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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증거 (요 05: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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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대개 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사건이 나오고 그 사건 으로 말미암아 그 시대의 종교계 지도자들과 또는 일반인들과의 논쟁이 따라 나옵 니다. 논쟁을 통해서 상대방을 납작아게 해 좋은 다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독백을 하시는 순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이 하나같이 충격적이라는 것입니다. 사건 자체도 충격적이고, 논쟁 자체도 충격적이나, 그에 따르는 서술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사건 자체도 이 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 다음의 논쟁은 더욱 어렵고, 그 다음에 따르는 이야기는 상당히 뚜꺼운 구름층을 벗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만 해도 읽을 때 즉시 그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나지는 않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 앞에서 했던 싸움은 이것이었습니다. 주께서 하신 일은 아버지께서 보 내시며 명하셨기에 하신 일이라는 논쟁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는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어 찌하여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시비를 겁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시므로 그 일이 아버지가원하시는 일이라는 말씀 으로 매듭을 짓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분이 그 날에 일을 하라고 하셨는 데 너희가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논쟁의 불씨가 어디로 퍼 지느냐 하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즉, 아버지와 나와 하나라 하는 얘기에서 이제는 신성모독죄로 비약됩니다.

그렇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으로 주제를 바꾸어 버리 십니다. 나는 어떤 것이라도 나 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셨고 시 키는 일을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0절에 이르러서는 그 이야 기가 '증거'라는 것으로 조금 더 진전됩니다. 본문 30-3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 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 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결국 그 논쟁은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신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 하는 싸움으로 이제 비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논쟁으로 인하여 결국은 나중 에 예수께서 신성 모독죄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참람죄, 즉 인간으로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여겼다는 죄를 범한 것으로 돌 려 사형을 받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싸움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냐 아 니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으로 말씀 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뒤에 가서 보면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이야기를, 나는 가짜가 아니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이야기를 진전시키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서 오늘 본문을 보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5:30-32절까지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느낌이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다'라는 느낌이 강합니까 아니면 '나는 더 많이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자제하고 있다'하는 편이 더 강합니까 오늘 본문의 원래의 촛점은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고, 하나님의 일 을 하고 있는 자이냐 하는 것입니다.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것 때문에 '네가 정 말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라면 감히 어떻게 안식일을 범할 수 있 느냐'고 힐문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느닷없이 이런 대답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그 당시는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고유 성함이 여호와라고 밝혀진 것은 요즈음에 와서입 니다. 사실은 여호와라는 이름도 정확한지는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성경에 하나님이란 단어를 기록할 때마다 모음만 쓰고 자음은 쓰지 않 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뜻은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경을 기록하다가 하 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말씀을 쓰던 서기관들이 쓰던 붓을 물에 빨아서 다시 썼습니 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기만 하면 꼭 그렇게 해야만 했고 성경을 읽다가도 여 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여호와라고 읽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아도나이 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 또는 '나의 주'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웃어른들의 성함이나 부모님의 성함을 남에게 대야 하거나 불러야 할 때는 '0자 0자 0자'라고 쓰고 부릅니다. 만일 누굽니다라고 가볍게 함자를 댓다가는 예 의가 없는 자라고 멸시를 당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별짓는 이스라엘의 관습 아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도나이' 로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불렀으니 유대인들의 충격은 이만 저만 큰게 아니었 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 말을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하라 명하신 것만을 한다' 이것은 그가 나를 보내신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대 답을 하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러한 대답 정도로 만족하시지 않고 '내가 더 할수 도 있지만 참고 있는 것이다.'하는 뜻으로 한층 더 비약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질문이 들어오면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위의 것으로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물으면 또 그보다 더 위의 것을 답을 하셔서 질문 공세자들이 한없이 좇아가다가 지칩니다. 자신들의 질문보다는 대답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우리에게 대단히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제일 시비를 많이 거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성경은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과학적으로 안 맞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과학적인 질문 자체가 우스운 것입니다.

