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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대교회 사람들 (행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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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까 하는 것은 우리 모든 신자에게 관심 있는 내용이고 또 세상 사람들까지도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장난삼아서 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말세는 언제부터인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부터이다. 사도행전부터 말세는 시작되었고 그 말세는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제는 말세가 너무 길어서 말세라는 말이 조금 빛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때도 주님은 곧 오신다고 했고 지금도 곧 오신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천 년이나 속아온 인류역사가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데에 대하여 이제는 더 이상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말세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창세기 5장을 통해 말세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창세기 5장에는 옛날 아담이 살던 시대의 족보들과 수명이 나온다. 모두 구백 년 이상을 산다. 그런데 창세기 5장을 별칭으로‘죽음의 족보’라고 한다. 얼마를 살았든지 끝에는 죽었다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창 5:1)” 그런데 마태복음 1:1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세계의 ‘계’자는 이을 ‘系’자이다. 여기 족보에는 죽었다는 기록이 없고 낳았다고만 나와 있어 앞의 것과 대비하여 ‘생명의 족보’라고 일컬어진다.
예수님의 족보는 생명의 족보가 되고 아담의 족보는 죽음의 족보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무엇을 부러워 하는가 하면 죽음의 족보를 보고 구백 년 이상을 살았다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사실은 오래 살았다는 것이 기록의 목적이 아니라 죽고야 말았다는 것이 기록의 목적이기 때문에 부러워할 것이 못된다. 그런데 이 족보 중에 죽지 않은 사람이 등장한다.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
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
에녹은 어떻게 이 죽음의 족보 속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 성경은 거기에 대한 두드러진 표현은 없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생애가 365년인데 하나님과 동행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이고 그 이전에는 아닌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면 므두셀라라는 아들을 낳는 것이 에녹에게 있어서는 신앙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는 힌트를 얻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이 ‘그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이름을 함부로 짓지 않는다. 특별히 이런 이름은 그냥 지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에녹이 무슨 계시를 받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한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에녹이 정말 그런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 구절이 나온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
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
께 거스려한 모든 강팍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 1:14-15)”
에녹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 말하자면 어느날 하나님이 에녹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이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겠다. 내가 네게 아들을 줄텐데 그 아들이 죽는 날이 내가 세상을 심판하는 날이다. 그러니 네 아들의 이름을 그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라고 해라’ 하셨다.
여기서 잘 생각하여야 한다. 에녹 쪽에서 볼 때 작 아들이 죽는 날이 심판이 떨어지는 날이다. 그러면 언제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있는가 죽을 때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있는데 므두셀라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는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임하니까 이 심판에 대비하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에 해야 한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에녹의 신앙이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은 동행을 한다. 왜냐하면 므두셀라가 태어나자마자 죽을 수도 있으니까 태어나는 날부터 긴장 일변도이다. 므두셀라가 969년을 살았으니 오래 살아서 다행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말세라는 뜻이다. 말세란 기간이 얼마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서에 관한 것이다. 이제 최후의 심판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시는 날이 마지막날이다.
초림 때까지는 마음을 놓아도 된다. 재림 때가 심판날이니까 첫 번째 오시는 사건까지는 마음을 놔도 된다. 그러나 오셨다가 가신 다음에는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른다. 즉 이제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사건까지는 남아 있는 다른 사건과 순서가 없다. 재림만이 남아있고 그날에는 심판이 이루어진다. 그것을 말세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세가 얼마의 기간이 될지는 모르나 순서상으로는 제일 마지막이다. 이제 어느날이든지 주께서 오시면 끝이다.
그것이 얼마나 확실한 사실인가 하는 것을 므두셀라 사건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 지나가자.
“므두셀라는 일백팔십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년을 지
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라멕은 일백팔
십이세에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노아라 하여(창 5:25-29)”
에녹의 아들이 므두셀라, 므두셀라의 아들이 라멕, 라멕의 아들이 노아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실제로 노아의 홍수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연대가 재미있다. 므두셀라의 아들이 라멕이고 므두셀라의 손자가 노아이다. 므두셀라가 아들을 낳은 나이가 187세이고, 그 아들 라멕이 손자를 낳은 때가 182세였다. 그러니까 노아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인 므두셀라는 369세이다.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
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 7:11-12)”
홍수는 노아 600세 때에 일어났고 할아버지가 969세 때이다. 므두셀라는 969세 때 죽었고 그 이름의 뜻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가 정하신 것과 그가 말씀하신 것을 식언치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 창세기 족보 중에 므두셀라의 나이가 가장 긴 것은 그런 의미에서도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이 심판을 가능한 한 늦추심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회개케 하는 기간을 기회로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순서적으로는 이제 변함이 없다. 그 중간에 다른 순서가 없다. 그래서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이제 도적같이 그가 오신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
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
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
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 5:1-6)”
도적같이 임하는데 우리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정리하여야 한다. 도적같이 임한다는 뜻과 말세라는 뜻을 같이 정리해 보자.
말세라는 것은 기간이 얼마 남았다는 뜻이 아니라 순서가 그것밖에는 남은 것이 없다는 뜻에서 말세이다. 남은 순서는 오시는 것과 심판밖에 없다. 그런데 왜 그것이 도적같은가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도적같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4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 도적같이 온다는 뜻은 무엇인가 하면 저들은 어두움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갑자기 당하고 우리는 거기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적같이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즉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오심에 대하여 대비가 없기 때문에 당황하고 놀랍게 맞이할 것이고 우리는 준비하고 있다가 맞이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도적같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생활 자세를 말하는 것인가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
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
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26-30)”
이것이 도적같이라는 뜻이다. 지금 두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고 하나는 노아의 홍수이다. 주님께서 예를 드는 것은 주님께서 오시는 때에도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오심에 대한 준비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일들이 무엇인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 먹고 마시는 일, 사고 파는 일, 심고 거두는 일’이다. 이것이 죄인가 이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이런 일을 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다. 그러면 왜 이것이 문제인가 이것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왜 잘못인가 그러나 그것밖에 모르는 일은 죄다.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먹고 마시고 옷을 입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에 모든 신경을 다 빼앗겨 버리는 것은 큰 잘못이다. 우리는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깨닫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볼 때가 되었다. 주님이 언제 오실른지 모른다. 이것은 협박이 아니다. 남아있는 순서가 그것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오시면 끝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주님이 오실 날을 대비하면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같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이 무얼 하고 있는가 물으면 나는 집을 사고 팔고 있다고 말하면 안된다.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하나님께 부여받은 일종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이다. 우리들은 매일 매일의 생활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이 유일한 목표이기 때문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가 오면 준비할 것은 집이 아니라 오히려 배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밭 갈고 씨를 뿌리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 짓고 사고 팔았다. 이같이 미련한 것은 없다.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뽑아낼 것이다. 그 곳이 영원한 집이 아니다. 그 곳은 유황불을 내려서 태워 없앨 곳인데 거기서 내 땅이 크다, 네 당이 크다 하며 싸워서 무엇 하겠는가
우리의 세상에서의 사람의 성실한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목표로 하고 세상의 것으로 결과되게 하는 노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준비하는 자세에 나타난 표에 불과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사고 파는 것에 모든 것을 너무 걸어서는 안된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좋은 학교에 다니면 공부를 잘해야 되듯이 우리가 예수를 믿었으면 예수를 잘 믿어야 한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예수를 잘 믿어야 하며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님이 오시는 것이 기쁘고 반갑고 갈급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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