아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죽은자의 세계에 대해서 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가지 더 첨부한다면 신비성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교회 안에 가끔 보면 있습니다. [신비스러운 것을 보았다][무슨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한다]하면 무조건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는 얼머나 광대하고 심오한지 내가 아는 것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고,내가 말하는 것은 마치 어린애가 말하는 것 같다고 바울이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광대한 세계가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우리가 천사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성경이 알려 주는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분을 알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약간 신비성을 띤 체험도 할수 있고,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한발자국 앞서서 신비스러운 영적체험을 가질수도 있습니다.
콜리 박사 같은 사람은 천사를 여러번 만났다고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못보았고 너는 보았으니까 네가 본 것은 잘 못되었다-이렇게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아, 저사람이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어떤 섭리로 자기 천사를 만날수 있었구나.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갖혔을 때에, 천사가 와서 발로 차는 것을 봤지요. 그러면 베드로는 잘못되었다고 말할수는 없지요. 베드로가 보았던 천사를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특수하게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이런 신비한 체험들을 종종 합니다.
그러면 나에게는 왜 안나타나느냐 나타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마 나도 세상의 것 다 버리고, 저 아프리카 토인들처럼 손가락으로 밥 먹고,그들처럼 모기에게 뜯기면서 일생을 바치는 거룩한 생을 살았다면 그야말로 위로하기 위해서-소망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밀림을 혼자서 걷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자기를 지켜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서운 독사가 공격할려고 할 때에 천사가 가로막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상황, 꼭 필요한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이 적든지-기도가 너무 적든지....

물리학자들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이외의 것은 없다고 믿고, 잘 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인쉬타인 같은 사람은 너무 넓은 우주와 공간을 이해하는 은사를 그는 받았기 때문에 [신비를 무시하든지 신비에 관한 것을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를 너무 모르는 사람이다.] 그랬습니다. 물질을 연구하는 학자도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가 너무 깊고 심오하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것은 요만한 것 뿐이고, 자기가 아는 것과 다른 이야기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고, 다른 원리가 얼마든지 나올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경외하는 마음으로 물리를 연구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세계,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영혼의 문제를 다루면서 내가 아는 이것만 전부다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범위 안에서는 얼마든지 나보다 앞선 신비성을 띨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성경을 뛰어 넘어서 무엇을 보았다가 아니고, 성경 안에섭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성경을 깊이 배워서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배워서 지식으로만 아는 것에 그치기를 원치 않습니다. 영적인 깊이가 약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나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고 기도할 때에,그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어떤 것인가를 머리로만 알면 좀 약해요.
뭔가 설명할수 없는, 말로 할수 없는 하나님의 품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맛을 보아야 합니다.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는 지식은 더 깊이가 있고, 더 능력이 있을수가 있습니다.

왜 이런 영적인 깊이가 우리에게 약하냐 시간투자를 안해서 그렇습니다. 예.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
너무 성급해요. 한 5분기도하고 나서는 전화 걸고 싶은 생각이 나서 못견뎌요. 그러면 벌떡 일어나서는 전화 건다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 내가 좀 만나 볼까] 하고 생각하는데 나가 버린다 말이에요.
역시 영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시간투자,정성을 드리는 이 부분에서 우리보다도 굉장히 강합니다.

이렇게 알면 우리의 영적 세계가 풍성해 집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예수님의 재림은 오늘일수도 있고, 내일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림의 세계는 너무나 신비스럽습니다. 또 우리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난 형제들이 어떤 상태에 지금있으며,그들이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어떤 영광을 누릴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앞에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베일에 가리워 있어서,커튼의 한쪽을 살짝 들고 한 눈으로 안을 들여다 보는데 불과합니다.
우리가 창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리 앞에 어떤 휘황찬란한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놀라운 영광의 세계를 우리는 앞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는 한에 있어서는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는 진리에 대해서 우리의 영혼이 더욱 풍성함을 누리고 우리의 영적세계가 좀더 소망에 불타야 되겠습니다. 모르면 모르는 만큼 우리는 세속화 됩니다.모르면 모르는 만큼 우리는 인생을 가난하게 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이 풍성한 영적세계의 축복,장차 나타날 영광의 그 나라,죽은자들이 가서 누리는 그 축복들을 우리가 좀 이 세상에서 알고, 그 진리를 통해서 우리가 주의 영광을 좀더 마음 속에 담고 다니는 멋있는 신앙생활을 할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와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정성을 드리는 부분이 약해요.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