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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지 자유 (미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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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오지만 아직도 소(희)망은 있다’ 이것이 또한 미가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소망과 희망은 섞어서 쓰고 있지만 희망은 좀도 미래 적입니다.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있다’ 하나님의 자비와 놀라우신 긍휼로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하니 이것이야 말로 엄청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산이 풀로 덮이게 되고 물같이 밀같이 다 녹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4장 1절에 와서는 예루살렘 전에 산에 소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물려 갈 것이라 하였으니 쫓아냈던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세계 만민이 복음으로 돌아올 것을 보여 주십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1년 1월 6일에 발표한 유명한 4대 자유에 대한 연설문은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2차 대전에서 이 자유에 대한 귀한 연설을 통해서 우리 민족도 각성을 하게 되고 우리도 자유를 얻어야 된다고 새로운 결의를 했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는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루즈 벨트의 연설문의 배경은 아마 미가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간의 지혜가 자기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연설이나 위대한 사람들의 행적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 뒤에는 반드시 성경의 말씀이 배경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네가지 자유
1).무지로부터의 자유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신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4:2중)

미가는 사람이 무지한 데서부터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람이 무지해지면 자유를 상실합니다.
지식 없는 사람은 꿈도 없고 행동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미가가 주장하는 무지는 세상에서 공부를 못했다던가 지혜가 모자라던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법을 예루살렘에 세우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아주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 제일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가르치지 않으면 우리는 무지한 자가 되고 불쌍한 자가 되고 행할 수가 없게 됩니다.
시온의 대로가 다른 것이 아니라 말씀의 대로입니다.
말씀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의 가르침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무지로부터 자유 함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성경을 많이 읽었고 많이 안다’ 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책이 성경책이요 가장 어려운 책이 성경책입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고, 잘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 성경을 연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한 구절을 가지고도 많은 시간을 요합니다.
제가 8월 10일부터 한 주일 동안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열리는 세계 신약 학회에 참석하려고 비행기표 예약도 하고 준비를 다 했었는데 장로님들이 휴가도 반환하고 생활비도 하나님께 드려서 성전 건축 마지막 손질을 하고 교역자들도 다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저도 갈 수가 없어서 모든 것을 취소했더니 그때 읽은 원고들이 우편으로 제게 옵니다.
우편으로 오는 것을 보면 그 내용이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 1절 한 부분 한 모통이 단어 하나를 가지고 전세계에 내노라 하는 학자들이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1984년도에 예루살렘에서 영국에서 오신 분이 자기 논문을 발표한 후 독일 학자에게 공격을 받다가 졸도를 했습니다.
자기가 아는 것이 진리인데 아니라고 하니까 졸도를 해서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학문 세계라는 것이 인정도 없고 사정도 없습니다.
식사 시간에 보면 그렇게 친하고 서로 존경하는 학자들이 학문의 대결을 할 때는 피도 없는 사람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게 아니라 성경의 한 부분을 가지고 생명을 내걸고 싸웁니다.
우리는 무지하기가 형편없습니다.
성경 10번 20번 읽은 것 자랑할 것 없습니다.
브르셀에서 연구하시는 니이글이라고 하는 카톨릭 학자는 가령 마태복음 5장 1절에 대해서 4천 개가 넘는 사본 중에서 중요한 사본 중 A사본, B사본, C사본, D사본에 수록된 것을 발표를 했는데 컴퓨터 보다 더 정확합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줄줄 외우고 있습니다.
몇 년도에 누가 어떤 논문에서 지적한 것까지 환합니다.
십 년을 공부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회에 갔다 올 때마다 한국의 학자들에게 보고하면서 “우리는 학자도 아니다, 그 밑에서 걸레를 빨라고 해도 힘들 사람들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도대체 해도 해도 다 안나 옵니다.
이 엄청난 진리를 혼자 할 수 없으니까 여러 사람이 각 분야에서 각기 연구를 합니다.
교회에서도 성경 연구원도 만들어 놓고 가르치고 성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목사님들은 밤새워 연구하고 조사하고 깊은 기도를 하고 영적으로 해석을 해보고 별 방법을 다해서 준비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무지로부터 자유 함을 얻어야 됩니다.
말씀에 확신이 생기고 깊은 뜻을 확실히 믿게 되면 그 다음에는 행동의 자유가 생깁니다.
말에 자유가 생기고 생각에 자유가 생깁니다.

