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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신앙3 (계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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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의 교차점입니다. 그 교차점에 저와 여러분이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라고 하는 시간의 교차점 위에 오늘 현재의 저와 여러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앙을 바르게 소유하려면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또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몇 주간에 걸쳐 십자가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우리. 그리고 후손까지를 생각하며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더 점검하는 시간을 삼고자 합니다.
늘 우리는 위를 보고, 아래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부모님과의 관계, 내 자녀와 후손과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시간사적인 개념에서 생각하면서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십자가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자신이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고 계시지만 주된 초점은 시간을 들어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①·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② 알파와 오메가
③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우리의 신앙이 어떤 신앙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음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모든 역사가 끝나게 될 것임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태초부터 종말까지,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까지, 내가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우리의 모든 삶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내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내 자녀와 후손의 삶까지 모두가 다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안하고 근심, 염려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인생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 안에 내가 자녀라는 신분으로 소속되어 있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모든 일이 주의 뜻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참된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근심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의 모든 형편을 보고,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의 사정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앙은 자신의 모든 믿고 의지하는 바를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그 사랑의 끝없음에 두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영원하심에 나를 맡기고, 그 엄청난 사랑에 나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난할 때 부하게 하고 가난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가장 많이 하나님께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몸이 가장 피곤하고 지칠 때 새 힘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임을 깨닫고 가장 많이 주를 위해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신앙은 언제 어디서나 주님만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끝없이 위를 향해 올라가는 신앙입니다. 독수리같이 끝없이 올라가는 신앙입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7-31)
문제가 크면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이 길면 더 오래 기도하면 됩니다. 십자가 신앙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하나님 존재의 영원성을 믿습니다. 아들까지 주신 엄청난 사랑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언제 어디서나 주님만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이게 안 되는 사람은 십자가 신앙이 아닙니다.

2. 십자가 신앙은 부모님의 영혼을 책임지는 신앙입니다.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의 교차점입니다. 부모님과 자식 사이에 내가 있습니다. 그 중간에서 내가 먼저 할 일은 먼저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은 내가 부모님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아래로 내 자녀와 후손들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신앙의 길잡이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내 자녀의 삶이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바로 나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지진이 일어나 감옥문이 열리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는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물었습니다. 그 때 바울이 어떻게 말을 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은 내가 예수 믿으면 저절로 온 집안이 믿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네가 믿었으면 네 가정의 구원은 네가 책임지라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면 부모님은 내가 구원시켜야 합니다. 내 자식은 내가 구원시켜야 합니다.
몇 주 전에 기도원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는 가운데 제가 놀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거기에 목사님, 전도사님, 장로님, 집사님 등 15명이 참석했는데 자녀들은 다 믿고 있었지만 부모님들은 거의 대부분이 불신자들이었습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은 한두 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점에 대하여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적어도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목사가 되기까지는 10년 이상의 세월은 다 걸렸을 텐데 시간이 없어서 부모님에게 전도 못한 것도 아닐텐데 ….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저 자신도 아직 아버지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 사실 때문에 직무를 유기한 사람으로 깨달아지자 마음이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 때 제가 결심했습니다.
‘그렇다, 빨리 부모님이 구원받도록 더 기도해야 하겠다. 전도해야 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목사만의 문제가 아니므로 교회에 돌아가면 성도들의 가정이 전부 복음화 될 수 있도록 더 많이 기도해야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성도들의 부모님이 어디에 계시든 구원받을 수 있도록 더 기도하고 많이 가정이 복음화될 수 있도록 도와 드려야 되겠다.’
결심을 하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부모님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신앙입니다. 부모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 자식의 육신적인 삶을 책임집니다. 이제는 불신 부모의 구원을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내가 가만히 있는데 그 분들에게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내가 내 부모의 영혼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데 누가 그들에게 전도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십자가 신앙은 부모님의 영혼을 책임지고 구원하는 신앙입니다.

