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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입은 자들의 명절(안식일) (요 0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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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지켜야 할 여러가지 절기와 규례들이들 여럿이 있 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일 주일에 한번씩 지키는 계명으로서 안식일 규례가 있 었습니다.

안식일 날 걸을 수 있는 거리는 제한되어 있었으며, 보통 날에 하던 일상적인 아 주 기본적인 일들도 안식일에 저촉된다고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안식일 규 례들은 아주 어렵고 까다로운 것이 많았습니다.

이 안식일 규례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정통 유대인들은 서로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 다.

 <본론>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터인데, 마 침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쳤다는 일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좋은 시비거리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중풍 환자는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 갔습니다.

그러자 안식일은 조금밖에 못 걷는 날인데 왜 자리를 들고 걸어가느냐고 야단들입 니다. 이에 병자가 말하기를 '나를 낫게 한 사람이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고 말했 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바대로 예수님께 싸움을 걸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게 찾아와 추궁합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이러한 일 을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현대의 병원도 안식일에는 문을 닫아야 된다 는 이야기와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본문 18절에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 으심이러라." 여기서 놀라운 한가지 사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대답이 점점 더 깊어지고 커지는 동시에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신 일을 지켜보고 있는 유대인 쪽에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과 유대인의 이해의 방향은 전혀 반대로 가고 있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와 생명과 영혼에 관한 문제로 38년된 병자 한사람을 일으키시고 이 사건에 대한 공격에 대해 대답하시고 설명할 때마다 문제는 자꾸만 커져만 갑니 다.

병자를 고치고 나서 대답하시기를 자신이 하나님 아들이요, 인간이 아닌 신이라 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유대인 쪽에서 볼 때에는 안식일 범한 것도 큰 일인데 '나 는 아버지와 하나라'는 말씀을 하셨으니 문제는 점점 더 크게만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서는 생명과 진리의 면에서 그 내용과 깊이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 고, 다른 한편인 유대인 편에서 보면 예수를 걸고 넘어질 구실이 점점 확실해지고 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은 이 속 에 가장 중요한 깊은 기초가 각각 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싸움의 결론부터 보자면 '유대인들은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 속에 자 리잡고 있는 중요한 기초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게 되는 직접 적인 동기는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라는 말이었지만 그 말씀을 선언하게 된 발단 은 38년된 병자를 고친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과 그 말씀이 결국은 그리스도가 죽게 되는 이유로 까지 발전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단순한 한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건을 보는 사람이 무었을 요구하고 계획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한 사건이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도 요한이 이와같은 사건의 흐름을 기록한 것은 깊은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게 해 주는 말씀이 5장 1절이 말씀입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이 말씀은 언 듯 보기에 4장이나 5장을 연결시켜 주는 말씀 같지도 않는 구절 같이 보입니다. 그 리고는 2절 이하여 38년된 병자를 고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1절 말씀 이 필요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값진 말씀이 됩니다.

 유대인의 명절에는 3대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과 오순절과 추수감사절입니다.

성경적 표현으로는 유월절을 무교절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에 종 되었을 때 10가지 재앙으로 애굽 왕을 굴복시키고 마지막으로 모든 장자들을 죽이는 재앙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낸 것을 기념하는 절기를 말합니다. 이때 어린양을 죽여 그 피로 문설주에 발라서 애굽의 장자들이 죽던 그 재앙의 날에 하 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낸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의 시기 는 이스라엘 달력으로 1월 14일입니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태양력으로는 3월 중순에서 4월 초까지가 이스라엘의 1월달 이니까 우리 달력으로는 3월 30일이나 4월 1일 쯤이 될 것입니다.

또한, 거기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오순절, 혹은 맥추절, 즉 맥을 추수하는 절기 로 칠칠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다음에는 수장절이 있는데 지금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풍 성하게 영건 곡식을 추수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세가지 절기를 지킬 때에는 성회로 모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성회로 모인다 함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스라엘 법규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같 은 규례가 적용됩니다. 즉 성회로 모이는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라는 단 서가 꼭 붙어 있습니다.

레위기 23-26장을 보면 이 세 절기는 계절별로 절기를 삼았을 뿐이지 이 절기를 지키는 근본원리는 안식일을 공통인수로 하여 절기화한 것입니다.

