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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배교의 결과 (벧후 0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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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는 말

배우다 마는 것은 위험한 것/시상의 샘도 마시려면 실컷 마 셔라/조금 마시면 우리의 머리가 흐려지나/흠뻑 마시면 깨어나 리라 시인 페페의 'Alps on Alps'라는 시입니다.

시의 세계만이 아니라, 학문과 과학 기술의 세계, 일과 사업 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특히, 종교의 세계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현대의 종교인들이 각자가 믿는 종교에 대해서 믿기는 믿되 믿음 생활에 깊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종교인들은 오히려 종교를 이용해서 자 기의 갖가지 사욕을 채우는 데에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종교인 아닌 종교인들, 머리가 흐려져 버린 반 종교인들 때문에 크고 작은 비극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지 모릅니다.

종교인임을 빙자하여 남의 신뢰를 얻어 사기치는 사람도 있고, 사업 또는 정치적인 출세에 이용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심 지어 종교를 내세워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러한 사람들은 실제로는 그들이 믿는 종교의 배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에도 그러한 현상이 얼마든지 있습 니다. 이 비극적인 현상은 현대 교회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에 서도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 경고의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향락주의를 표방하는 종교에 물들어 성적 방종을 일삼으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지도 자 행세를 하던 사람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는 모든 교인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주님이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 상의 더러움을 피하게 된 사람입니다.

'앎'이란 원어는 에피그노세이로서, 단순히 지식을 뜻하는 그 노시스와는 달리, 충분한 지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교인들 중에는 단순히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라 든가 속성을 아는 이들이 있는데, 이러한 교인들이 가진 종교 적 지식은 그노시스라고 합니다. 이러한 교인들과 달리, 성령님 의 역사를 좇아 주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누면서 은혜와 사랑을 받고, 주님을 섬기는 실제적 경험에 의해 주님을 더욱더 깊이 체득하는 지식을 쌓아 나가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 체득 곧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 얻는 지식이 바로 에피그노시스입니다.

미국 남부 지방에 사는 어느 청년이 한겨울에 와이오밍에 사 는 자기 친구를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날씨가 영하 15도 가량 내려간 어느 날 오후에, 둘은 차를 타고 시골길을 가게 되었습 니다. 꽁꽁 언 호수를 보고 그들은 차를 세워 놓고 호수를 구 경하기로 했습니다. 와이오밍에 사는 친구는 차에서 내리자마 자 호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갔으나, 남부에서 온 친구는 호수 한가운데로는 갈 엄두도 못 내고, 호숫가에서 발뒤꿈치를 든 채로 불안해하며 가만가만 걸어다녔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눈 에 한 농부가 트랙터를 몰고 호수 한가운데로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엄청난 차이는, 남부 지방에 사는 청년은 그 호수를 겪어 본 적이 없었고, 와이오밍에 사는 친구와 농부는 꽁꽁 언 호수 가 어떻다는 것을 수없이 겪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을 믿되 주님의 은혜의 호숫가에서 의심과 불안한 마음 으로 어기적거리며 사는 교인이 있는가 하면, 주님의 은혜의 호수 한가운데 들어가 마음껏 뛰놀며 사는 교인이 있고, 또 거 창한 사업을 하면서 사는 교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설령 잘 믿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말씀대로 이뤄지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 체험을 많이 하여 주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더욱더 주님을 믿고 의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영생의 주님이심을 알게 되면, 그 때에는 살고 죽는 것까지도 주님께 전적으로 내맡기는 신앙 생 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사를 초월하여 신령 한 기쁨을 누리며 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3-2 4에 보면,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 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라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 나옵니다.

 3. 다시 세상의 죄악으로 돌아감

주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든 얕게 체험했든 간에, 주님의 사랑을 많이 체험했든 적게 체험했든 간에, 일단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세상의 온갖 부정과 부패 그리고 불의와 추악 등을 피한 후에, 다시 세상의 온갖 죄악 중에 얽매이고 지는 교인들 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교인들의 나중 형편은 믿기 전보다 더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의 도 곧 기독교를 안 후에 받은 명령을 저버릴 것이었더라면, 아예 주님의 말씀을 몰랐던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배교의 결과는 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엄청난 불행 속으로 휘몰아 갑니다.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는 양심의 가책 을 못 이겨 몹시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왕 자로 태어나 왕이 되는 특권을 누렸으므로 누구보다도 하나님 을 잘 섬기고, 앞장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어야 했던 아 합 왕은, 오히려 이방 여인 이세벨을 왕비로 삼는 동시에 그 나라의 온갖 우상들을 섬기는 바람에 그와 백성들이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가끔 배교로 말미암아 불행을 겪으면서도, 회개하지 아니하 고 여전히 자기 합리화에 급급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 은 그런 식으로 다시금 크나큰 사랑의 주님께 용납될 기회마저 무산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더 큰 불행을 막기 위해 서 고쳐야 할 악습 중 하나는, 책망과 징계에 대해 깨닫고 회 개할 기회로 삼는 대신에,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합리화 내지 는 자기 정당시하는 습성입니다.

하녀가 임신한 것을 눈치챈 김 대감 댁 안방마님이 하녀를 야단쳤습니다. "내가 뭐라더냐. 그러길래 사내놈들 조심하라잖 았어. 동네 창피하니 어서 나가!" 그러자 하녀가 "마님, 아이를 낳는 게 창피 한가요. 마님께서도 아이를 낳지 않으셨어요." 안 방 마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건 달라. 내가 낳은 아이는 대감의 아이니까…." 하녀가 아주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습니다. "사실은 제 뱃속에 아이도 대감님 아이예요. 이젠 괜찮지요." '몸은 교인 마음은 배교자'인 상태의 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신앙인이나 교회 밖에서는 불신앙인인 교인 아 닌 교인들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배도자들, 특히 가짜 지도자들을 겨냥하여 불결과 경멸의 대상으로 일컬어지던 개와 돼지의 구역질 나는 습관에 대한 속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 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4. 맺음말

우리 주변에도 일단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로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다가 배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 상실은 물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세 상의 온갖 더러움에서 피해 나왔고, 지금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 누리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아무 쪼록 더욱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보다 더 큰 새 은혜 와 사랑을 받으시고, 주님을 보다 더 깊이 앎으로 믿음이 더욱 더 확고해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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