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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날에 (미 0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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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원의 날

“그 날에는”(4:6)

성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의 3대 덕을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 하였습니다.
미가서는 겸손하라 말씀하시고 겸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책임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를 않았습니다.
책의 분량이 적기 때문도 아니고 책의 한 가운데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크게 부각되지는 못했지만 우리 가슴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5장 2절 말씀, 메시야가 탄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너무나도 익히 알려져 있어서 미가서는 읽는 사람 뿐아니라 미가서를 읽지 못하는 사람까지도 이 미가서에 의해서 그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미가서 4장은 5장의 메시야 강림을 예언하기 직전의 전초 장으로서 그 날이 심판의 날이요 동시에 회복의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판관은 공의를 행치 못하게 되었고 예언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지 못하게 되었고 집권자들은 뇌물을 혹은 권력에 의하여 다스림의 권세를 상실하게 되어서, 제사장의 책임을 못하고 법관의 책임을 못하고 행정부의 책임을 못하게 되어 있는, 균형과 견제가 깨어진 그런 상황에서 나라가 혼란에 빠졌습니다(3장).
바로 그날에, 바로 그 순간에 한 편에서는 심판이 일어나고 한 편에는 구원이 생겨지고 심판과 구원과 회복이 같이 나타나는 것이 미가 선지자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의 요지입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은 무너지게 되고 백성들은 흩어지게 될 것이나 하나님의 백성은 모으게 되고 시온산에서 메시야가 자기 백성을 다시금 다스리는 그날이 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불신자의 멸망의 날은 신자의 구원의 날입니다.
심판의 날은 신자에게는 긍휼의 날이요 은혜의 날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이런 은혜가 주어집니다.
어려워도 낙심하거나 믿음을 배반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고 참아야 합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립니다.

2.그날에 있을 것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간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4:6)

심판의 날이요 동시에 날인 그날에 있을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 날에는 심판만이 있다고 했으면 우리 전부가 심판 감입니다.
저주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다 지옥행입니다.
그런데 그날에 하나님의 긍휼이 있겠다 했습니다.

‘긍휼’ 은 사랑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사랑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 용서받는 것을 긍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긍휼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건강한 사람이 아닌 쓸모 없는 자,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자.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 환난을 받아 소망이 없던 자를 모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환난을 받은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고통을 당한 사람들, 주님 때문에 눈물을 흘린 사람들, 복음 때문에 수고한 사람들을 모아 줄 것입니다.
4장에서는 메시야 안에서 긍휼이 있을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그도안에 있는 자는 긍휼을 입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습니다.
바울 메시지의 핵심 부분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학자들이 연구하는 가운데 신의 사상이냐, 이득신의 사상이냐, 의견이 분분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삶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기 보다는 구원의 긍휼을 강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바울 신학의 핵심 부분은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입니다.
바울 서신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를 빼면 바울이 말을 못할 만큼 많이 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마음도 생겨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입니다.
그리스도밖에서 사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밖에서 장성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름발이를 모으고 쫓겨난 자를 모으고 환난받게 한 자를 모으는 것이 천부 그리스도안에서 입니다.

그리스 도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해서는 이론으로는 안됩니다.
그의 말씀을 쫓고 그의 말씀을 행하며 사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것입니다.
1).남은 자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4:7상)
밤나무 상수리 나무를 다 베고 나면 남은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남은 그루터기에서 싹이 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도 죽임을 당하고 성도들도 다 죽임을 당하고 나 혼자만 살아 있는 줄 안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 혼자 울고 있는데 남은 자들이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다 망한 것같고 다 엉망되고 미국이 다타락한 것같아도 미국에 가면 지금도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구라파가 다 썩은 것같고 카톨릭이 다 썩은 것같아도 거기서도 지금 새 순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하면 안됩니다.
‘우리 교회가 제일이다. 내가 지금 속한 것이 제일이다’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처에 남은 자를 두셨습니다.
그 남은 자가 절름발이들이요 부상당한 자들이요 마귀와 싸우다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저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한다’ 고 하셨으니 이것이 또한 긍휼입니다.
멀리 포로로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양떼의 망대를 삼겠다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권세와 하나님의 나라, 다윗의 나라가 다시 양떼의 망대로 돌아옵니다.
이 양떼에서 다윗이 나옵니다.
다윗은 왕의 상징일 뿐 아니라 메시야의 상징입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됩니다.
그날이 되면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고 쫓겨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고 절름발이가 남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 다시 모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긍휼입니다.

네 힘으로는 하나님의 앞에 못 나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쓴 뿌리밖에 남겨 놓은 것이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베들레헴에 예수님 오신 긍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과 중심은 예루살렘입니다.
오늘도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에 승리하셔야 합니다.

2).산고의 아픔

“딸 시온이요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찌어다”(4:10상)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전에는 심한 고통과 고역과 추방이 있을 것을 우리에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잉태한 여인이 산고를 거치지 아니하고서는 생명을 탄생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면 그만한 어려움이 종종 따르게 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에 우리는 부르짖게 됩니다.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는냐’ 평안과 보호, 공급처인 왕이 사라져 버렸으니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상담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다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하느냐’ 그러나 산모는 애써 아기를 낳아야 합니다.
낳지 않으면 산모와 아이가 다 죽습니다.
회개의 부르짖음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할 것을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들에서, 바벨론에 잡혀 가서야 거기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즉 고통이 극에 달하여야 구원을 주십니다.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구원을 하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구원의 출처를 알지 못하고 감사치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적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벨론 포로가 된 다음에 끄집어내야 인간이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 인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면 육신 적인 고통도 당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중과 뜻과 모략을 알지 못하고 시험 당하는 짜에게 비난을 퍼붓습니다.
“이제 많은 이방이 모여서 너를 처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하나님의 뜻을 이방인도 모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자기들이 이긴 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고 잡혀간 사람도 모르고 있고 끌려간 사람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타작 마당에서 곡식 단을 자기의 곡간에 모으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다 모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 도안에서만 거하면 악마에게 끌려가지는 않습니다.
죄를 범하고도 예수님께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열 번 범죄하고도 눈물을 흘리면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수를 오래할수록 펑크가 나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그 죄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죄를 반복하면 안됩니다.

횐 샤츠에 만녀필을 꽂고 다닙니다.
만년필이 새서 잉크가 묻었습니다.
집에 갖다가 세탁비누로 열심히 빨아서 잉크 묻는 것 다 빼냅니다.
깨끗해졌습니다.
미련한 인생니라 또 꽂고 다닙니다.
또 뭍도 또 빨지요, 그 다음에는 이것을 안 쓰든지 꽂지를 않아야 되는데 미련한 인생이 편리하니까 또 꽂아 습니다. 또 묻었습니다.
세탁비누 좋은 것 많으니까 아홉 번도 빠집니다.
그러나 열번째는 구멍이 뚫리는 법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던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일곱 번도 여덟 번도 아홉 번도 용서하시고 열번째도 빨아 주시는데 열번째에는 구멍이 뚫립니다.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것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통과 고역과 쫓겨남을 당하는 신세에서 돌아와 주님 앞에 회복의 날, 긍휼을 힘입는 날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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