출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에서 안식일에 관한 설명을 보면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만드시고 제 이레 되는 날은 쉬셨기 때문에 너희도 쉬라고 하시며 그 계명 을 설정하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 당시의 안식일은 오늘날의 요일로 따지면 토 요일입니다.

'삼육 우유'를 아시는지요 안식교에서 나오는 제품입니다만 그 우유는 토요일에 는 배달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토요일을 안식일로서 고수하며 지키 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토요일에 일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유를 먹기 싫으 면 먹지 말라고 아주 자신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었이 그렇게 자신이 있게 만들 었을까요 율법을 지킨다는 자신과 제품이 우수하다는 자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안식일을 그렇게 지키도록 한 것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만들어 놓 고서 그 다음부터는 아무 일도 안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 음 본문 17절에서는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비를 내리시고 바람을 불게 하시고, 지금도 한 생명을 태어 나게 하시며 한 죽은 심령을 중생시키고 계십니다. 그가 만드신 모든 것을 섭리하 시고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출 20장에서 설명한 것 같이 엿새 동안에 내가 일하고 서 이레 되는 날은 내가 쉬었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어떤 법칙을 만드시는 일을 끝냈다는 말씀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간섭하고 보조 하고 마무리지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안식일을 처음 선포하실 때의 가장 중요한 멧세지는, 창조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으며 그의 창조는 완벽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멧세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안식일에는 노동을 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을 근거로 하여 유월절, 오순절, 추수감사절을 크게 절기화시킨 것은 사람이란 기쁨과 규칙을 얽어서 규례화해 놓지 않으면 걷 잊어버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8월 15일을 국경일로 정해 놓지 않으면 우리는 해방의 기쁨을 반추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생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일을 지키지 않으면 부모의 은혜를 생각 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경축일이나 추모일들을 기념하는 날로서 정하여 지 키는 것은 잊어버리기 쉬운 우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게 함으로써 그때마다 이런 것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종되었던 애굽에서 구했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먹을것 입을 것을 주고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는 이 이니라" 이것이 바로 안식일이나 구약에 허락되었던 모든 절기와 명절들이 가지는 중요한 멧세지입니다.

그날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자상하시며, 어떻게 우리를 충족시키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신가 하는 사실들을 확인하며 기뻐하는 날인 것 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은혜로 받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은혜로 받았으며, 그의 생 애를 은혜로 받았으며, 구원을 은혜로 받았으며, 천국을 은혜로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받은 것들을 마치 자기 실력으로 얻은 것인양 하나님의 은혜 를 외면하고 오히려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죽이려 든다고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 입니다.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사용될 양을 드리는 양문 곁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 를 고쳐낸 사건을 가지고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결론지어 내려가는 이 날카로운 대조를 지적하고 있으신 이유가 무었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이란 본 성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충족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시요, 우리를 선한 곳으로 인도 하시는 분이시요, 우리보다 우리의 제질을 더 잘 아시는 분이시요, 내게 유익한 것 을 위하여 항상 인도하시는 창조주 되십니다. 이와같은 은혜에 대하여 기뻐하기 위 하여 모인 축제의 자리에서 인간은 오히려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죽이려 모의한 다고 오늘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그 때 베데스다 사건에서만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기록은 모름지기 오는 모든 세대에 걸쳐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또한, 하나님을 믿는 하나 님의 백성들까지 그렇게 행하고 있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같은 엄 청난 실수를 왜 후 세대에서도 반복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이란 같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그전의 역사적 경험들이 후세대에게 이익으로 심기워진 적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훈련소와 같습니다.

훈련소에서 조교로 오래 지낸 사람들을 만나보면 보통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 다. 하나는 가르치는데 점점 익숙해지는 조교와 또 하나는 가르치는데 점점점 신경 질을 내는 조교로 나뉘어 집니다. 익숙해지는 조교에 대해서는 우리가 금방 납득이 갑니다.

그러나 신경질을 내는 사람은 왜 그렇게 되는지 좀 의아 스러워집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훈련소에서 훈련병들이 처음 에는 좀 엉성 합니다. 그러나 두 달쯤 가르쳐 놓으면 눈치와 한 동작만으로도 척척 잘 해냅니다. 동작 하나 하나를 조그만 구령을 듣고 입 모양만 보고도 잘 해 냅니 다.

