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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손한자의 열매 (마 0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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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는 이따금 상대방을 평가할 때,“그 사람은 참 교만하다”든지 혹은 “그 사람은 참 겸손하다”라고 말한다.

2.겸손하다는 말은 자신을 낮춘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리고 사람들은 교만한자 보다는 겸손한 사람을 더 원한다.

3.겸손한 사람은 남에게 양보할줄 안다.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양보하는 일이 없다.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줄 알지만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다.

4.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겸손해야 한다.예수님 역시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셨던 분이시다.그가 얼마나 겸손했었는지를 살펴보자.

I.하나님은 겸손한자와 함께 하신다(13-15).
A.예수께서 요한을 찾아가셨다.

1.요한을 찾아가신 이유는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였다.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인간에게 도움을 요청해야할 만큼 아쉬움을 느끼는 분이 아니다.

2.예수님이 요한의 도움을 필요로했던 것은 “세례”였다.본래 세례라는 것이 무엇인가죄인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다.물속에 들어가 죄지은 자신의 옛사람이 죽고 다시금 새사람으로 살아난 것을 상징하는 의식이다.

3.우리가 잘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마찬가지로 세례도 필요치 않으신 분이시다.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요한의 도움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4.요한역시 자신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줄수 없음을 잘알고 있었다.그리고 자신의 하는 일이 바로 이분을 위한 일임도 잘알고 있었다.

5.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라는 것이었다.일부러 겸손함을 보이거나 요한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렇게 하자는 것이다.6.요한 역시 주님의 말씀을 빨리 깨달았다.만일 요한이 영적으로 무딘 사람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우리는 이일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 헤메일 때 바로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7.한마디로 겸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것이다.그리고 요한도 겸손하게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다.“자! 나를 봐라.내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그러니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제자로 둔 사람이다”라고 교만해지지 않았다.

B.신자는 겸손해야 한다.

1.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주님을 영접했다면 우선 겸손해진 모습을 남에게 보여줘야 한다.아마 겸손은 제일 먼저 나타날수 있는 변화일 것이다.

2.지금 우리나라가 안고있는 인간성의 문제 중에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발생하는 문제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교회가 나누어지는 원인도 겸손하지 못함이요,교회가 난립하는 문제도 교만때문이다.양보만 한다면 해결될 일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그러나 겸손하지 못하다보니 양보란 있을 수 없는 실정이다.

3.가정의 문제도 먼저 부부가 겸손의 미덕을 시범으로 자녀에게 보여야 한다.이것은 매우 필요하고 효과적인 교육일 것이다.

4.우리나라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기만 한다면 우리나라는 매우 살기좋은 환경이 될 것이다.그러나 전혀 그렇지 못하다.사람들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그리고 자기의 생각만이 최고라고 고집한다.겸손하지 못한 까닭이다.

II.하나님은 겸손한자에게 상을 주신다(16-17).
A.하늘이 열렸다.

1.예수께서 물에 내려가셔서 세례를 받으시고 다시 위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이것을 좀더 묵상해 보면,
1)복음서에서 처음나타난 하나님의 음성이다.
2)그 당시 강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모습을 분명히 지켜 보았다.
3)3년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출발의 신호가 되었다.

2.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려 하실 때 요한은 “내가 당신께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그것은 이성적으로 지당한 말씀이다.아마 인간들이라면 그렇게했을 것이다.그러나 예수님은 이성적인 요한의 제안에 대하여 “영적인 제안”을 하셨다.이렇게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는 것이었다.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3.우리가 16절과 17절에서 보는 광경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 후에도 없었다.“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되어진 일들이다.매우 신령한 체험이었다.만일 우리들이 신앙생활에서 이와 유사한 영적체험을 한다고 하면 그의 신앙은 전혀 달라진다.매우 힘있고 역동적인 신앙으로 변모한다.그리고 실제로 다른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분명한 영적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이것은 신앙인이 천만금의 돈을 얻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경험이다.

4.하나님이 무어라고 하셨는가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하나님의 아들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아마 굳이 세례를 받지 않으셨어도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그런데 하필 왜 이자리에서 그런말씀을 하셨을까를 생각하자.세례를 받으시니까 그 말씀을 하셨다.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실천하니까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이다.요한의 이성적인 제안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영적인 진리를 따랐더니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기뻐하셨다는 말씀이다.

