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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신앙1 (민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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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막내아들이 채 세돐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밤에 아이를 채에 태우고 거리를 갈 때 뭔가 가리키며 소리치는 말이 있습니다. “아빠 저기 십자가 있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그렇게 감사하고 아이가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저희집 애들에게 그 찬송가를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잘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214장 4절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머리에 면류관 쓰고서 주앞에 찬양할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하셨네”
그 찬송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저며 오고 정말 저희 부부가 간절히 원하는 소원 중의 하나가 우리 아들이 그 찬송가 가사처럼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원한다면 그 이상도 십자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교회 건물마다 걸려 있는 십자가, 사람들이 장식으로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 옛날에는 저주와 심판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십자가와 성경을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면 죽음을 당해야 하는 나라가 이 땅위에 많이 있는데 우리가 이토록 쉽게 십자가를 접할 수 있다는 거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너무 흔하게 자주 볼 수 있기에 오히려 그 의미는 쉽게 반감되는 것 같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고, 가까이 살수록 오히려 상대방에 대하여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에 몇 번씩 예배를 드리기에 예배는 어느덧 형식에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독소는 없는 줄로 압니다. 교회가 행하는 모든 예식을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막연하게 형식을 좇아 드려진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일년에 몇 차례 성만찬 예식을 합니다. 알지 못하고 드리면 어리석게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일생에 유일하게 한 번 세례 예식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받으면 그것도 큰 죄가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게 중요하지 않고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르게 알아야 바로 행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무엇인지 바로 아는 사람만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성만찬도 알고 받아야 합니다. 세례도 알고 받아야 합니다. 십자가도 그 의미를 알고 달고 다녀야 합니다. 바로 알지 못하면 거룩한 진주를 개에게 던지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기독교 최고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최고 사랑의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최고의 저주였음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인류 최대의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가 담당하셨기에 최고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 주간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기회를 삼고자 합니다.

1. 십자가 신앙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지금 신자들이 자랑으로 달고 다니는 십자가는 고대 로마에서 중죄인을 처형하는 사형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로마인들에게는 절대 이 사형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사도 바울은 목이 잘려 순교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받는 사람을 향하여 아무도 동정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큰 죄인에게 내려지는 죽음의 선고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사람은 발가벗기게 되어 있습니다. 부끄러운 수치와 수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고 비난의 소리 가운데 죽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 피냄새를 맡은 온갖 독충들이 날아와 그들의 몸을 쏘아 댑니다. 때로는 파리 모기 등 독충들이 기도를 막아 호흡이 끊어지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사람은 빨리 죽지 않습니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최장 시간 당하다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여섯 시간을 못 박혀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예수님은 채찍에 맞고 이리 저리 잠도 못 자고 끌려 다녔기에 지칠 대로 지쳐서 그는 빨리 죽었지만 좌우편의 강도는 숨이 끊어지지 결국은 다리를 꺾어 그들의 생명을 끊었던 것입니다. 기록에 보면 사흘 이상 매달려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이 십자가 죽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이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죽음입니다.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그 엄청난 진노 앞에서 내가 그렇게 죽어야 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오늘 이 자리는 무의미한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이 저주를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십자가 신앙은 제일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2. 십자가 신앙은 죄의 삯이 사망임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십자가는 세례와 더불어 하나님을 떠난 자의 삶의 결과가 사망임을 인정하는 상징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결코 살아서 내려오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세례와 더불어 내가 사망의 결과 앞에 놓여 있다는 자기 신앙의 고백입니다.
세례가 무슨 뜻입니까 사람의 머리 위에 물을 얹어 인간이 물아래 있음을 나타내는 예식입니다. 인간이 물 속에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사람은 땅에서 살아야지 물 속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내가 사망의 결과 아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에 내가 연합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그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부활하신 것은 내가 다시 산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 이것이 세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고,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하는 순간 인간에게는 세 종류의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① 영적인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이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② 육적인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마다 목숨을 있을지언정 생명은 없습니다. 목숨은 일정 기간 동안 호흡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영원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인간이 과학과 의학의 힘을 빌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호흡 있는 자는 다 죽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 이전의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우리도 죽을 것입니다. 우리 이후의 세대들도 죽게 될 것입니다. 오늘 갓 태어난 아이도 성장해 가지만 실상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의사도 죽고, 약사도 죽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이도 죽고 노인도 죽습니다. 영양 식품을 먹어도 죽고 불로초를 구해 먹어도 죽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란 결과는 왜 오는지 압니까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죽지 않은 사람, 죽지 않을 사람 있다면, 그런 자신감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죄인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가 사람이 볼 때는 성인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다 같은 죄인입니다. 이 죽음의 결과 앞에서 사람들은 절망하지만 그러나 먼저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③ 영원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한 번 죽음으로 모든 인생이 몇 십년 참고 견디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 영혼은 영적인 존재인지라 육신의 장막을 벗은 후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계14:10-11)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십자가 앞에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필요도, 구원받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내가 죄인이고 죄인에게 주어진 죽음의 결과와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여기서 구원받기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3. 십자가 신앙은 구원의 길이
우리에게 없음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어떤 상황과 조건을 전제로 해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아야 할 조건을 바로 알지 못하면 구원이라는 말도 이미 성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① 창세기 3:1-6,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단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범죄했습니다. 따먹고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인간은 그 즉시로 생명을 상실했습니다.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다 상실했습니다.
②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죄인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3:10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성경 로마서 6:23은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는 영적인 죽음이 왔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영원한 심판이 기다라고 있습니다.
③ 요한복음 8:44에 사단에게 장악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마귀의 자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신분에서, 이 올무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총체적으로 여기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신앙은 여기에서 빠져 나오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자신을 죄와 저주와 사망의 결과에서 건질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예수 외에 인간을 건질 구세주가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를 보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없습니다. 하나님 떠난 인간이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길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대신 피 흘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방법 외에 없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인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고 권세를 깨뜨리는 방법 외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다른 길이 예수 외에 없습니다. 천하에 구원 얻을 이름을 예수 외에 하나님이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유일한 이름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바로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말은 애원이 아닙니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구원받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상황에서 구원받은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 이전에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 하나님의 심판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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