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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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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의 차이점은 천국은 천사들의 찬양과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의 감사가 가득차있는 곳이고, 지옥은 너 때문에 내가 여기 왔다고 하면서 서로 헐뜻고불평하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과 불행도 바로 이 감사가 많은가아니면 불평이 많은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는 인생의 행복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잠언을 보면 "마른 떡 한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17:1)고 하였읍니다.
오늘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주님에게서 고침을 받고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감사하는 것을 잊었던 아홉명의 문둥이들을 향하여 주신 그 경고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감사를 잊고 사는 오늘의 우리들의 삶에 큰 자극과 교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문둥이든 부정하다고 해서 일반대중과 떨어져살았읍니다. 심지어 사람들과 가까이서도 대화를 할 수 없도록 율법으로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에 본문 12절에 보면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도 문둥이들은 멀리서서 부정하다, 부정하다 소리를 지르면서 말했읍니다. 저들은 다 같이 주님께 간구했읍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요."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응답은 금방 나왔읍니다. "제사장들에게 너희몸을 보이라." 참 이상하지요. 예수님은 너희들의 병이 다 나음을 받았느니라고 말하지 않았읍니다. 그냥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였읍니다. 이것은 저들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다 합격하였읍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시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이 이 사람은 깨끗하다고 선언하기까지는 사회적으로 일반 다른 사람들과 같이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기때문이었읍니다. 그런데 이들의 나음은 제사장에게로 가는 도중에 일어났읍니다.
믿고 갈때 이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읍니다. 믿고 구하는것은 받은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 믿습니까이제 열 문둥병자들은 다 나음을 입었읍니다. 그런데 이 나음을 입은 문둥병자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율법대로 제사장에게로 먼저가서 자기 몸을 보이고 나음을 입었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음을 주신 분에게 가서 먼저 감사부터 하고 그 후에 율법대로 제사장에게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문둥이 아홉은 율법대로 제사장에게 가서 보였고 오직 사마리아 문둥이만 주님께 나와서 감사를 하였읍니다. 본문성경에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을강조하는 이유는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혈통적으로 반만 유대인인 이를테면 튀기였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죄인시 당했던 사람들로서 현대적인 표현을 하면 소외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읍니다. 그런데 바로 이 소외계급에 속한 사마리아인 문둥이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나와서 감사를 하였읍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아홉은 율법은 지켰지만 감사는 잊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찾으셨읍니다. 그러면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1.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은 첫째로 뜻밖의 결과에 대한 주님의 실망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살전 5:18절을 보면 감사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 감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감사를 잊고 살고 있읍니다. 심지어 불평과 원망을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잊고 살고 있읍니다. 그럴때면 우리 하나님은 실망하십니다. 왜냐하면 감사를 잊으면 참 기쁨과 행복을 잃게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열중에 아홉이란 절대 다수가 감사를 잊고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더많습니다.
그런데 이 감사를 잊고 불평과 불만속에서 사는 이유는 외적 환경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열매가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3:17-18)라고 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절대신뢰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우리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으면 감사가 넘치게 될줄로 믿습니다.
여기 사랑하는 아버지가 두개의 선물꾸러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같은 값이면 큰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큰 것을 이웃 집 아이에게 주고, 작은 것을 아들에게 주었읍니다. 이때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아들은 흥 저것은 겉은 크지만 내용은 내것이더 좋다구 하고 믿고 속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집 아이는 비록 더 큰선물을 받았지만 아무래도 이것은 껍질뿐일꺼야 하고 마음이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차이가 생깁니까 그것은 아버지로서 신뢰하느냐 아니면 남으로서 생각하느냐의 차이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믿는다면 우리는 비록 암무것도 없어도 하박국 선지자처럼 감사할 수가 있읍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아버지께서 설마 아들을 버릴것인가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현재 우리가 당면한 외적 환경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느냐는 믿음의 정도에 따라 감사가 나오기도 하고 불평과 불만이나오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가 없으면 이것은 우리의 마음에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들은 얼마나 감사를 하고 있읍니까 만약 감사가 없다면 이것은 그동안 받은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감사가 없을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이없음을 보시고 실망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기쁘시게 못하나니" (히 11:6).
반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는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습니다. 내가 비록 지금 이런 고생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단순히 논산훈련소이다. 내게 그릇준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라는 신호이다 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실망시키지 맙시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감사에 있읍니다. 그러므로 이제 감사를 회복하는 오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러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감사하겠읍니까 지금까지 받은 것만 감사해서는안됩니다. 앞으로 받을 것이 더 큰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릇이 준비안되어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안주시는 것입니다. 그릇만 준비해보세요. 하나님은우리에게 흔들어 채울 것이 없도록 주실줄로 믿습니다.