B.우리도 겸손하여 상받자.

1.사람은 자신이 좀 특별한 은사를 체험하면 이내 주제파악을 못하고 혼란에 빠져든다.그래서 자신이 마치 바울의 후계자라도 된듯이 착각을 한다.요즘은 좀 덜한지는 모르지만 이따금 광고에 보면 불의 사자,능력의 종,신유의 권위자,말씀의 종,영권과 물권을 한손에 쥔자등등 일일이 열거하기 조차 쉽지않은 미사려구로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들을 본다.그게 어떻게 자신의 것인가이들은 결코 겸손하지 못한 자들이다.

2.큰 은혜가 임할수록 더욱 조심하고 더욱 낮아져야 한다.왜인가 성령께서 보잘 것없는 자신을 들어써 주시기 때문이다.그래서 더욱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3.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더 큰 상을 주신다.주님은 친히 이것들을 우리에게 시범으로 보여 주셨다.

결론

1.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중에서 겸손한자를 찾으신다.

2.겸손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다.겸손의 능력을 받자.

3.하나님은 겸손한 종에게 상을 주신다.

<빈야드교회II>
어떠한 사역이든 그것이 개교회에서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교회만이 할수 있는 사역은 보편성이 없다.지금 한국교회에 급속히 소개되고 있는 빈야드교회의 사역도 개교회에서 실천이 가능한 보편적인 것일때 의미가 있다.

II.접목이 가능한가
A.가능하다.참석자가 1회 때 20여명이 2회 때 200명 이상으로 늘어난 것도 바로 그점 때문이다.1회 세미나를 다녀오신 분들이 유사한 현상을 그들의 사역현장과 초청받는 곳에서 나타내기 시작했다.2회 참석자들 역시 동일한 현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자신들이 세미나당시 체험했던 그대로 다른사람에게 행하였더니 그들이 영적인 현상을 체험하게된 것이다.1회와 2회를 다녀온 분들을 통하여 소문이 퍼졌고 호기심과 기대로 3회에는 360명이 참석하게 되었다.사실 한국의 목회자들은 100명 미만이었다.그러나 미주지역의 목회자들은 200가량 참석했다.참가동기를 물었더니 어떤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었다.그래서 호기심으로 왔노라고 하였다.

B.빈야드사역의 특징은 찬양과 말씀과 치유에 있다.이 사역을 각자의 현장에 도입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찬양이 중요하다.지금 국내에서는 두란노에서 경배와 찬양이라는 타이틀로 많은 소개를 하였는데 놀랍게도 상당수의 찬양들이 빈야드교회에서 불려지는 것들이라는 점이다.다시말해서 두란노에서는 일찍 그 쪽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고 봐야할 것이다.그들의 찬양은 그냥 듣기만 해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그리고 뭔가가 느껴지고 치료되는 것 같았다.더군다나 진지하게 찬양하는 교우들의 모습은 더욱 입체적으로 영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1.찬양인도자를 발굴해야 한다.음악적인 재능도 물론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자라야 한다.집회 기간중 홍콩에서 온 팀이 한시간 찬양을 인도했는데,그 리더는 15년 동안이나 갱단생활을 하던 자였다.그는 어느날 갑자기 삶의 회의를 느끼고 선교사를 찾아가 회심한 사람이었다.그는 회심 후 일년동안 열심히 기타를 배웠다고 한다.그리고 찬양리더가 되었다.이 사람의 간증은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한 셈이다.한국교회는 음악전공자가 풍부한 까닭에 기능적인 면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바 이는 매우 위험한 현상이라고 판단된다.

2.분위기에 합당한 곡을 선정해야 한다.다행히 국내에서는 두란노서원이 이 일을 대행한다고 봐도 무난할 것같다.지금까지 우리가 즐겨 부르던 곡들 중에서 경배에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곡들은 과감히 폐기하는 결단이 요구된다.이것은 접목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분깃점이 될수도 있다.그리고 찬양을 편안하고 자유스럽게 하는데 필요한 보조기구(OHP,액정비젼,대형모니터등등)도 필수품이 된다.

