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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첫번째 변론 (욥 0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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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고난의 상관관계를 피력함으로써 고난 중에 있는 욥의 죄악을 주장하는 데 주력했었던(4장) 엘리바스는 본문에서도 계속 욥의 성급함을 책망하며 고난의 원인을 추궁하고(1-7절), 하나님을 의지할 깃을 권한뒤(8-16절), 참회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을 것을 충고한다(17-27절). 실로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그 고통을 나누기 보다 편견에 찬 자신의 신앙관으로 형제를 정죄하고 몰아세우는 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자신도 역시도 하나님 앞에서 한낱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때 겸손히 형제의 아픈 부위를 어루만져 줄 수 있을 것이다.

1. 무조건 형제를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엘리바스는 인과응보적인 논리로서 욥의 죄악을 지적했으나 욥이 여전히 침묵하자(4장) 침묵하는 욥이 자신의 충고를 결코 듣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는 좀더 격앙 한 어조로 욥의 죄악을 공박하게 된다. 엘리바스는 욥이 비록 하나님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는 여전히 타락하고 범죄하여 죽을 운명에 처한 존재라고 강조한다. 즉 그는 욥의 고난이 아무런 이유 없는 그저 신비한 깃이 아니라 분명 욥의 죄악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라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나 하늘의 천사 조차도(1절) 욥의 비탄어린 울부짖음에 동정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다고 단언하였다.
실로 엘리바스는 도움과 위로와 소망이 필요한 욥에게 막상 필요한 것은 제공치 않고 오히려 욥을 더 짙은 절망감과 더 심각한 소외감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이처럼 형제의 아픈 현실을 돌아보지 않고 다만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놓고 그 형제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정녕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 멸망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이시다. 더욱이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 속심령을 살피시는 분이다(삼상 16:7).
그런데도 감히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그 형졔의 겉모습만 보고 무조건 판단하고 정죄하는 깃은 형제에 대한 참사랑의 결여에서 비롯된 깃으로 크나큰 허물이 아닐 수 없다.

2. 참회는 자신의 죄악을 구체적으로 깨닫고 해야 한다.

엘리바스는 고난에 처한 욥으로 하여금 고난 그 자체가 인간의 범죄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고난당하고 있는 욥은 당연히 특정한 범죄를 저질렀음이 분명하다고 지적하였었다. 그리고 이제 엘리바스는 욥으로 하여금 그같은 범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라고 권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욥이 과연 어떤 범죄를 자행했는지 그리고 그가 과연 지금과 같이 고난받을 만한 특별한 큰 범죄를 자행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다만 고난받으니 범죄핟 것이고, 그러므로 참회해야 한다는 단순 논리로 욥을 몰아 세웠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죄를 참회하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 자기 퍼에 대산 분명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눅 15:18-21). 이러한 구체적이고 분명핟 자가이 없이 막연히 참회하는 것은 어쩌면 모든 죄를 다스리며 심판하시고 계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악한 행위라 하겠다.

<결론>

성도는 죄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도 잇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먼저 이 죄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권고했듯이, 성도가 만일 그 지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고난을 받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벧전 4:15).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시간 엘리바스의 말을 한번 자신에게 면밀히 비춰보고, 만약 자신에게 어떤 죄악(근원적인 원죄가 아니라, 구체적인 어떤 죄악)이 발견된다면, 즉시로 하나님께 구하고 의탁함으로써, 회복과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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