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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로 깨닫고 사는 삶 (전 07: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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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세상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 할 때 그 지혜를 다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는,23절-25절 까지는"인생 문제의 해결은 인간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라" 고 말씀 하십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기도해서 천하의 누구보다도 더 많은 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많은 지식과 지혜가 있었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지혜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던 그가 말년에 지혜가 자기를 멀리했다고 고백했습니다.<23절> 그리고 세상에서 살면서 완전한 지혜를 가지고 살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결국 완전한 지혜는 한 개인의 소유물일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공부를 많이 했어도,또 삶의 지혜를 터득했다 하더라도,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런 것이 지혜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와 동행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됩니다.

과학이나 문학이나 예술이라면 실험이 가능하고 그것을 통해 얻은 결론으로 논증할 수가 있지만 인생은 실험이 불가능합니다. 사색으로도 해결이 안 되고 실험으로도 해결이 안 됩니다. 인생이란 내가 움켜 쥐고있는 한 늘 불안하고 그것은 마치 저린 팔로 유리 그릇을 드는 것과 같이 언제 깨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인생을 살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 전도자의 체험을 통한 고백입니다.

내게 지혜가 필요한 상황에서 나는 내 머리, 내판단을 먼저 의지하지는 않습니까 진정으로 그러한 때 하나님의 지혜를 의뢰합니까 둘째는,26절-29절까지"죄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달으라" 고 말씀 하십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지혜로운 왕으로 시작했다가 말년에 범죄하게 된 것을 돌아보며 자기가 하나님을 모르는 여인들을 무절제 햐게 사랑한 것이 원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왕의 지위를 남용해서 수많은 여인을 거느린 것도 문제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여인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게 만든 것이 더욱 큰 문제였습니다.<왕상11:3-4> 하나님과 함께 시작했던 지혜의 사람이었으나 하나님과 멀어지면서 지혜도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지혜가 멀어진 것은 하나님과 멀어진 것이며 하나님과 멀어진 것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과 지나셍"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죄는 사냥꾼의 올무와 같습니다. 새그물과 같고 포승과 같습니다. 그래서 한번 올무에 걸려들면 풀려날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일단 그물에 걸리면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포승도 한번 묶이면 자기 힘으로 풀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이 풀어주어야 합니다.

롬7:23-24절을 보면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바울도 자기를 얽어매려고 하는 죄의 세력이 얼마나 강하며 자기를 죄의 법 아래로 끌고 가려는 죄의 힘과 작용이 얼마나 집요한가를 느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내게도 나를 파멸시킬 일천 여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들이,어떤 일들이 나를 올무같이 포승처럼 얽어매고 있습니까

우리는 죄의 해결 방법을 깨달아야 합니다.

--현대인은 죄나 죄책이라는 말 앞에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망각합니다. 그대신 "컴플렉스"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정서적인 불안,신경증을 가진 사람들,혹은 공포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근저는 결국 죄문제입니다.

현대인들은 죄라는 말 대신에 다른 용어를 발견해 냈을 뿐 인간이 죄와 더불어 갈등하며 씨름하고 있다는 그 사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죄책에 대한 성경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죄에 대해서 그리고 죄책 에 대해서 단 하나의 유일한 해결책밖에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것은 자백입니다.자백을 통해서만 죄문제는 비로소 해결될 수가 있습니다.

<요일1:9절>"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신자들은 자백이나 회개라는 말들을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너무 쉽게들 생각합니다. 너무 쉽게 형식적이고 습관적이고 의례적인 고백 정도가 자백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자백은 무엇입니까 자백은 우리의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자백의 참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죄책에서 벗어나려고 취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얼마나 무기력하며 그것들 이 결코 죄책을 해결하좔哺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성경이 가르치는 자백의 능력과 자백의 위대함을 깨닫게 됩 니다.

 1.죄문제의 해결을 위한 시도-사람들은 어떻게 죄문제를 해결하러고 시도합니까 그들은 주로 아래와 같 은 방법들을 통해 죄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1>은폐-죄를 범하고 나서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자기의 죄책을 숨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숨겨집니까 성경에 나타난 인물 다윗을 봅시다.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후 그는 신앙인이면서도 그 죄에서부터 숨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아 를 전쟁터에 보내어 일선에서 죽게 했습니다. 사건은 끝났습니다. 그는 완전 범죄를 했고 아무도 그 사건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그는 두 다리를 뻗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앞에 나단 선지자를 등장시키십니다. "당신이 이런 죄를 범했 오." 다윗은 마침내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의 죄를 폭로하게 됩니다. 여러분 은폐는 해결이 아닙니다.

