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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이 누린 그리스도 Ⅲ (창 32: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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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정부 당국이 현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 한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북한이 지난 해 홍수를 인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정부는 따뜻한 동포애를 가지고 북한에 식량을 지원했습니다. 문제는 인도적인 입장에서 식량을 싣고 갔던 우리 어선을 북한이 억류하고 선원들을 스파이로 몰아 버린 것입니다. 최근에는 자주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우리 군을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적십자사에서는 북한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조사한 결과 북한의 식량 사정이 매우 심각한 입장이라서 남한이 다시 한 번 더 도와야 한다며 지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국제 여론을 보면 도와야겠고, 국민 정서를 보면 그럴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입장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도와야 한다, 돕지 말아야 한다 의견이 다양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이런 기근이 북한 땅에 왜 찾아왔는가 이유부터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6.25 이전에 우리 나라의 모든 중공업 시설은 북한에 편중되어 있었습니다. 경제소득에 있어서도 북한이 60년대 초반까지는 우리를 훨씬 앞질렀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상황이 바뀌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똑같은 땅이요, 붙어 있는 땅인데 북한은 왜 그렇게 기근, 가뭄, 홍수 등의 재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걸까요 우리 한 번 궁금증을 가지고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구 소련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 역사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공산주의의 종주국을 자처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분오열로 나라가 찢어지고, 가난에 시달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동남 아시아의 가난과 남아메리카의 빈곤, 아프리카의 기근은 무슨 뜻이 있는 걸까요
문제는 다양한데 그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 나라들은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 없는 나라와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우상의 나라, 하늘에 총을 난사하며 하나님을 대항했던 나라들은 한 세기가 끝나기도 전에 몰락했고, 더러는 쇠퇴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먹고 살 길이 없어 강대국이나 주변 나라에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해서 볼 때에 우리는 가난한 자나, 나라를 무조건 돕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생각에 직면하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창조의 원리와 목적을 달리 하면 그때부터 문제는 닥쳐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떠난 인간에게 다가온 문제는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만 해결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만난 문제는 어쩌면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연한 도움, 인간적인 도움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도와주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떠난 자는 망하게 되어 있고, 또한 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만나는 길이 그에게 열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안락하고 평안한 상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습니다. 고난과 고통, 좌절의 나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인간적인 도움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역전승의 발판을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야곱은 절대 절명의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축복을 얻었습니다. 오늘 내가 견딜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말씀을 통해 생명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낙심과 좌절 속에 있는 분들은 주님을 만나고 새롭고 출발할 수 있는 역전승의 발판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1. 야곱이 만난 위기
야곱은 20년만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네 명의 아내와 열두 명의 자녀와 많은 재산을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그 길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20년 전에 떠나올 때 형에게 지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가축의 떼를 종들과 함께 앞세워 보냅니다. 뇌물을 바치면 형의 마음의 분노가 사그러들지 않을까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이었습니다. 야곱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에서는 400인의 병사를 이끌고 야곱을 죽이기 위하여 달려왔습니다. 소식을 접한 야곱은 기겁을 하고 놀랐습니다.
심히 큰 두려움을 느끼고 야곱은 종과 가축의 떼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에서가 한 떼를 치면 다른 한 떼는 피하여 건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는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는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고향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형이 나를 칠까 두렵습니다. 형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옵소서. 내 처자와 소유들을 지켜 주옵소서.”
하나님은 야곱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약속하십니다.
“…...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창32:12)
하나님이 응답하셨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어야 합니다. 에서가 어떤 태도로 나오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습니다. 조금 가다가 형 에서에게 줄 가축을 세 떼로 다시 나누었습니다. 1,2,3차에 걸쳐 연속적으로 뇌물을 주면 형의 분노가 아무리 커도 누그러들겠지 하는 생각입니다.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창32:20)
여러분, 야곱이 나와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야곱보다 약합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도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자꾸만 믿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쓰게 됩니다. 야곱은 이렇게 하고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형은 자기를 죽일 것만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두 자녀들로 하여금 먼저 얍복 나루를 건너가게 했습니다. 에서도 결혼을 해서 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자기도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으로서 야곱이 죽으면 저 여인들과 저 아이들은 얼마나 불쌍한 처지가 되겠나 싶어 에서가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까 싶어서였습니다. 인정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야곱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두려운 밤입니까 내일이면 에서와 만나게 됩니다. 야곱은 모두를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고 자기 혼자만 남았습니다.