이렇게 잘 훈련된 병사들이 퇴소를 하면 또 다른 훈련병들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조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므로 목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데 처음부터 힘 을 주다가 결국은 신경질이 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맡은 일이 무었인 가 제대로 인식되어 있지 않으면 점점 신경질을 내다가 말로 해야 될 것도 완력으 로 시작해서 완력으로 끝을 맺게됩니다.

교회가 무었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교회는 항상 똑같이 엉성하게 찾아오 는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곳입니다. 처음부터 사도바울이 나타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엉성한 훈련생이 숙달된 군인이 되듯이 변화가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요, 율법이 무었인지를 아는 자들로 모였음에도 불 구하고 우린 이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나 기적이나 생명의 기쁨에 대하여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습관화 되고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간에 무었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때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며 나에게 힘을 주시는 것을 감격으로 받아보신 적이 몇 번이나 있었으며, 그것이 가장 가깝게 기억된 시기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십 니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다 이상 교회에서 적극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최소한 이 실수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것만을 요구히고 있을 뿐입니다. 그 래서 최소한의 신자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 주일 낮 예배만큼은 지키 는 신자, 최소한 십일조는 내는 신자, 최소한 서로에 대해서 지나치게 간섭은 하지 않는 신자, 최소한 교패만큼은 떼어내지 않는 신자로 전락해 가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조간 신문에 비 기독교인이 보는 기독교인에 대한 여론 조사가 실 렸었습니다. 그 기사 중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있었는데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는 질문에 그 대답이 대부분 '자기 중심적이다'로 나왔습 니다.

기독교인의 기쁨은 주는 기쁨이지 뺏는 기쁨이 아닙니다. 뺏는 기쁨은 사라센 문 명이라고들 합니다. 우리가 언제 칼을 들고 남의 식량을 뺏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 는 거저 주어서 항복시켰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쁨은 더 한층 컸었습니 다.

스데반의 죽음에서 우리에게 본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죽음에 임할 때 자기를 욕하고 죽이는 자들을 향하여 기꺼이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실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언제나 기쁜 이유인 것입니다. 손에 잡아서가 아니요, 남보다 많아서가 아닙니다. 또한 남 보다 유명해져서도 아니며 실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의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도대체 왜 살며, 왜 믿고 있 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원래의 명절은 어디로 갔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하 나님 되심을 중단하신 적이 한버도 없다고 선언하시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교회 안에 감사의 조건이 없는 것입니까 우리의 찬송이 왜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서로 모여서 서로를 쳐다보는 것조차 달가와 하지 않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죽이려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오늘 하나의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하나 실천하게 되었다고 해서 남을 향하여 눈을 치켜뜨고 쳐다보지 말셔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뺏는 것이 아니며, 잘난 것이 아닙니다. 남보다 뛰어난 실력과 재 능과 기술을 보이는 것에 우리의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여 자존심 은 채울 수 있을지 모르나 기쁨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자는 주는 자입니다. 지는 자입니다. 상대방이 그것을 인하여 만족하 고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는 죽기까지 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 이 아닙니까 주일 아침에 교회에 모일 때마다, 여러분의 구역에서 모일 때마다 제발 그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이같은 마음을 품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모임은 하 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생애를 주장하시고 풍족케 하십니다. 우리는 모자라는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적인 것이기 이잔에 영적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줄것 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만이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소개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사 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잘난 척해서도 아니요, 실력으로 입증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대가를 받고 파는 행위도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들고 있고 진리를 들고 있기 때 문에 늘 당하고 망할 것입니다. 어쩌면 고통과 원치 않는 길을 걸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길을 기쁨으로 갈 것만은 사실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기쁨과 평안을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절을 명절답게 모여야 합니다. 우리의 명절인 주일의 모임을 기쁨으로 모이게 하십시다. 세상이 나를 할퀴고 나를 막으며 나를 누를 지라도 찬 송합시다. 밟히면 밟힌 채로 찬송하십시다. 누가 '하자'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저절로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도 외인이 없으며 은 혜받지 못한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능히 그렇게 기뻐하고 명절답 게 모일 수 있으신 분들인 것입니다.

 <결론>

세상의 아픔과 세상의 어려움이 오왜 교회 안에까지 침투하여 신자들을 침울하게 만듭니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자랑하려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잘 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오늘 하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일은 없 었는 지를 돌이켜 보십시다. 은혜를 입은 자들의 명절, 곧 우리의 모임 가운데서 그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고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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