수학적인 계산과 분석적인 차원에서 성경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입니다.

신령한 차원의 세계를 육신적 차원으로 낮추어 이해하겠다는 시도 자체 부터가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한 걸음씩, 한 걸 음씩 발 앞에 빛을 비추신다는 느낌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 빛은 우리가 디디고 있 는 발 밑을 비추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면 또 다음 앞 걸음, 그 앞 을, 이렇게 비춰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인 요 5:33-36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가 요한에게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이 본문의 목적이 무었이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가장 큰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었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지금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에 대하여 나는 대답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결론은 '내가 하나님이 보 낸 자라는 증거는 그가 나를 보내신 일을 하는 것이며, 그밖에는 증거해서 안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공격을 받고 계십니다. 무슨 공격입니까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보내신 자입니까'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나는 지금 그런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위하 여 여기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이 시킨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일 뿐 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의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 께서 공생애를 시작히시기 전에 사탄에게 세가지 시험을 받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40일 동안 금식하셔서 주리신 예수님께 사탄이 나타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이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 씀으로 사느니라"고 하시면서 물리치십니다. 이것은 중요한 시험거리입니다.

그런데 간혹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이 와서 돌을 명하여 똑이 되게 해보라고 할 때에 따끈따끈한 떡을 만들었으 면 사탄이 그 자리에서 항복을 할텐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라 천사들이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 라 했을 때 예수님께서 뛰어 내리셔서 사탄 머리에 앉아서 사탄을 납작하게 해놓았 으면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의아해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세번째 시험인 '내게 절하면 이 세상을 주겠다'고 했을 때 그 즉시 사탄을 혼내 주었더라면 지금까지 우리도 이 고생을할 필요가 없이 벌써 천국에 가 있었을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들이 분명히 일 리가 있는 것 같지만 아주 잘 몰라서 하는 질문입니다.

이 세가지 시험이 각각 그 형태는 다르지만 단 하나의 시험이었습니다. 무슨 시험 이냐 하면 예수님의 사명을 망각케 만드는시험이었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일을 하셔야 할 분이 하나님과 독립된 자신을 증명하는 일을 하게 함으로서 자신의 사명에서 이탈시키려 하였던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일이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다치지 않는 등의 일로 인해 서 예수님의 신성은 증명할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 중에 예수님이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들을 모두 구원해 내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돌로 떡을 만들어 내는 일 같은 것이 그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 '오히려 그렇게 능력을 나타내 보여 주시는 편이 우리를 항복시켜 믿게 하는데 더 쉬운 방법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앞의 질문 보다는 조금 차원이 높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신 기적은 그러한 것 말고도 많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도 있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도 있고, 소경 을 눈뜨게 한 일도 있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이 세가지 시 험에서만은 기적을 베푸시지 않은 이유가 무었이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척 척 기적을 행하시는 편이 훨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사실을 증명하고 사 람들을 항복시키는데 용이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요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설득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감언이설로 자신을 증명하 거나, 우리를 감동시키거나, 우리를 놀라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못 알아 먹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최후의 방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최후의 방법이 바로 나의 죄 값을 위하여 대신 죽으시는 것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 신 이유입니다.

본문 36절을 다시 보십시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 는 역사...." 여기서 역사란 무었을 이루는 역사인지 아십니까 바로 십자가의 죽 음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증명하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증명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증 거하시거나 과시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기적을 일으켰냐고 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죽으심으로 인해 중생하게 된 자들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나중에 가서 이해하고 알아보게 하려고 미리 해 놓으신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모든 일은 제자들에게까지도 이해가 다 되지 않았었습니다. 무었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잡혀가시자 도망간 것으로 증명됩니다.

주님이 돌아가시고 장사지낸 바 되자 제자들은 모두 고기 잡으러 가버렸습니다.