얼마나 사랑하는 아내들입니까 얼마나 사랑스러운 자식들입니까 어떻게 모든 재산들입니까 어떻게 기른 양과 소와 약대들입니까 그러나 내가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필요 없습니다. 모든 소유가 아깝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나만 살겠다고 모두 떠나 보내고 혼자 남아 있는 자신이 모두에게 한없이 미안하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은 에서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도 그러기는 죽기보다 싫지만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야곱은 눈물을 흘리며 얍복 나루에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 그렇게 앉아서 울고 있는 야곱을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렇게 믿고 인정해야 당신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당신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2. 야곱을 꺾으시는 하나님
처음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범죄 하는 순간 하나님을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영안이 닫히고야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밝아진 것은 육안이었습니다. 눈이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있다가 없어질 것들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반문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어느 것 하나도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속이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그것 바라보다가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세상만 바라보다가 실패한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바라보다가 실패한 사람은 하나도 못 만났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만 좇아갔는데 성공했습니까 하나님만 바라보았는데 실패했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어떤 모임에 가서 사모님이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만 바라보겠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 이제 나는 내 남편도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나는 내 자식도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살리시든지 죽이시든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남편이 죽으면 남편은 시신은 제가 묻겠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그 시신은 제가 묻겠습니다. 나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 나는 주님만 의지하겠습니다.”
왜 그 고백을 그가 하게 되었을까요 사람 바라보다가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남편도, 자식도 떠나갑니다. 그들에게 목을 매면 그들이 떠나가는 날에는 어떻게 살 것입니까 돈보고 웃고, 세상 명예에 즐거워하다가 그것이 떠나가면 그 뒤에는 어떻게 살 것입니까 어차피 떠나갈 것, 어차피 일시적인 것 처음부터 포기하고 사십시오.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나는 남편도 자식도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살리려면 살리시고, 죽이려면 죽이십시오. 죽으면 묻으면 그만이지요. 나는 하나님만 바라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이렇게 믿는 게 비정상적입니까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이 이상하게 들릴 뿐입니다.
욥은 다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전 재산을 일시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열 자녀를 한꺼번에 다 잃었습니다. 욥이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무고하게 잃었습니다. 그런데 욥이 어떻게 나옵니까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0-22)
그는 재산과 자녀만 잃은 게 아닙니다. 건강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온몸을 기왓장으로 긁어야 하는 지경에서도 욥의 태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2:10)
욥은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욥 19:25-27)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고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를 바라보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 절대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고, 환경을 보기 때문에 넘어집니다. 낙심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사랑 하사 절망의 상황 속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절망 속에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어떤 환경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까
① 모든 소유를 의지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20년 동안 피와 땀을 들여 모은 재산입니다. 엄청난 소유를 얻었습니다. 사람은 소유가 있으면 그 재물을 의지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서 모든 소유를 떠나 보내게 하셨습니다.
② 어떤 사람도 의지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 열두 명의 자녀, 그리고 많은 종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기댈 언덕이 있으면 그곳을 의지하게 됩니다. 인연, 지연, 학연, 혈연 등을 의지합니다. 특별히 우리 나라는 이렇게 사람을 의지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의지할 수 없는 환경으로 야곱을 몰아가셨습니다.
③ 자신을 의지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개인적인 능력이 탁월하고, 목표를 정하면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집념의 사나이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과신합니다. 세상에서는 대단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의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교만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더 이상 자신을 의지 못할 환경으로 몰아가십니다.
나라는 자아는 꺾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포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에게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3. 마지막으로 그의 환도뼈가 위골 되었습니다.
