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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세상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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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이 참으로 어지러운 때입니다. 북한에서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주민과 병사들이 자꾸만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어 내려옵니다. 이와 같은 때에 대학생들은 북한에 대표를 파송하고,

8.15를 맞이하여 연일연야 시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치 상황을 보면서 해답의 길을 물어 봅니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학생과 경찰이 서로 죽일 듯이 덤벼드는 극한 대립의 상황을 누가 어떻게 풀어 갈 수 있을까요 오늘의 이 문제는 단순한 학생, 경찰, 남과 북, 정치, 경제만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이와 같은 혼돈의 문제를 가져온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누가 잘하고 잘못한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문제의 근본 원인을 먼저 볼 수 있는 지혜의 영안이 열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삭개오라는 한 인물이 나옵니다. 1절에서 10절에 이르는 짧은 본문 속에 우리는 극한 대립의 상황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로마의 대립,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대립, 바리새인과 세리의 대립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엄청난 감정의 깊은 골을 누가 치료할 수 있습니까 왜 이런 문제가 생겨나며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무엇일까요

1. 인간이 가진 근본 문제
①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을 떠난 영적인 문제입니다.
삭개오는 인생의 목적을 부의 축적에 두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삶의 목적을 돈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착각하고 삽니다. 디모데후서 3:1-2에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물질을 사랑하는 것, 사람보다 돈이 더 존중되는 세상은 불행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부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느끼는 행복의 수치는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돈으로 행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말은 돈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돈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국민소득 1만불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가까운 일본은 국민 1인당 GNP가 3만불을 넘습니다. 그러면 세 배나 우리보다 잘사는 일본은 세 배나 우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의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수는 세계 제일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은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럼 선진국은 행복한 나라입니까 아닙니다. 선진국일수록 예외 없이 굶어 죽는 기아는 적을지 몰라도 자살율이 높은 것이 특징입니다. 잘 사는데 왜 자살합니까 자살은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어서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인간의 행복이 결코 물질의 풍요로움에 있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제 정신으로 사는 게 좋은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이 결코 물질에 달린 것이 아닌데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 풍요를 위해 달음박질합니다. 부유한 사람은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고 있습니다. 그 뒤에 밀려오는 공허함을 견딜 수 없어 방황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성경 창세기 1:26-28을 보면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창세기 3장에 마귀의 유혹을 받고 범죄한 인간은 처음부터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인생의 참목적과 참행복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② 인간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될 인간이 떠난 것 자체부터가 죄입니다. 또 하나님 떠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특징이 죄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들에게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19-21)
인간 범죄의 극치가 무엇인지 압니까 죄를 죄로 깨닫지도 못하며 인정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의 통계를 보니까 출생하여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아이들보다도 낙태된 아이의 수가 더 많다고 합니다. 짐승도 제 새끼는 귀한 줄 압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자기 자식을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죽입니다.
그게 어디 안 믿는 사람들만의 범죄겠습니까 저희가 아는 집사님 한 분이 어느 날 찾아 와서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이유인즉슨 낙태를 여섯 번이나 했다는 것입니다. 화가 지나쳐서 차라리 말이 안 나왔습니다. 생명을 죽이는 일에 그리스도인마저 죄의식이 없으니 불신자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 떠난 인생은 죄짓게 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죽기까지 그들은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 일어났고, 돈을 벌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돈을 버는 일이라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쯤은 당연히 무시해야 했습니다. 경멸의 눈초리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돈 버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떠난 모든 인간의 특성입니다. 이와 같은 죄를 지어서 사람이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 떠난 죄인은 죄를 지으며 죄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인을 손가락질하지 말고 죄인이 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가 그 깊은 뿌리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③ 완전히 사단에게 장악되어 살아갑니다.
마귀는 인간이 그렇게 원하는 바 소원들을 들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최종적인 목적은 그 인간을 장악하는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시험한 내용은 천하만국을 줄 테니 한 번만 나에게 절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삭개오에게 돈이 행복의 최고 기준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돈으로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고 속삭였습니다. 돈만 아는 인간, 그래서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인간은 사단에게 철저히 장악되어 버린 인간입니다.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비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꾸로 철저하게 자기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자기 중심, 육신 중심, 세상 중심의 삶은 철저한 비인간화 현상을 불러왔고 그 사람은 사단이 완전히 지배당한 자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마음의 주인은 탐욕이었습니다. 마귀였습니다. 그 결과 그의 인생에는 캄캄한 어둠이 드리웠고, 세상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는 허전함이 그를 지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 가정, 사회, 국가, 세상은 어디든지 마귀가 주인된 곳입니다.