2).전쟁으로부터의 자유

“우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4:3하)

전쟁은 황폐와 빈곤을 낳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치지만 이 땅에 전쟁은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은 세상 끝날까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욕심과 편견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미가는 이사야 2장 4절과 요엘 3장 10절과 흡사한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칼은 전쟁을 의미하고 보습은 평화를 상징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든다고 했으니 전쟁에 사용했던 도구가 밭갈고 씨 뿌리고 추수하는 농기구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무지에서 자유한 자가 이 자유를 얻게 됩니다.
참 평화는 힘의 균형에서 오는 것인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소련과 미국이 힘의 균형을 잘 맞추면 전쟁은 사라지고 북한과 한국이 힘의 균형을 가지게 되면 전쟁은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그 말씀의 순종에서부터 전쟁은 사라지게 됩니다.
개인의 전쟁도 가정의 불화도 교회의 다툼도, 모든 인간의 대소간의 전쟁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 무지로부터 깨어난 사람이 피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전쟁은 사람의 무지로부터 옵니다.
사람을 잘 알지 못하고 자기를 모르고 잠시 후 되어질 일을 모르고 오해와 편견과 아집에 끌려가다 보면 전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순종하는 사람은 변화를 받아서 평화의 도구로 사용이 됩니다.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3).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4:4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는다는 것은 평화롭고 안전하게 안식할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구원에 대한 안전 보장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평안과 질서를 회복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좋은 시입니다.
온 세계 사람이 사랑하는 시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모자람이 없다 함은 풍족하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일억 원을 은행에 넣고서도 매일 모자란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은행 예금 통장 하나 없어도 매일 풍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잔뜩 쌓아 놓고도 가난한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굉장한 부자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가난으로부터도 해방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소위 해방신학이란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재물과는 인간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것과 모든 재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과 주어진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관리해야 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가난이란 물질적인 가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가난한 사람이란 영적 파산자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부유한 자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난으로부터 자유’라고 하는 말은 경제적 빈곤으로부터 자유를 말합니다.
각 사람이 평화롭게 먹을 것이 풍족한 상태에 있게 될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 먹을 것 때문에 전전긍긍한다면 예수 믿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질 때문에 시험을 받기도 합니다.
‘너무 부하게도 너무 가난하게도 말게 하옵소서’ 좋은 기도입니다.
물질 때문에 법죄해서도 안되고 너무 가난해서 달마다 꾸러 다니는 구제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겠다는 뜻입니다.

모든 봉사가 다른 사람을 앞서가야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자 유함을 얻는 것이 성도들에게도 필요합니다.
헌금 위원이며 십일조도 해야 합니다.
대표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예배의 출석 율도 좋아야 합니다.

4)공포로부터의 자유

“오직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4:5하)

‘공포로부터의 자유’ 참으로 영광스러운 예언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지도를 받게 되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모든 재앙과 심판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요 희망이요 복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재창조할 수 있는 갱신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워지면 의가 이루어지고 질서가 이루어지고 진리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기도 응답이 안 될 것을 오히려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내 기도대로 이루어 주신다면 망해도 벌써 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는 아무개 때문에 일이 안 이루어졌다고 원망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 친구 때문에 길을 막아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주셨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 맺을 이유도 원망할 이유도 없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의 순종하면 두려울 것이 없는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공포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전쟁의 포로, 기근의 공포, 핵의 공포, 이 모든 공포로부터의 자유의 약속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핵을 더 많이 보유했다고 자유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의 날이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그날은 이미 도래했고 지금 진행 중이며 앞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 시까지 이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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