3. 십자가 신앙은 자식과 후대를 책임지는 신앙입니다.
저의 친척 가운데 부모님이 모두 권사님들인데 자식들이 하나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 가정이 있습니다.
“우리집 아이들은 하나도 교회를 안 다녀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부모님들이 자녀들이 교회 안 다니게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다 제사를 지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아무런 신앙의 가책 없이 하는 것입니다. 왜 인간에게 불행과 저주와 고통이 끊이지 않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문제, 죄와 저주의 문제, 사단문제 등 인간의 근본문제를 하나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하신 이름, 그리스도도 알지 못합니다. 제가 볼 때도 그럴 바에야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고, 그렇게 믿을 바에야 예수님을 믿으라고 자식에게 말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가 모든 불행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입니다. 이 길만이 살길이요, 이 길 외에는 구원의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길에 서야 하고, 내 자녀와 후손들도 이 믿음을 가지고 살도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철저하게 부모에게 달렸습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이삭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삭 때문에 야곱이, 야곱 때문에 요셉이 복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양심적으로 질문해 봅시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 자녀가 복을 받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어릴 때를 아름답지 못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어머니를 원망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목사가 되어 주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늘 아쉬운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렸을 때 가난한 부모님이 자신을 위해 해준 것이라고는 배아플 때마다 배를 쓸어 주며 네 배는 똥배, 내 손은 약손이라는 말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두 손을 꼭 쥐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기도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목사님에 대한 불평, 원망, 시기, 비난을 일삼았던 부모님이 못내 원망스럽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자녀와 후손을 위해서 우리는 자기 신앙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어진 환경에는 자족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신앙수준에는 만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늘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모습들은 크게는 오늘날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작게는 성도들 각자의 다양한 신앙의 형태입니다. 그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자만하고 있는 교회였으나 주님이 보실 때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7-19)
그 교회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스스로 도취하여 자만하는 신앙이 되면 우리 자손과 후대에 가면 신앙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저주와 고통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 번 뒤돌아보십시오. 신앙이 없을 때, 내가 하나님을 잘 믿었다 할지라도 그 다음 시대를 이어나갈 지도자가 없을 때 그 시대는 반드시 고난을 당하고 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앙은 결코 나 하나만 잘 믿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를 책임질 수 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내가 죽어도 나의 신앙의 영향력은 이 땅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피의 언약을 잊었을 때에 후손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게 되는 비극의 역사를 맞이하게 됩니다.
내 신앙을 후대에 계승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상숭배에 빠지고 저주와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손 천대에 이르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자손 천대까지 복을 받는 길이 나에게 있습니다. 반대로 자손 삼사 대가 망하는 길이 나에게 있습니다.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4-6)
저는 늘 우리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저들의 장래를 생각해 봅니다. 저 애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과 저들의 믿음을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세상을 이겨낼 믿음이 있다면 노아처럼 승리할 것입니다.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상실하거나 약해지면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저희 가정의 아이들을 보면서 염려스러운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가지가 아이들의 신앙이 겉모양만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하라면 합니다. 기도하라면 중얼중얼 기도합니다. 목청을 돋구어 찬양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완전히 겉넘어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문제는 어찌 보면 겉넘어가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을 완전히 형식적으로 때워 버리는 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신앙생활 하나 하나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모든 책임이 우리 부부의 신앙 가운데 그런 형식적인 단면들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어쨌든 늘 관심을 가지고 책임 의식을 가지고 곁길로 가지 않으면 올바른 믿음의 길로만 가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그 길을 걸어가려 합니다.

①·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② 알파와 오메가
③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 분 앞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가장 가깝게는 위로 하나님, 그리고 부모님, 아래로는 자녀와 후대를 이끌어 줄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하신 심판의 주님 앞에 서는 것처럼 저들도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언제, 어디서나 주님만 바라보고 우리의 전 세대와 다음 세대를 책임질 수 있는 신앙입니다. 영원하신 주님의 함께 하시는 축복이 넘쳐 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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