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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일들 (암 08:1-12 눅 10:38-42)

첨부 1


여러분 우리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읍니다. 그런데 이 영혼은 육신 보다도 더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한 의사가 어떤 목사님에게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왜 영혼이 구원받느니 어쩌느니 하는 설교를 하느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목사님은 영혼을 보셨나요"
"아니오."
"영혼의 소리를 들으셨나요"
"아니오."
"그럼, 영혼의 맛을 아십니까 아니면 영혼의 냄새를 맡기라도 하셨나요"
"아니오, 나는 영혼의 맛도 냄새도 어던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은 영혼이 어떻다고 느끼기라도 하셨나요아무튼 좋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네 가지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였으니, 어떻든간에 영혼은 없는 셈이 아닙니까"
의사의 질문을 듣고 있던 목사님이 그에게 물었다.
"그럼 내가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질병을 치료하는의사지요 그러니까 고통을 낫게 해주는 것이 당신의 직업인셈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고통을 보셨나요
고통의 소리를 들으셨나요
고통의 맛을 아십니까
고통의 냄새를 맡아 보셨나요
물론 당신은 이 네 가지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오로지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뿐이지요.
앞서의 네 가지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다만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뿐인데도, 당신이나 나나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영혼도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치는 당신이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제 말이 틀렸는가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육신과 영혼은 다 중요합니다. 육신이 없는 영혼만의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고, 영혼이 없는 육신만의 인간은 더더욱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육신에 대해서는 지극한 관심을 늘 기울이면서도, 영혼에 대한 관심은 너무 미미합니다. 영혼이 온전치 못하면, 한갖 짐승에 불과한 존재로 떨어질 염려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별로 걱정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육신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고 부지런히 운동을 하거나 또는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살을 빼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도 있으며, 점을 뺀다거나 눈 수술을 하는 등, 그야말로 그 노력이 대단합니다.
또는 보약을 먹기도 합니다. 요사이 구렁이, 독사, 지렁이, 굼뱅이, 불개미까지 수입하여 정력식품, 성인병 치료제, 만병 통치약등으로 판매하여, 톡톡히 재미를 본 업자들이 많답니다.
"건강 제일주의 족"을 찾아 톡톡히 재미를 보는 것이지요
지렁이도 미제라면 기를 쓰고 사가던 풍조의 시대에서 요즈음은 엉뚱하게 고양이, 두더지, 누에 등을 약용으로 쓰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도 한답니다.
이러다간 멀지않아 "집쥐, 들쥐도 스테미나를 돕는 만병통치 식품"으로 소문이나서 결국 쥐요리 전문점도 생길만 하기도 하겠군요.

여러분!
육신이 건강하다고 해서 영혼도 똑같이 건강하리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대의 영혼은 철저히 병들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육신에 대한 관심은 이렇듯 지대하면서도, 정말 사람다움을 구성하는 핵심인 영혼에 대해서는 너무나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먹고살기가 바쁘다고 하면서도, 육신을 위한 일에는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위한 일에는 너무 인색합니다. 아무리 애써 봤자, 늙어지면 허물어지고 망가질 육신입니다. 살을 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얼마 가지 않아 마른 뼈만 남을 육신입니다. 제아무리 보약을 먹어대도, 병들어 죽고 말 우리의 몸뚱이 입니다.그래 그 썩어질 육신을 위해서는 그토록 마음을 기울이면서도, 진실로 중요하며 영원토록 존재하게 될 영혼에 대해서는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한번은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초청으로 그녀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이 마리아는 마루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때 식사 준비에 정신이 없던 마르다가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주님, 제 동생 좀 호통쳐 주세요. 마리아는 제가 혼자서 힘들게 음식 준비하는 것을 알면서도, 저렇게 말씀 듣는 일에만 정신팔려 있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마르다야, 마르다야!」하고 두 번씩이나 부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여러 가지 일에 너무 얽매여 걱정하고 있구나. 하지만,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 뿐이란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것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신통하냐 나는 그것을 빼앗고 싶지 않구나!」하셨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은 먹고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왜 예수님을 초청했는지, 그 목적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초청했을 때에는 예수님이 멋있는 남자로 보여서 애인 삼고자 함도 아니었을 것이고, 무슨 세상 권세가 있어서 향응을 베풀고자 함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을 초청했으리라 믿어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데에는 소홀한 채, 다른 일로 정신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①너는 여러 가지 일에 얽매여 걱정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②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 뿐이다라고 타이르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진실로 믿음의 사람답게, 주님께서 보실 때에 중요한 일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아니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세상일에 얽매여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믿음의 기준으로 볼 때에 정말 중요한 것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은 채,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 일로 인해서 정신없이 살 아가고 있는 아닌 지요

ⅰ그렇다면 그는 지금 우리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골로새서 1장 22-23절에서 바울 선생은 복음에서 이탈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라고 했읍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은 갖고 있으나, 실상은
①예수 그리스도밖에 머물러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안에서 산다는 말은 진리를 따라 사는것을 말하며, 진리란 구원의 이치를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를 닮아가는 생활이 예수 안에서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런 예수를 닮아 가려면, 그 삶의 목적을 하늘에 두어야 합니다. 곧 영적인 것에 더 비중을 두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양식은 꼬바꼬박 찾아 먹으면서 영의 양식은 굶기를 밥먹듯이 할 때, 과연 그 생활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 이상한 현상입니다. 지난 날 가난하고 굶주릴 때에는, 교통 편이 없는데도 걸어서 10리가 넘는 곳까지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까운 지척에 교회가 있어도 잘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말세가 되면 밥이 없어서 굶주리는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서 목마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당하는 굶주림이요, 목마름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굶주림이나 목마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하여 빼빼한 상태로 말라 가고 있건만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②사람들은 어제나 오늘 할 것 없이 여전히 육신을 위한 일에 치우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죽는 일입니까 사는 일입니까
우리의 육신은 어디까지나 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신이 귀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육신은 우리의 영혼을 담고 있기에 소중합니다.
그런데 육신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겨 있는 영혼은 돌아보지 않고, 썩어져 죽을 육신만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으니, 이를 어쩌란 말입니까