 2>전가-죄책을 전가 시키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핑계함으로써 거기에서 벗어나 보려는 심리 때문에 우리는 종종 자기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킵니다. 그리고 자기와 꼭같은 잘못을 남에게서 보게 될 때에 그 이웃을 지나치도록 잔인하게 비판하고 그 사람을 고발하고 짓밟는 장면 속에서 역시 우리는 인간의 전가의 심리를 볼 수 있습니다.

 3>자기 합리화--또 하나는 보편화 혹은 자기 합리화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내가 잘못하기야 했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꼭같이 실수 하지 않는가 결국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는데" 그래서 자기의 잘못을 가 볍게 여겨 그 잘못과 죄책에서 피하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입니다. 사실 그때 다른 많은 제자들이 주님이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것을 보고 신앙을 포기하고 떠나갔습니 다. 이때 베드로가 이렇게 자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디 나뿐인가 다른 제자들도 다 주님을 떠났는데 "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의 마음이 위로되겠습니까 평안하겠습니까 자기 합리화는 해결이 아닙니다.

 4>보상-주위에서 절에 열심히 다니시는 분들을 보면 왜 그렇게 열심히 나가냐고 물으면 "저요 젊었을 때 하도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죠"라고 대답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절에 나가 열심히 선행을 하고 종교적인 일을 하면 자기의 마음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렇게들 한답니다. 이것이 바로 보상심리입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과거에 잘못한 것이 조금쯤은 덮어지지 않을런지! 그러나 여러분 보상은 해결이 아닙니다. 얼마만큼 보상해야, 얼마 만큼 일을 해야 과거의 잘못에서 당신이 자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보상은 해답이 아닙니다.

 5>자학-이것은 일종의 자기 처벌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를 처벌하지 않고는 마음이 평안하지 않으니까 그것이 육체적 학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처벌의 문제는 어느 만큼 자신을 처벌하고 학대해야 그 죄책에서 자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한계가 어디까지입니까 그것이 가룟 유다의 예입니다. 그는 스승을 팔았습니다. 그 죄책에서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목을 메달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자살했 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까 자살은 해결이 아닙니다.

 2.성경적인 시도-자백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 문제는 자백입니다. 자백이무엇입니까 첫째로,하나님과 함께 하나님편에 서서 내가 잘못한 잘못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수준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의 수준에서 바라보므로 "저 사람도 저런 잘못을 하는데 나라고 별 수 있나"라는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에서 죄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내 잘못을 어떻게 말하는가 하나님은 이 죄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나님이 내 잘못을 죄라고 말씀하신다고 할 때 그렇다면 우리도 동의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이것이 자백입니다.

둘째로,하나님의 소원을 따라서 이 죄를 버리고 포기한다는 행동을 수반해야 합니다.

자백이란 단순히 입술로만 잘못을 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이제 이 죄를 떠납니다. 더 이상 우리 하나님을 슬프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살아계신 하나님 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제가 불편하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이 를 포기합니다" 라는 것이 자백입니다.

이렇게 자백하면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포기하기를 결심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 "주님,제가 이 죄를 범했습니다" 라고 겸손히 인정하고 그 죄를 버릴 때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이 말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첫째는 미쁘시고이며, 둘째는 의로우사 입니다.

미쁘시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실수를 아시고, 용서하기로 작정하심,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약속대로 우리를 용서하심, 그분은 신실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죄를 용서하십니까 의롭다면 죄를 면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처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용서하신다고 말합니까 하나님은 이미 그 죄를 처벌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처벌하면 나는 끝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내 죄를 대신 담당케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는 이 선언은 값싼 선언이 아닙니다. 그 죄를 담당하고 피를 흘리신 희생을 통해서 선언하시는 이 위대한 용서의 선언과 감격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용서하신다고만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용서란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타나는 동사인 "깨끗하다"는 것은 죄의 결과를 말합니다. 죄때문에 내가 받은 상처, 그오염까지 깨끗하게 해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은혜까지 주십니다. 아버지를 반항하고 떠나갔던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아버지여, 하늘과 아버지께 제가 죄를 범했습니다.

이렇게 자백하는 아들을 아버지는 용서하고 그 다음에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십니다. 그리고 발에는 신을 신겨 주십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제부 터 새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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