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잃은 양 (마 18:12-14, 눅 15:3-7)

첨부 1


성서 저자들은 그들의 자료들을 어떤 주제들, 생각들, 그리고 신학적 실 재들에 집중시키려고 구상했다. 편집비평은 그 저자의 특별한 강조를 관심 하면서 성서적 문서를 전체로서 추구한다. 편집비평의 공헌은 각개의 본문 들의 의미를 전체 작품을 향한 의미의 빛 안에서 보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질문해야 할 것은 무슨 목적으로 저자는 이러한 pericope를 사용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설교에서는 편집자로서의 마태와 누가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즉, 마태와 누가의 편집 의도를 구 분해 주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물론 이 둘 중에 한 사람의 편집자만 선 택해서 그의 관점으로 설교할 수도 있으나 이 글에서는 편집비평의 시각을 더욱 철저히 확인하기 위해서 두 본문을 비교하는 형식을 갖기로 했다.

 오늘 저희들이 대하는 두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잃은 양의 비유 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특별한 의식 없이 쉽게 대하곤 했습 니다. 그러나 이 두 본문이 대체로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지만 실재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차이점들은 잃 은 양 비유를 소개하는 마태와 누가 두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와 상황이 다 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본문의 차이점을 찾아 보면서 이 비유가 뜻하는 보다 심오한 의미를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서의 저자는 각자 자신이 처해 있는 교회의 상황 속에서 독특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우 리들이 처해있는 각자의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의 신앙체험과 신앙고백을 형 성해 왔던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러 면 마태는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마가나 누가 요한은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물을 수 있 게 됩니다. 이제 이 문제를 좀더 좁혀서 오늘의 본문을 대해 봅시다. 마 태는 예수의 이 비유를 접했을 때 어떠한 이해를 갖았는가 또한 누가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그들은 그 비유를 그들의 상황 속에서 어떠 한 표현을 가지고 전달했는가

이렇게 질문해 보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첫번재 문제는, 이 비유를 말씀하는 청중, 즉 대상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이 비유를 설명하려는 동기와도 연관됩니다. 우리가 같은 말을 하더 라도 그것을 누구에게 하는냐에 따라서 그 뜻이 변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고 있는 말입니 다.

 그들이 "어찌하여 이 사람이 죄인들을 환영하고 같이 식사하는가 "라고 의문을 제기했을 때, 예수께서 그 대답 대신으로 이 이야기를 한 것입니 다. 이 이야기는 '잃은 은전 비유'(15:8-10)와 '잃은 아들의 비유' (15:11-32)와 연결시켜서 전하고 있습니다. 세 비유가 모두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을 말하고 있으며, 찾았을 때의 큰 기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세 비유의 결론 구절에서 분명히 드로나고 있는데 마치 후렴처럼 거의 같은 문구와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잃은 양(15:7):"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홈을 인하여 기뼈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잃은 은전(15:10):"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 에서 기쁨이 되느니라." 잃은 아들(15:32):"이 네 동생은 족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 었기로 우리가 즐거워 하고 기뻐한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니라."

이 세 비유의 결론 구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잃었다가 다시 찾 았을 때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서 마태복음의 문맥은 아주 다릅니다. 여기서는 제자들 이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크냐 "고 물었을 때에(18:1) 그들에 대한 대답으로 주는 일련의 교훈 가운데서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인접에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18:6)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18:10)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 라 "(18:14) 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문맥에 비추어 볼 때에 잃은 양 비 유의 강조점은 양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잃은 양이 있을 경우에는 꼭 찾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두 본문 가운데는 중요한 어휘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길 을 잃다"는 동사의 차이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희랍어로 "플라나오"란 동 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죄를 짓다"라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 다. 이는 교회생활을 하다가 세상으로 떨어져 나간 사람을 뜻합니다. 그 렇게 때문에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즉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배 교자들(=잃은 양)을 목자의 성실성을 가지고 대할 것을 호소하는 말씀이 됩 니다.

 그런데 누가에서는 희랍어로 "아포룸미", 즉 "상실되다, 잃다"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세리와 죄인 과 같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이유 는, 마치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목자의 기쁨이 크듯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 면 하늘에서의 기쁨이 크기 때문에 예수는 죄인 곧 잃은 양을 찾기 위해, 그리고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해 그들과 어울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19:10)는 메시지가 잃은 양의 비유의 강조점이기도 합니다.

 이 둘의 차이는 결론 부분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눅15:7, 마18:14, 결국 누가가 소개하는 잃은 양 비유의 메시지는 "잃었다가 찾으면, 죄인이 회개하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는 것이고, 마태의 메 시지는 "하나라도 잃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 잃은 양이 있다면 끝까 지 찾으라"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차이가 생겼을까요 학자들은 말하기를 잃은 양 비유 는 본래 죄인을 찾아 구원하는 예수의 활동에 대한 자기 변호였는데 누가의 삶의 자리에서는 이방인에게 주는 복음선포의 의미에서 좁더 예수의 의도에 가깝게 비유를 소개하고 있고 마태는 그것을 교회 상황에 적용하여, 제자들 에게 주는 목회적 모델을 제시하는 비유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두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미 양들을 맡고 있는 교회의 직분 맡은 사람들에게는 그 양들을 잃어버리 지 않고 잘 양육하라는 말씀으로, 또한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가는 우리 들의 선교의 사명을 일깨워주는 말씀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