무었 때문에 제자들이 다시 돌아 왔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 때문입니다.

부활하셔서 열 두 제자들 앞에 차례로 나타나십니다. 그들은 옛날 것이 생각나서 돌아 온 것이 아니라 돌아온 시점에서 꺼꾸로 풀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 그때 그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구나!'이렇게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말 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자신을 증명하라는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내가 누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제한 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무었이든지 할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을 포기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공격하는 자들을 무색하게 만들거나, 심판하거나, '그래, 그것 봐라!'하는 식의 싸움을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고치는 일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됨과 신자의 신자됨의 표지가 무었이 냐 하면 곧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한을 품고 죽은 자는 아닙니다. 그렇게 죽는 것이 우리의 일이기 때문입니 다.

그러기에 우리 신자들의 이와같은 이 세상을 사는 목적과 원리를 아는 세상 사람 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원리 를 아는 세상 사람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게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가면서 기도하는 순간에도 제자들은 졸 며 자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일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동참합니 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로 그것을 위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눈이 뜨여졌고 우리의 눈도 뜨여진 것입니다. 다시말해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 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 지를 압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실 때에 그가 가진 권위, 권세, 그리고 이루어야 할 일 중에서 그는 권세와 권위를 묻어 놓고 오신 분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비우시고 종 의 형체로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그 일을 이루러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일을 이루는 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요, 목표요, 능력이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4:13절에서는 이것을 능력으로 환원해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이 글은 사 도 바울이 옥중에서 쓴 편지의 내용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갖다 주는 위문품을 받으면서 그 글을 쓴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그 상황을 알면 말이 안 맞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그 위문품을 받는 사람이 "내게 능력 주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 니라"고 하였으니 그러면 주는 사람이 뭐가 됩니까 어쨌든 필요하니까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 말씀의 앞 뒤를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게 갖다 주는 것 때문에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 일 에 동참하는 것 때문에 내가 기뻐하는 것이다. 나는 궁핍하거나 부한 것에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이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즉 내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 는 능력을 얘기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일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무슨 일을 당해도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후 11장을 보면 거기에는 사도 바울의 생애가 나옵니다.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 였습니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돌로 맞고, 파 선하고...이것은 계속적으로 이러난 일이 아니라 한 번 곤욕을 치루고 다 나을 만 하면 또 곤욕을 당하고 그랬다는 말입니다.

거의 매일 반복되는 고통이었다면 일 주일 정도 밖에는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생애 동안에 잊을 만하면 또 한번 곤욕을 치르는 속에서 고생하며 거기 감옥 에 까지 왔는데도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나오는 곳마다 '기뻐하라! 내게 능력 주시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세상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드디어 돌았구나!'로 밖에 더 할 말이 없 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항복하 고 만족할 따름이었습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능력이란 필요한 것을 이루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심령을 세우는 부탁을 하나님께로 부터 받았고 그것이 그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반드시 돈이 동원되어야 한다거나, 다른 권세가 동 원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통과 곤욕을 당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방해를 받거나 매 여 본 적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매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인 적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감옥에 갇히면 갇 힌 대로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중 죄인으로서 양 손발을 묶은 채 양 쪽에서 그를 지키는 군사들이 곁에 있었습니다. 싫으나 좋으 나 그의 곁에는 하루에 3교대로 여섯명의 군사가 왔다 갔습니다. 바울의 입은 묶이 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번갈아 가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는 바울이 시위대의 호송을 받습니다. 그러니 복음이 시위대로 들어갔으며 그 바람에 복음이 왕족에게 전파되고 그래서 콘스탄틴 대제에게 까지 복음이 들어 갔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것이 능력입니다. 그것이 존재 이유여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이유 때문에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잘 참다가도 '나를 긁는 것이라면 내가 참겠는데 예수님을 욕되게 하니 정말 참지 못하겠습니다!'하는 사람들도 있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만한 일로 끄떡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증명하시 는데 어떻게 증거하시는가 하면 자신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고쳐 내심으로써 증거하 십니다. 이것은 우리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멧세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것으로도 자신을 증명하시지 않습니다. 결국, 오늘 이사건은 증 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십자가 위에 달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증 명되는 것입니다. '과연, 이 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였구나! 그 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구나!'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 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무었으로 증명하였으면 좋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요17장에 이에 대한 놀라운 해답이 있습니다. 요17:18-21절을 보시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로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하려 함이니 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을 믿게 하옵 소서" 여기에서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는 방법으로 저들을 구원하시고 저들을 통하 여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하사 생명을 얻음으로써 증명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는 방법이 아닌 것으로 주를 증거하고 자신을 증거하는 자에게 는 최후의 심판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나를 통하여 어떤 한 심령이 거듭나는 것으로 밖에는 증거되어서는 안됩니 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는 우리는 어떠한 일이라도 감수해야 됩니다.

