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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배가 되게 하소서(2) (마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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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땅에 씨를 뿌렸는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 잘 자라서 100배, 60배, 30배로 결실했다는 것입니다.

농사가 안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종자는 좋은데 땅이 박토여서 안되는 경우, 땅은 옥토인데 종자가 나빠서 안되는 경우, 종자도 땅도 좋은데 기후조건이 나빠서 안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는 종자도 좋고 기후도 좋고 뿌리는 농부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만 땅이 문제였습니다. 땅의 조건을 따라 씨가 자라기도 했고 자라다가 죽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각각 토질이 다른 땅이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길가, 돌밭,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은 각각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인접해 있거나 같은 공간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교회의 다양성과 집합성을 의미합니다.

많이 모이든 적게 모이든 교인의 성분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심성과 심상(心性과 心象) 역시 다양합니다. 생각하는것, 기대하는것, 그리고 요구하는 것이 다 각각 다릅니다. 교회 나오고 예수 믿는 동기도 각각 다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1)길가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길가란 사람의 통행이 잦고 노출된 장소입니다. 그래서 시끄럽고 산만합니다. 종자는 땅에 떨어진후 흙속에 묻히고 덮혀야 하는데 길가는 그것이 어렵습니다. 거기 떨어진 씨는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새들이 먹어 버리고 맙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아 버리고 만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길가에 뿌린 씨인 것입니다.

교회 생활은 차분하게 그리고 정착해야 합니다. 동네 속에 있는 식당과 역이나 터미널에 있는 식당의 차이점은 손님을 대하는 태도라고 합니다. 즉 서비스에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동네 식당 손님은 단골로 드나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소홀히 할수가 없지만 역이나 터미널 식당 손님은 대부분이 한번 스쳐 지나가는 뜨내기 손님들이기 때문에 서비스가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선택을 이곳 저곳을 다녀볼 수는 있습니다. 그것 자체를 나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일생동안 교회를 옮긴다면 그것은 습관성이기 때문에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지난 금요일 저희 교회 교역자 전체가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네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첫째 교회에 유익하고 교회를 위한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책임지고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책임져 줄테니 소신껏 일해줄 것.

둘째 동역자끼리 서로 돕고 사랑하는 파트너쉽을 가지고 일해줄것.

셋째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것.

넷째 여기저기 옮겨 다니지 말 것.

충신교회 있다가 갈만한 교회라는게 서울의 경우라면 Y,M,S,K교회 정도일텐데 그 교회들도 가보면 별것 없을테니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다가 담임목사로 나가도록 하라고 했고 일평생 나와 함께 일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고 했습니다.

길가 신앙생활은 좋지 않습니다. 충신교회가 가장 좋은 교회입니다.

2)돌밭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흙이 없는 곳 그래서 강퍅한 곳입니다. 돌밭에도 씨는 떨어집니다. 그리고 싹이 납니다만 곧 마르고 시들어버립니다. 흙이 얇기 때문입니다.

21절을 보면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 곧 넘어지는 자”라고 돌밭에 떨어진 씨를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스스로 우리네 마음을 돌밭으로 만들어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돌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용도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돌같아선 안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흙을 만드셨지만 돌을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돌은 오랜 세월동안 흙이 굳어지고 다져져서 된 것들 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본래부터 돌처럼 강퍅한 마음은 없습니다. 이런 도전과 저런 사연들이 쌓이면서 마음이 굳어지고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어쨌든 돌같은 마음에는 복음의 씨가 자라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환난이나 핍박때문에 쉽게 포기 하거나 넘어져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과 동생을 잃은 소녀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잃는 슬픔을 만들지 말자고 당부했습니다.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그 무엇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이런 비극을 주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결별하겠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토록 무능력한 신을 예배하는 교회라면 출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와도 슬픔에 젖은 내 모습을 나눌 수 없다며 문을 잠근채 두문 불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녀에게 당부한 것은 부모님을 잃은 슬픔때문에 하나님 잃고 교회 잃고 이웃을 잃는다면 그 슬픔이 더 클 것이며 그 손해가 더 클것이 아니겠는가. 소중한 것을 잃었더라도 더 소중한 것을 둘이나 셋을 잃는 잘못을 저지르지는 말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두께가 두꺼운가 얇은가 하는 것은 환난이나 핍박을 당했을때 그리고 고통과 절망적 사건 앞에 섰을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3)가시떨기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가시 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다”고 했습니다.

