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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 이레 (창 2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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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미가 선지자는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우리도 미가 선지자처럼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올 때 가지고 나올 제물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그리고 미가처럼 흔히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올 때 들고나오는 제물 하면 얼른 헌금을 연상합니다. 정말 헌금은 하나의 중요한 제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어렸을 때의 일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만 주일이 되면 아침밥을 먹고 난 뒤 어머니께서 새 옷을 입히시고, 토요일에 은행에서 바꿔온 빳빳한 새 돈을 주시면서 이 헌금을 꼭 하나님께 바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때때로 교회로 가는 길에 맛있는 사탕이 있어서 어머니가 주신 헌금으로 사탕을 사먹곤 한 일이 있었지만,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 전통은 상당히 정착되어 오늘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경건한 성도들은 정성껏 헌금을 준비해서 예배에 나오고,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 정성껏 드립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헌금은 제물이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총에 대한 우리의 응답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감사의 예물과 제물을 구분해야 합니다. 감사의 예물은 헌금처럼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에 대해 감사하는 뜻에서 드리는 것이고, 제물이란 것은 원래 내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할 심판을 대신 져줄 그런 희생물을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양이나 비둘기와 같은 동물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해야 할 정도의 죄를 가지고 있는데, 그 동물이 대신 죽음으로서 내 죄를 대신 진다는 뜻에서 희생 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은 이 제물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동시에 역사의 주인은 역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잔인한 이야기이고 아슬아슬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중년의 나이때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내셔서 근 100세가 될 때까지 온갖 고생을 하게 하시다가 드디어 100세가 되었을 때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아들인가는 새삼스럽게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문자그대로 금지옥엽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하나님이 오늘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 금지옥엽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다 지킬 수 있어도 이 명령만은 제정신을 갖고는 지키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아브라함을 다시 갈데아 우르로 돌아가라고 하는 명령이 더 쉬운 명령일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하더라도 아들을 불에 태워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것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가 비정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은 사환들에게 "너희는 여기에 남아있으라 내가 이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오리라."고 말하고 모리아산정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모리아산이 지금 예루살렘 이슬람 황금성전이 있는 바로 그 지점이라고 합니다.

번제에 쓸 나무는 이삭이 지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들고 산으로 올랐습니다. 그 때 심정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아버지의 속도 모르고 아들은 철없는 이야기를 자꾸 겁니다. "아버지 여기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는 아마 눈물을 감추면서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다."고 둘러댔습니다. 이렇게 둘러댄 것은 사실 나중에 결과적으로 맞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윽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산 정상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단을 쌓고 나무를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서는 100세가 되어 얻은 자기의 독생자 이삭을 밧줄에 묶어 그 나무 위에 올렸습니다. 성경에는 이삭이 반항하거나 발버둥쳤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치려는 순간에 하나님의 사자가 소리쳤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다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바로 여기에 제물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취할 세 가지 중요한 태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대로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뜻대로 판단하지 않고 100세 때 주신 아들을 바치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였습니다.

둘째는 아낌없이 바쳤다는 것입니다. 독자라도 아낌없이 바쳤다는 것은 완전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셋째는 오늘 말씀의 핵심이 되는 '경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할 때 확인하고 싶었던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경외심,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바로 예배하러 나오는 자의 가장 중요한 제물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도, 아낌없이 바치는 것도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란 것은 무엇입니까 경외(敬畏)란 말은 한자에서는 문자그대로 "공경하고 어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경외란 단순히 공경하고 어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역사의 권한을 다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경외란 단어가 나오면 얼른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기 1:17에 나오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입니다. 이들은 애굽의 바로왕이 히브리여인들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바로 죽여버리라고 내린 명령을 거역하고 다 살려주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바로왕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시며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사상은 잠언이나 전도서와 같은 지혜문서의 핵심적인 사상인데 특별히 전도서에서의 하나님의 경외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란 말로 시작되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로 끝나기 때문에 얼른 보면 허무주의의 극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에서 헛되다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역사를 만들려고 해도 인간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뜻하는 바를 다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에서의 하나님 경외사상은 곧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모든 역사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만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그런 완전한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 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믿음을 보이기 위해서 아들을 바치는 것은 인도주의적인 면에서 보면 비정한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세에 얻은 아들까지 바칠 수 있는 그의 정신은 바로 그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미가선지자가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고민하면서 그가 얻은 해답은 여호와께서는 천천의 수양도 만만의 기름도 원치 않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미가의 이해도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가장 필요한 제물은 물질적인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이며 하나님의 원칙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자세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의 질문을 한 단계 더 앞으로 끌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무슨 대책을 가지시고 아브라함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바치라고 요구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고 하지만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절실히 필요한 부분과 바로 그것을 바치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를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신비한 하나님의 대안을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 이삭을 묶어서 제단에 바칠 때 아브라함은 이것으로 끝이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을 내려칠 순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막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신앙을 확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수양 한 마리가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 수양을 아들대신에 준비해주신 줄로 알고 그 수양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아브라함은 이 땅을 가리켜 '여호와이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보는데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희생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심을 보시고 싶은 것이고,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가를 보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희생물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도 인간의 희생만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제물로 드려질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셨습니다. 즉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의 경외심만을 보시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저는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요구하셨기 때문에 100세에 얻은 아들도 기꺼이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보시고 그의 아들 이삭을 돌려 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이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이레의 신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신다는 신비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인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바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 요구의 이면은 우리의 신앙을 보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들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고백하며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들은 머리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주십니다. 그리고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를 희생시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하나의 법칙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소유하려다가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잃어버리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기꺼이 바치기로 결심하고 잃기로 작정한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찾아주시고 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우리에게 새롭게 채색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참회의 기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저희의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부르셨고,
추하고 더러운 죄인인것을 아시면서도 오늘까지
참아주신 하나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주 앞에서 결단하고 세상에 나갔지만,
신앙을 배반하고 말씀을 거역하며,
죄짓는 자와 함께 싸우다가 흩어진 마음을 가지고
또 다시 주님앞에 나왔습니다.
주의 이름을 높이기로 결단 했지만
오히려 주를 욕되게 했으며,
주님의 사랑 가운데 살면서도 혼자 버려진 사람처럼
주님을 배반하며 살았습니다.
주님! 상처난 심령을 가지고 나온 저희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모든 죄악에서 저희를 건져 주시옵소서.
십자가의 보혈로 저희를 속량하시고 크신 능력으로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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