우리가 제일 많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었입니까 그것은 '아니 뭐 예수 믿는 사람은 감정도 없는 줄 아나 보저 보자 하니까 정말...' 이런 종류가 우리 마음 속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 큰 유혹거리입니까 요즈음은 모든 축복이 잘되는 것에 기준을 두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 고 축복을 얻는 자는 병도 안 걸리고, 직장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어떤 낭패도 당 하지 않고, 아이들은 공부를 그리 많이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일등을 하고, 대학도 척척 붙고,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돈 쓸 일이 걱정될 정도고....

그러나, 아닙니다!! 이것이 꼭 축복이거나 참 신자의 표지도 아닙니다. 신자의 신 자된 증거는 그 사람을 보면 저 깊은 곳에 어떤 것이 뜨끔거려야 합니다.

'저 사람은 아무래도 세상 사람과는 달라, 자존심이 없고, 욕심이 없으며, 무슨 낙으로 사는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는 모양이다' 이런 느낌 이 와야 합니다.

성경은 얼마나 우리에게 이 부분을 요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네 오른 빰을 때리거든 왼편을 돌려 대라!'가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네 원수 가 주리거든 먹이라!' 이렇게 우리는 달라야 할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아버지 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내가 저들을 보내노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웃집의 운명이 우리 손에 있는 것입니다.

 <결론>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칼을 뽑고 있습니까 내가 무시당하고 멸시 당할까 할까봐 시퍼런 칼을 갈고 준비하는데 온 정력과 신경을 솟아 붓는 것입니다. 한번 뽑아 빼어 들었다하면 주위의 사람들이 우와! 하고 감탄하게 만들겠다고 벼르고 있 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번 뽑아들겠다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야만 나의 자존심이 보상을 받을 줄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시 당하고 멸시 당하면 참지 를 못합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믿음도 신앙도 힘이 있고 능력있는 시퍼런 칼을 쥐었을 때 이야기지 무능라고 약해 보이면 다 소용 없더라고 나자빠 지는 것 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얼마나 살아 있는 지 모릅니다. 이 알량한 자존심의 싸움에 목을 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모든 자존심을 다 천국에 두시고 미천하 고 약하고 멸시받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당신을 멸시하고 무시하고 조롱하여 십 자기 위에 매달기 까지 끝없이 참고 용서하셨습니다. 주님은 당하시기만 하시고, 지시기만 하셨고, 썩는 밀알이 되셧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주님의 이같은 모습을 닮아가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와같은 자신을 증명하는 칼은 이제 주님 앞에서 다시 거둬야 할 때입니다.

이제 그 칼을 뺄 수 없도록 강력 접착제로 붙여 놓으시고 여러분의 평생에 당하시 고 지시고 썩는 밀알이 되기를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추수할 것이 있는 사람 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이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굵은 목표요 원리입니다.

그렇게 사는 자만이 주님이 누리셨던 기쁨과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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