소유를 다 잃었을 때, 어떤 사람도 의지할 수 없을 때, 나 자신마저 의지할 수 없을 때 인간에게는 최고의 절망의 때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어떤 때입니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때입니다. 이 때가 어느 시간입니까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이 때는 결코 하나님과 씨름할 때가 아닙니다. 무슨 재산을 다 잃었는데, 가족을 다 떠나 보냈는데 나는 아무 힘이 없는데 무슨 하나님을 찾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때가 하나님과 씨름할 시간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야곱이 모든 걸 잃고 낙심해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붙잡아야 내가 산다. 그래서 씨름판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와주기는커녕 어떻게 합니까 환도뼈를 쳤습니다. 환도뼈가 어떤 뼈입니다. 상체와 하체를 연결해 주는 골반뼈입니다. 여기를 치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이 완전히 무너지는 겁니다. 바로 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도와주기는커녕 환도뼈까지 쳐버렸습니다. 세상에 무슨 이런 하나님이 있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어떻게 합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저주하고 나가 떨어져야 할텐데 더 결사적으로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내 자신이 무너질수록 무너뜨리는 하나님을 원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더 의지했습니다.
무너뜨려 놓고 그냥 가려는 하나님에게 야곱은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놓을 수 없다고 매달렸습니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야곱과 씨름하던 이가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은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자기 잘난 줄 알고 교만하게 살아온 이름입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라. 너는 이스라엘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 야곱의 신분이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4. 브니엘의 아침
야곱이 밤새도록 씨름했던 그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가 궁금해집니다. 야곱은 분명히 사람과 더불어 씨름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야곱에게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사람과 씨름했습니다. 그럼 그는 과연 누구입니까
야곱은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도다.” 죄인은 죄 없는 영으로 계신 하나님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이 육신으로 오시면 그분을 대면하여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씨름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때 그 생명을 보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입니다.
우리가 꺾을 수 없는 사단의 권세를 대신 꺾어 주시는 만왕의 왕, 도저히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없는데 그 죄값을 대신 받으신 제사장, 하나님 만날 길이 없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여신 선지자.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야곱은 나를 살려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자신의 환도뼈가 위골 되기까지 씨름한 것입니다. 야곱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 꺾였습니다. 이사야 41:14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지렁이라고 불렀습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지렁이를 가리켜 뼈가 없는 연체동물, 무골충이라고 합니다. 그 야곱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골충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서야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도우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강한 자가 됩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해가 돋았고, 야곱은 환도뼈 때문에 절뚝거리며 걸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모든 게 다 꺾였습니다. 자신의 신체의 중심이 꺾였습니다. 자신을 지금까지 지배해 왔던 생의 중심이 꺾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마음에는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두렵지 않은 용기가 생겼습니다.
어제까지의 야곱은 위험하다 싶으면 꽁무니에 있다가 줄행랑을 칠 자세였습니다. 그러나 환도뼈가 꺾인 야곱은 도망할 힘도 없었지만 도망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맨 꽁무니로 빠졌던 야곱이 에서가 다가오자 제일 앞으로 나아가 형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는 부둥켜안고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아침에 하나님 앞에 나아 와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여러분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여러분의 아침은 다른 날보다 햇살이 더욱 눈부시고, 가슴이 설레는 감격의 아침이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브니엘의 아침을 원합니다. 축복된 아침입니다. 사람마다 이 아침을 원합니다. 그러나 이 아침은 소유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통해 얻을 수 없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십니다. 내가 나를 꺾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이 꺾은 후에 주십니다.
여러분, 삶의 절망과 낙심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홀로 있는 그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을 붙드세요. 하나님과 씨름하세요. 견디기 힘들면 힘들수록 그 시간은 더욱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얍복 나루터로 부르셨습니다. 씨름할 때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축복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의 마지막 남은 그 환도뼈를 꺾으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싫다고 거부하지 마세요. 그것마저 무너지면 내가 어떻게 사느냐고 소리치지 마세요. 그게 꺾이면 오히려 사는 길이 열립니다. 그게 무너져야 여러분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브니엘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브니엘의 아침이 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해후의 만남이 함께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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