2.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의 두번째 뜻은 불행을 자초하는 인생들에 대한 주님의 한탄을 표현한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지으셨음을 한탄하" (6:5-6)셨다고 하였읍니다. 주님이 그 아홉의 유대인 문둥병자들에게 한탄하신 것은 그들이 더 큰 축복을 보지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 앞에있는 것만 찾고 있기 때문이었읍니다. 주님은 열명의 문둥병자들이 육체적으로 병이 났는것뿐 아니라 영적으로 구원받는것을 더 원하고 계셨읍니다. 그런데 아홉명의 문둥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원했읍니다. 이 때 주님은 한탄했읍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고 본문에 보면 19절에서 사마리아인 문둥이에게 " 네 믿음이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이 사마리아인 문둥이는 육적 병뿐 아니라 영적 병까지 고침을 받았읍니다. 구원까지 받는 축복을 받았읍니다. 바로 주님이 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육적으로 부유해지는 것뿐 아니라 영적으로 부유해지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축복을 거절할 하나님은 가슴이 아파서 한탄을 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매학기 이번에는 이것을 꼭 주었으면 좋겠다하고기대하는 것이 있읍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학생들이 공부를 안할려고 할 때가 있읍니다. 교수님, 휴강합시다하고. 그런때면 한탄이 나옵니다. 참 불쌍한 것들, 저래가지고 목사가 된 후에 실력이 없어서 이리저리 쫒겨다닐 테니 참 안되었구나 하고. 하나님이 한탄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는 생명의 길이 아니라 스스로사망의 길, 불행의 길로 좋다고 걸어갈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한탄하지 않도록 감사하는 생활을 하십시다. 육적으로뿐아니라 영적으로도 축복받기를 원합니다.

3.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는 말씀의 세번째 뜻은 우리에 대한 주님의 기대를말해줍니다. 그는 우리가 감사하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에게 있어서자리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청와대에 앉아 있으면 아무리 못나도 대통령입니다. 교도소에 앉아 있으면 아무리 잘나도 죄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교회안에앉아있읍니다. 그래서 교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앉아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느냐가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읍니다. 지금여러분들은 어디에 있읍니까 불평의 자리에 앉아있읍니까 아니면 감사의 자리에앉아 있읍니까 본문에 보니 그 아홉은 주님 앞에 없었읍니다. 오직 사마리아인한 사람만이 주님 앞에서 있었읍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주님앞에 있는 이 사마리아인 문둥이 처럼 감사하기 위해서 와 있읍니까 아니면 율법적으로 추수감사주일이니까 그저 나와 앉아있는 것입니까
주님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풍성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요 10: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은 것이라"고 했읍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처럼 풍성한 생활을 하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런데 지금 우리는 풍성한 생활을 못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 앞에서 생활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 15:11절에 보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고 했읍니다. 바울이 옥중에서 기록한 빌립보서에보면 기쁨이란 말이 18번이나 나옵니다. 도대체 바울의 기쁨의 비결은 어디서 온것일까요 이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고(1장), 그의 모본(2장)이요, 그의 목표(3장)요, 그의 만족이었기(4장) 때문이었읍니다. 여러분, 참 기쁨을 원하십니까 주님 중심의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쁨이 생기고, 감사가 생깁니다.
그러면 이 감사주일을 우리는 어떻게 보내야 합니까 무서운 것은 출 23:15에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찌니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손에 헌금이 얼마나 있느냐가 아닙니다. 아무리 헌금이 많이 있어도 감사의 마음이없다면 이것은 빈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즉마음속에 감사가 차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감사의 고백이 우리의 입술에 있어야 합니다. 입술의 열매인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난후에 손에 하나님께 바칠예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무서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그저 많이만 비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일년동안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는 최선의표현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라기는 우리의 손이 하나님 보시기에 빈손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참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마음에 감사가 가득찬 사람에게는천국의 기쁨을 채워서 주시고, 입술에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가득찬 사람에게는 계속적인 찬양과 간증을 주시고 손에 예물이 가득찬 사람에게는 가지고 갈 수 없을정도로 차고 넘치게 손에 쥐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 모두에게 가슴에는 기쁨이 넘치고, 입술에는 찬양과간증이 넘치고, 손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넘쳐서 흔들어 채움을 받는 금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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