3.청중이 찬양에 익숙하도록 훈련이 동반되야 한다.필자는 두란노의 경배와 찬양을 여러번 참석해 봤다.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든 것과 그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있음을 체험했다.그러나 빈야드교회의 경우는 또 다른 체험이 있었다.실제로 그들은 인도자와 청중이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었다.이것은 아마도 그들의 음악에대한 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보여진다.그러므로 여기에 대한 사전 인식이 필요할 것이고 아울러 그렇게 반응할 수 있도록 훈련이 동반되야함을 느꼈다.인도자는 무조건 인도하지 않았다.청중들이 충분히 찬양가사에 몰입하도록 철저하게 조직적이었다.그렇다고 인위적인 것은 전혀 없었다.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신앙고백을 볼수 있었다.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여기에 대해서 신경을 쓴다면 충분히 접목이 가능하다.신앙고백이 분명한 인도자가 자신의 믿음분량을 따라 청중을 훈련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C.찬양은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열어 놓는다.더군다나 선별된 곡은 더욱 그힘이 강하다.그러므로 설교자가 그만큼 부담이 적다.그러나 설교준비에 소흘해서는 안된다.그들의 기대를 충분히 채울수 있어야 한다.특정한 주제를 선택한다든지 아니면 강해설교가 무난할 것으로 생각된다.사실 강해설교는 성경에 대하여 관심있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그러나 성경에 대한 관심이 적은 대상들에게는 오히려 제목설교가 효과적이다.그러나 찬양으로 이미 이들은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으므로 이들에게는 보다 성경적인 설교가 효과적이다.강해설교가 꽃피기에 가장 이상적인 사역이라고 확신한다.

D.찬양과 말씀이 끝나면 설교자는 기도를 하면서 초청을 한다.물론 설교에서 다루어진 주제라야 한다.홍콩의 빈민선교를 하는 선교사는 고난에 동참할 자를 초청했다.의외로 그들은 많은 사람이 이 초청에 응답했다.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중독을 주제로한 설교자는 역시 그런 사람들을 초청했다.그들은 용서에 대해서,회개에 대해서도 그런 방법으로 청중을 초청하여 그들을 기도해주는, 그들의 전문용어로 사역시간을 가졌다.바로 이 시간이 하일라이트를 이룬다.이들은 이런 시간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그들의 기도는 많은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즉,중언부언을 철저히 금지시킨다.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용어를 사용하게 하는데,성령이여 오소서.채워주소서.더 충만히…를 사용한다.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바를 아시는 분이시고 말을 많이하고 수다를 떨어야만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리고 구했으면 하나님의 반응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매우 합당하다고 느껴진다.이 역시 새로운 기도훈련을 필요로하는 부분이다.먼저 교인들의 기도훈련을 다시 해야할 필요가 있다.이렇게 하면 교회가 시끄럽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실제로 빈야드사역은 매우 조용하다.그들은 찬양도 조용하고 설교도 조용하다.그리고 기도도 조용하다.그러면서도 다이나믹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다.그들은 소란을 철저히 배격한다.시끄러우면 감정에 빠지게되고 감정에 빠지면 성령의 인도를 상실한다고 믿기 때문이다.기존의 한국적 성령론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렇게 찬양과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되면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사역할 수 있다(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다른사람을 위해 안수).그런데 그들의 안수는 직접 손을 얹지않는다.그 이유는 “내가 무엇을 한다”가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도록 요청한다”가 되도록하기 위함이다.그래서 손을 상대방에게 가까이 하되 몸에는 접촉시키지 않는다.이 역시 철저한 훈련이 필요하다(한국인은 습관적으로 남을 지배하려는 습성이 있다).빈야드사역이 접목이 가능하다는 증거가 바로 이 부분이다.그 분위기를 충분히 경험한자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데,그는 자신이 경험한바와 똑같거나 비슷한 환경을 상대방에게 제공하게 된다.물론 성령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과연 평신도가 다른 사람에게 기도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장차 논란을 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 원리만큼은 아무 하자가 없다.이 사역은 전도에 도입하면 효과를 발휘한다.그래서 빈야드교회는 설득전도를 할 것인가능력전도를 할 것인가로 표현한다.초신자로 하여금 어떤 새로운 체험을 하도록 하면 그는 그만큼 마음의 문을 빨리 연다는 통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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