여러분! 육신을 위한 일에 치우쳐 살게 되면 결국
③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에 귀한 것이 담겨 있으면 귀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지만, 그 안에 냄새나는 것이 담겨 있으면 천대받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육(육신)이란 세상 욕심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육신을 위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욕심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밥을 먹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욕심으로 먹을 때, 죄가 됩니다. 무슨 일을 하는 것이 나쁠 리가 없습니다. 명예나 돈을 목적으로 일을 할 때, 곧 육신을 위하여 일하게 될 때에 그 일이 냄새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육신을 위하여 살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만물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과 영광을 이루려고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골1:16)
우리가 사는 목적이 우리 자신의 욕심이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어야 합니다.

ⅱ.그렇다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1.우리가 좀더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모두를 위해 베푸신 일을 생각하면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빌고 있습니다」라고 골로새서 1장 28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베푸신 일을 이지 말아야 합니다.
ㄱ.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악한 생각과 행동을 일삼으며 살고 있는 우리를 되돌려 세워서 하나님과 가까운 사이가 되게 하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골1:22).
ㄴ.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삶으로써, 비난이나 책망 받을 일이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려고 예수님은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②바울은 우리가 완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양식인 말씀을 계속 공급받아 소화를 잘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일을 위해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자기가 택한 것이 좋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그렇지 않은 동생 마리아를 꾸짖어 주기를 바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뜻밖에도 마르다를 책망하고, 마리아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마르다처럼 이 세상과 육신을 위한 일, 곧 자기 자랑과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살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엄연히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죽기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영생의 약속 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2.진리를 굳게 믿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톨스토이의〈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고 하는 작품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가엘이라는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벌로, 지상에서 구두직공이 되어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미가엘은 일하면서 몇 가지 문제를 풀어야 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인간에게 베풀어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였습니다. 어느 날 한 신사가 천사인 이 구두 직공에게 “한 일년 동안 튼튼하게 신을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가엘 천사가 보니, 그 신사 옆에는 죽음의 천사가 와 있었습니다.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건만, 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른 채 1년 넘게 신을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이 미가엘 천사는, ‘인간에게 베풀어 있지 않은 것’이 자신의 죽음의 날짜를 모른다 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호흡이 언제 멎을지 모르는 우리 인생, 이러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①주안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사는 일입니다.
주안에서 좋은 것이란, 물론 영혼을 위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위하여
ㄱ.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열심히 찾고, 그 말씀 안에서 살려는 노력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ㄴ.말씀을 가까이 하다 보면, 구원의 삶이 얼마나 귀한 줄 알게 되고, 그래서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한 일에 힘쓰게 됩니다.
골로새서 1장 27절에 보면,「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계획이 알려졌다」고 했습니다.구원의 길, 곧 진정으로 좋은 것을 택하여 살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잠언서 27장 1절에「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다」고 했으니,

②우리는 쓸데없는 일에 너무 신경을 쓰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먹고사는 일은 다른 세상 사람들도 잘 해결해 나가고 있으니,
우리 믿는 성도는 하나님께서「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義)를 구하라」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늘 우리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③악한 생각과 행동을 버려야 합니다.
죄악은 우리 생각을 아주 쉽게 오염시킵니다. 말씀을 은혜로 받아들여 굳건한 믿음을 가졌다가도 한 번 그릇된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골로새서 1장 21절 말씀을 보면, 악한 생각과 행동을 일삼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되돌려 놓았다고 했습니다.이 죄악된 세상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낼 자는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를 건져 내 달라고 큰 소리로 주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생각과 행동은 이래야 합니다.
첫째,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무엇이 되느냐.
둘째, 얼마나 소유했느냐보다는 어떻게 쓰느냐.
셋째, 섬김을 받느냐보다는 섬기는 생활을 했느냐.
넷째, 육신보다는 영혼이 잘되어야한다.
④주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고난을 기꺼이 겪어야 합니다.
추수 때가 되어 열매를 찾는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심판의 때를 늦출 수가 없다고, 아모스서 8장 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義)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힘든 것은 고난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해 오던 외국인이 한국을 떠나면서 말하기를 "한국 교회는 십자가에 대해 거부적이다"라고 하였다. 축복에는 관심이 있으나 그 관심은 구원얻어 복받고 잘살려는 근본주의적인 입장에서의 관심이지, 삶의 현실에서 부딪히는 십자가에 대한 문제는 아니다.
바울은 「고난을 기꺼이 겪음로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것을 택하게 되면, 거기에는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약속이 보장된 고난입니다.이 고난을 채워 가다 보면, 그리스도의 완전에 점점 다가서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고난을 회피하게 되면, 우리의 영적인 모습은 늘 제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후퇴(퇴행)합니다.

ㅅ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마르다를 나무라고 마리아를 칭찬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육신 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고난을 기꺼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선생의 당부의 말씀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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