2. 삭개오의 문제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순전하다’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 이름의 뜻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동족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리장이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 중의 괴수가 된 것입니다.
사람의 직업은 단지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을 설명해 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당시에 가장 죄악시되는 직업이 여자는 창기요, 남자는 세리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 하에 신음하고 있는데 세리들은 로마에 빌붙어 동족의 고혈을 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유행했던 동요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을 정도입니다.
“산에 가면 사자가 있고, 광야에 가면 독사가 있고, 성에 가면 세리가 있다”
그만큼 세리는 경제적인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직업이기는 했지만 모든 사람으로부터 경멸을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세리 중에서도 삭개오는 세리장이였습니다. 그는 세상적으로는 여리고 성의 모든 돈을 한 손에 거머쥘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때마다 더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삭개오는 어려서 조실부모한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누구 하나 자신을 돌보아 줄 사람이 없었기에 온갖 서러움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가난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한스러움이 있었고, 그래서 돈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서점에 가서 「잘 사는 게 복수다」라는 책이 나온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모으면, 남보다 돈을 많이 가지면, 그래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모든 문제의 해결은 돈과 권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 모든 문제의 해결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저와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떠난 인생들로 하나님 만나게 하는 길 되신 선지자입니다. 죄악에서 빠져 나오는 길 되신 제사장입니다. 사단의 모든 권세를 꺾고 승리할 수 있는 길 되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모든 인생들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3. 삭개오가 얻은 구원
① 삭개오를 구원하시는 예수님
㈎ 주님이 삭개오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눅19:1) 구원은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하나님은 구원할 자들을 떼거리로 부르는 것입니다. 한 사람씩 각자 이름을 불러내어 구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야, 뽕나무 위에서 내려오너라” 따뜻한 음성으로 부르셨습니다.
㈐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19:5)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여러분, 날마다 삶의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 공식적인 자리에서 삭개오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구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언하십니다.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나를 믿으면 너희가 구원받는다. 내가 너희를 구원한다.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에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② 삭개오의 반응
㈎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달려갔습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19:3-4)
㈏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 주님이 부르실 때에 급히 내려와 영접했습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눅19:6)
㈑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눅19:8)
㈒ 죄를 뉘우치고 진심으로 돌이켰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 인생의 주인을 예수 그리스도로 삼고 완전히 그 삶에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온갖 비난과 멸시를 받으면서 벌었던 그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했습니다. 남의 물건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율법은 두 배로 갚을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네 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이제 재물에 대한 모든 욕심을 버렸습니다. 주님이 너무 좋았기에 버릴 수 있었습니다. 다 버려도 다 잃어도 그에게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만 따라가기를 원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해도 불만족한 인생보다는 아무것도 없어도 그리스도로 만족한 인생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오늘 아침 조간 신문을 보니까 시위에 가담했던 학생들이 종이에 「우리는 집에 가고 싶다」글씨를 써서 흔들며 안전귀가를 요구하는 사진이 기사와 함께 실렸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한 사람도 놓치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극과 극으로 치닫는 갈등 속에 머리통이 터져라 싸우는 아우성 속에 과연 세상에 무엇이 누가 필요한지를 생각해 봅니다. 문제 해결은 싸움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삭개오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며 세상 모든 사람들입니다. 서로가 잘났다고 싸워서는 문제가 해결이 안됩니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핏대를 올려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 싸움을 그리스도는 종식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에게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당신을 사단의 권세에서 건져낼 수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죄악에서 건지시고 주의 백성 삼으시는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만나는 길이 되셔서 생명과 능력으로 축복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겸손히 고백해 보십시오. 오 주님, 나에게는 그리스도 되신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 나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기도함으로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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