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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약하고 ! 죄인이고 ! 원수일때 ! (롬 0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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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되었던 우리 가 이제 하나님과 화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부모와 자식 사이 혹은 부부 사이 혹은 이웃 과의 사이에서도 어떤 일로 말미암아 앙금이 생기고 인간관계에서의 단절이 있다 면 그 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그런 앙금 이 없어지고 인간관계의 단절됨이 회복되어지고 화해가 이루어 진다면 얼마나 행복한 순간들이 도래되어집니까 우리 이런 관점에서 인간과의 관계보다도 더 비중이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화해를 오늘 이 시간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대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사이는 죄문제로 말미암아 단절되어 졌습니다. 이 단절때문에 수많은 인생들이 하나님을 찾는데 많은 고통을 받고 있 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그런 수많은 종교들의 종교생활이 이런 하나님을 찾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스러운 찾음속에서 우리가 한가지 발견할 수 있는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들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아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도를 닦고 자기자신을 학대하기도 하고 심지어 루터같은 종교개혁자도 하나님을 바로 알기전에는 자신의 고행을 통해 하나님을 찾을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 을 통해 이런 것들이 다 부질없는 일임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것은 우리가 도를 닦고 고행을 통해 어떤 경지에 이르러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개입하심임 을 알아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런 사실을 우리들에게 잘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특히 세가지의 때를 말함으로서 이런 사실을 잘 알여주고 있습니다.

 1. 6절에 연약할때

2. 8절에 아직 죄인되었을때

3. 10절에 원수되었을때입니다.

 이 세가지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화해의 선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가지의 때가 어떤 상황인지 또 그런 상황의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 게 역사하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6절에 "우리가 연약할때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 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연약할때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성장하지 않았을때를 말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할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 여러분들은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교회에 출석하고나서 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고 생각하 십니까 아니면은 여러분들이 교회출석을 하고 몇년이 지나면서 어느정도 영적 으로 성장하고 나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 니다. 우리는 벌레많도 못한 죄인의 신분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까지의 수준으로 올라간다면 과연 얼마만큼의 수준에 까지 올라가겠습니까 만약에 그 렇게 생각한다면 교만의 소치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화해하심은 우리 가 믿기전에 이미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사랑으로 확증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의 단절이 없어지고 화해 가 이루어 진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사도바울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어머니의 태로 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이말은 연약할 대로 연약한 바로 그 싯점에서 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고백인 것입 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은 우리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이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을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갓난아이의 시절입니다. 강보에 싸여서 어머니의 품에 있을 그때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똥,오줌을 싸도 그게 좋다고 사랑스럽다고 야단입니다. 울어도 부모는 그저 좋다고 온갖 야양을 마치 광대처럼 아이앞에서 다 피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실을 그 아이가 성장하고 강건해 지고 나서 아느냐는 것입니다.

모릅니다. 대개 사람들은 4살 이전의 일은 기억하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문제를 두고 볼때 내가 성장하고 나서 내가 철이들고 나서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연약할때 아주 어렸을때 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최고의 사랑을 말입니다. 우리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말씀 우리가 연약할 때 이미 하나님의 화해의 손길이 우리에게 임했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해 확증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2.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도 역시 앞에서 언급한 우리가 연약할때의 경우와 같은 맥락속에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만 이 부분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신분을 말해 주 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쓰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의인됨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됨의 신분에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무자격한 상태에 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의로우냐 의롭지 못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선한일을 얼마나 했느냐 못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 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인된 상태에 있을때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 님께서는 우리가 어느정도 의롭기를 기다리셨다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일 때에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기독교의 깊고 오묘한 진리가 풍성하게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문제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갑시다. 예수믿읍시다'라고 하면 "술끊고, 담배 끊고 사람좀 되어서 나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 오늘 말씀은 이런 경우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 그 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 셨느니라"

3. 10절에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원수되었을때라고 하는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위치를 말하는 것 입니다. 여기서 원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사이의 지점이 중간지점이 아니라 완전히 극과 극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극과 극의 최악의 상태에 서 하나님은 화목의 선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말입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통해서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바울의 경우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 위해 다메섹이라고 하는 곳으로 일주일동안이나 걸어갔습니다. 아주 극성 스러운 사람이요 지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주님께서는 부르십니다.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 하나님과 원수의 만남인 것입니다. 원수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많은 경우의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어집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욕을 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면서 못할짓을 많이 할때 바로 그 때도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사랑하사 저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것입니 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참된 진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연약할때, 아직 죄인되었을때, 원수되었을때 예수님의 희생적인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아 화목 해진 상태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까 토마스 헤리스의 말을 인용함으로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토 마스 헤리라는 사람은 자기의 저서 "I am Ok , You are Ok"라는 책에서 '나는 옳 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을 가질때 그는 배타적이고 투쟁적인 인생이 된다고 했습 니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 옳다면 너도 옳아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옳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오히려 이웃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 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시면서 진정한 화해를 하셨던 것입니다. 참 사랑은 화해 를 가져와야 합니다. 화해가 없는 사랑은 주님의 사랑도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도 아닙니다. 투쟁을 능사로 하는 사람은 열사나 투사는 될지는 모르나 진정한 신앙 의 사람은 되지를 못합니다. 이런 경우는 정치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양에서 는 옥살이 3년 이상을 한 사람은 나라의 수장으로 세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 하면 마음속에 독으로 가득차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 의 막힌 담을 허시고 화해를 이루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여러분들은 가족간에, 고부간에, 형제간에, 이웃간에 화해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실렵니까 끊없는 주님의 희생이 우리의 희생과 양보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 서 이번 한 주간도 이런 주님의 사랑과 화해가 실천되어지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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