가시는 찌르는 것입니다. 가시는 기운을 막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찌르고 막는 것이 가시가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가시도 자란다는 것입니다. 가시란 작든 크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손톱밑에 들어간 작은 가시도 염증의 원인으로 작용하는가 하면 큰 가시는 생명도 빼앗아 갑니다.

그런데 땅에 뿌리를 내린 가시나무는 자랍니다. 더 큰 가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시는 자신을 찌르고 남을 찌릅니다.

가시같은 사람은 말과 행동으로 남을 괴롭힙니다.

저는 어렸을 때 자라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싸우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얻어 맞기도하고 남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했고 연장으로 손을 다치기도 했습니다. 그 수를 다 셀 수도 없고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라고 다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말 때문에 받은 상처는 지금도 생생하게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가시는 한번 꽂히면 깊이 파고드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의가 됐건 실수가 됐건 가시로 남을 찌르는 것은 부도덕한 일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시는 가로막습니다. 나쁜 것을 가로막는 긍정적 역활이 아니라 좋은 것을 가로 막습니다.

은혜를 가로 막고 말씀을 가로 막습니다. 남의 성공과 행복을 가로막고 아프게 합니다.

길을 터 주는 사람,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됩시다. 좋은 일하는 사람을 가로 막지 말고 박수를 쳐줍시다. 주님은 마태복음 23:1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자기도 안하고 남도 못하게 막는것, 자기도 안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는 것, 이것은 화받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 사회조사기관에서 한국만이 지니는 세계 최고가 무엇인가를 조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째 교통사고 세계 최고 둘째 음주량 세계 최고 셋째 무고 투서 세계 최고 등등이었습니다.

박수 세계 최고, 화해 최고, 격려 최고, 신앙 최고가 되게 합시다.

 2 땅이 좋아야 결실이 가능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100배, 60배, 30배로 결실했습니다.

23절을 보면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49:20을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좋은 땅도 여러 형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좋은 땅인데 결실은 다릅니다. 어떤 땅은 100배, 어떤 땅은 60배, 어떤 땅은 30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땅이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100배입니까, 60배입니까, 30배입니까 좋은 땅, 아주 좋은 땅, 가장 좋은 땅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땅일 때 100배의 결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중심교훈은 종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땅에 관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땅이 좋아야 100배의 결실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땅만 좋으면 최소한도 30배는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자기 반성과 성찰의 좋은 자료가 됩니다. 왜 믿음에 못 자라는가 왜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이 없는가 그것은 내 마음의 밭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기이거나 돌밭이거나 가시떨기이기 때문에 씨가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은 좋은 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토질을 바꿀 수 있습니까 호세아서 10:12을 보면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묵은 땅을 갈아 엎어야 토질이 바뀝니다. 그리고 온갖 잡초가 죽게 됩니다.

호세아가 말한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것은 마음밭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을 때 여리고 지방은 토질 때문에 진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2:19 이하를 보면 어느 날 여리고 지방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하소연했습니다. “이 성읍은 매우 아름답고 물이 넉넉하지만 농작물이 결실을 못하고 떨어집니다”라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엘리사가 그릇에 소금을 담아 물 근원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고.

땅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물이 나빳기 때문입니다. 그 물을 고쳤을 때 땅은 자연히 고쳐졌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물을 고쳤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물도, 땅도, 역사도, 인간도, 하나님이 고치십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능력과 새롭게 하시는 역사로 우리가 고침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100배가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못된 토양을 고치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 내 정신, 내 영혼의 밭을 고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까지 복을 못받고 성공 못하고 믿음 자라지 못하는 이유를 밖에서 찾느라 골몰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 원인을 씌우기 위해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깨달았습니다. 100배 결실 못하는 까닭은 내 밭이 나빴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숙한 신앙과 100배의 결실을 위해 하나하나 고쳐 나갑시다.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의 나쁜 태도를 고칩시다. 그것이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입니다.

전통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쁜 전통일 때는 빨리 고쳐야 합니다.

소신과 고집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소신은 굽히지 않아야 하지만 고집은 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나쁜 것은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백해 무익합니다.

금년 한해 배가되는 축복과 성공적 삶을 위하여, 그리고 신앙의 배가를 위하여 묵은 땅을 기경합시다.

잡초를 제거합시다. 하나님께 내 터전을 맡겨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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