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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대교회의 전도 (행 0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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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프렌시스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오늘은 마을로 내려가자!”
“무엇하시게요, 선생님” “전도를 해야지!” “예, 그럼 가요” 선생님과 제자들은 거리에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시장통으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프렌시스 선생님과 제자들을 보고 손을 모으며 가볍게 인사하였습니다. 시장통 사람들은 프렌시스 선생님과 제자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프렌시스 선생님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거리를 돌아 그냥 산으로 올라왔습니다. 제자들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왜 전도하러 가자고 하시더니 거리에 내려가 한마디의 전도도 하지 않고 그냥 오십니까” 그때 프렌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이미 전도를 하였단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면서 프렌시스에게 되물었습니다. “언제 전도를 하였단 말입니까 우리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는 걸요!” “그래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았지!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보았고 우리가 예수 믿는 수도원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단다.” “그야 그렇지요. 우리가 수도원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랫마을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단다. 그러니 우리는 전도를 한 것이다. 말로써 아니라 행동으로 말이야. 만일 우리가 지나다닌 것으로 전도가 안되었다면 아무리 말을 많이 하였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 아니겠니” 이 말에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복음의 통로가 된다는 말이지 우리 자신이 복음으로 다가간다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이유가 전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한국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무시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를 쓰는 나라는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극동 방송국에서는 수시로 복음을 전파를 통하여 전하고 있으며 개 교회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늘도 분주히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나라가 전해지는 복음만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감동적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는데 우리는 전도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복음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통로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도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상식적인 삶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그 복음에 걸맞는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결코 그 어느누구도 복음을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초대교회의 부흥을 살펴 봄으로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스스로를 힘썼다(행2:42)
본문은 이렇게 초대교회의 전도의 시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결코 초대교회의 부흥은 무조건적으로 밖으로 나가 예수를 전하는 언어적 행위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성령이 역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일에 우선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앞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르치는 말씀을 자신의 삶속에 적용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간에 진정한 사랑과 화목을 나누기 위한 자기 훈련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라고 성경은 초대교회의 부흥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이 훈련되지 않은 복음의 전도는 잘못된 결과를 경험하게 한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결코 부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훈련이라는 점에 있어서 완벽한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는다면 또한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 자신의 변화가 상대에게 경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자신들의 새로운 삶을 스스로 훈련시켰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함께 살아가는 삶(행2:43-46)
이렇게 스스로를 훈련시킨 초대교인들은 이제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익숙하기 시작합니다. 44절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훈련받은 초대교인들에게 나타난 변화는 이렇게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적인 자유함이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상대적인 빈곤은 있었습니다. 더 있는자가 있었으며 더 부족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능력의 차이로 인한 것일 수도 있으며 부모들의 유산의 차이로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 상대적인 경제적인 어려움이 신앙안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물질의 용도를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물질의 나눔이 정도적으로 똑같은 분배라는 원칙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필요라는 구체적인 용도를 위해 나눔의 원리가 적용되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원리를 오늘날 교회에서 찾아 본다면 그것은 헌금생활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헌금은 필요에 따라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결코 초대교인들은 자신들이 헌신하는 물질에 대해 인색한 마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헌신으로 누군가가 필요를 채운다는 사실에 기쁨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을 보면 초대교회의 두 번째 변화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함께 있는 생활이 강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간은 모두에게 소중하며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상식적일 것입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생활이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경제 활동도 해야 했으며 스스로의 취미 생활도 했을 것입니다. 또 때로는 이해관계를 위해 사교적인 인간관계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변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함께 있기를 힘썼다고 말합니다. 함께 있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힘써야 할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가 함께 있기 위해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는 사실을 힘썼다는 말을 통하여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말해 복음은 다른 어느것보다 사람을 중요시 여겼다는데 우리는 그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서로를 가장 소중한 가치있는 대상으로 섬겼습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생활들이 초대교회에서는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초대교회의 변화는 모임의 내용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구체적으로 나누었습니다. 함께 헌신하여 음식을 나누었으며 서로의 마음을 진실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생활을 지키기 위해 환경과 어떠한 유혹이나 고난과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의 생활의 특징을 “힘썼다”는 말로 대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를 보면 초대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어떤 헌신이나 열심히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결과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3. 구원이 시작되었다(행2:47)
본문은 이러한 초대교회의 변화에 대해 어떠한 주변의 반응이 있었는가를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의 변화된 사람에 대해 주변의 사람들은 놀라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자신들의 생활에 헐떡이며 불평과 불만으로 생활하는 우리들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초대교회를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강력하게 도전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흥분되었습니다. 그들의 변화는 단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다는데 있다는 사실을 모두다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전 까지만해도 자신들과 똑같은 생각과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즐겨하던 개인적인 취미와 쾌락을, 그리고 분노와 불평과 생활에 찌들었던 표정들이 기쁨과 가치와 헌신과 사랑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놀라움에 이제 우리의 주님이 간섭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다시말해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입니다. 전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가 아름다운 통로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성경지식을 가지고 달변으로 복음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결코 그들은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복음을 갖지 않은 자들이 변화를 가질 수 있습니까
복음을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행복함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함을 보았을 때 누가 그 복음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모임과 헌신에 기쁨을 보이지 못하고 모임에 부담과 헌신에 고민을 하는 사람을 통해서 과연 복음을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믿고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이며 의무라는데 저는 동의합니다.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데 저는 강력하게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가진자는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복음의 능력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복음의 능력을 생활속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로인해 우리는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편견과 세상의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씀앞에 다시한번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변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자신의 변화는 허용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변해야 할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데 우리의 신앙의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3-4) 우리가 진정으로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먼저 우리 자신의 변화를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통로이지 결코 우리가 복음의 주체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가 우리가 원하는 교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자녀의 뜻이 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할 수 있도록 순종하는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전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주님이 하셨습니다. 우리도 초대교회의 신앙의 누림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열망하는 전도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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