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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화에로의 부름 ③-부인 (막 1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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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시고 잔을 나누신 이 사건은 요한복음 6장의 오병 이어 사건에서 상징화 되고 있다. 이 두 사건을 연결해 보면 그 깊은 뜻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게 하시고 열두 광주리 가득히 남게 한 사건이 나온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 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 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요 6:5-6)”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이렇게 질문하심은 그가 어떤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우리 쪽에서 조건과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과, 예수님쪽에서 조건과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다르냐를 우리에게 확인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에 불과하다.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빌립이 보기에는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돈이 아니라 어린 아이를 기다리고 계신다. 어린 아이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은 물론 아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가 등장하는 것은 우리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부적합한 자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통해 가장 가치 없는 것도 예수님의 손에 들리우면 크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본문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쪽에서 내놓는 것은 아무리 훌륭한 어떤 것이라도 예수님의 일을 이루시는 데 전혀 도움도 될 수 없고,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쪽에서 내놓는 어떤 것도 예수님이 능력있게 일하실 방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쪽에서 굳이 예수님의 일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내어 맡기는 즉 자기 자신을 예수님 품에 내어 맡기는 헌신일 것이다.

어린 아이가 예수님께 맡긴 것이 기적이 일어나는 조건이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떡이 아닌 다른 것, 즉 돌로도 하실 수 있으셨다. 그 어린 아이가 물고기와 떡을 갖다 바친 것은 자기의 진심을 주의 손에다 맡겨 버린 행위였기 때문에 쓰일 수 있었다. 우리가 맡기는 것은 우리의 진심, 즉 주권이지 일이 이루어질 것의 씨앗은 아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소년이 내어 놓은 떡을 그냥 사용하지 않으시고 떼어 나누어 주셨다고 표현한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를 표현할 때 언제나 ‘떼신 떡’과 ‘잔’ 즉 ‘흘린 피’라고 표현한다. 빌립보서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 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 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 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 게 하시고(빌 2:5-10)”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즉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조건이나 씨앗을 바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럴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예수님께서 그 소년이 바친 떡을 부숴뜨려 떼어서 나누어 주신 것과 같이 우리가 내어놓는 것은 예수님 손에서 우리 몸이 부서지는 과정이 있어야지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5,000명을 먹인 것은 그 소년이 내놓은 떡이지만, 그 떡은 더 이상 소년이 갖고 있었던 떡이 아닌 것이다. 떡과 물고기를 내놓은 소년의 진심이 받아들여지고,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그 떡을 다시 부수고, 새롭게 하셔서 5,000명을 먹이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오병 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던 당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영적으로 보면 목마르고, 배고프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으나,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나 하나 천국가지’라는 요한복음 3:16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나밖에 천국에 못 가는 것이니까 다른 이에게 나눠줄 수 없다. 영적으로 먹여야 할 사람들은 많은데 내가 가진 것은 나 하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할 뿐이다. 이것을 어떻게 꺼내 놓느냐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을 꺼내 놓는 것으로 그 많은 사람을 다 먹일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그 많은 것을 마련할 수도 없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꺼내 놓는 것이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이루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 뒤에는 나를 어떻게 맡기느냐의 싸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나를 비워 그분이 생각하는 일에 쓰임을 받게 하는 것이 봉사요 헌신이다. 우리는 5,000명을 앞에 두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진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5,000명을 다 먹이려고 굉장한 열심을 내고 있다. 돈을 만들어 5,000명을 다 먹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동분서주 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봉사인 것이다. 주께서 하실 일이 전혀 없게 만드는 것은 봉사가 아니다. 내가 일함으로 그것이 내가 아닌 주가 나타나는 것으로 어떻게 바꾸느냐의 싸움이 봉사인 것이다. 우리의 생애와 나라는 존재를 통해서 주가 누구신가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봉사인 것이다.

그런데 실생활에서의 실천은 자기를 죽음에 던지는 복종이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요구대로 한다면 할 알의 썩는 밀알로 요구되고 있다. 그런데 열매는 내가 죽어야만 맺히는 열매이다. 우리가 죽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그 열매가 맺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온전히 바쳐지게 하기 위하여 종종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떼어 놓는 일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나 하나만의 것이 아니고, 나를 통하여 일하시고 싶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다른 사람 앞에도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세상의 것들로부터 떼어서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셔서 한 사람을 중생시키는 작업에 우리를 쓰시고 싶어 하시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 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 고(행 3:4-6)”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의 힘이고, 존재이고, 본질인 것이다. 내가 그의 손에 잡혀 있기 때문에 나를 더듬어 올라가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것이다. 베드로가 어떤 일을 했다면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인 것이다.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개념이 아니다. 내가 그의 소유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헌신이요 봉사이다. 기독교인의 성화의 단계에 있어서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헌신과 봉사에 있어서 ‘주님의 주님되심’은 무척 중요하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제대로 인식된다면 신자들이 겪는 갈등은 99%가 없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에 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나를 보내신 분이 누구인가를 안다면 내가 그의 보냄을 받은 자라는 자기 신분의 확인이 있고, 나를 보내신 분이 어떤 권위자인가와 연결될 때 우리를 방해할 자가 없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나를 보낸 분이 누구인가를 알 때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귀한 위치인가를 알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가 잘못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특권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 중에 아주 잘못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신 구세주라는 개념만 강조되고 주인이라는 개념은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주인이라는 개념은 아주 중요하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 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29-30)”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인이라고 한다. 그가 주인이고 우리는 종이다. 요즘 기독교가 너무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하다가 하나님과 우리가 대등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한다면서 나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느냐고 불평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람은 주종관계나 위계 질서가 파괴되는 권위적 차원에서의 대등한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대등한 관계에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한 쪽은 명령하고 한 쪽은 그 명령에 따르는 관계일 때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죄’나 ‘지옥’과 같은 이야기를 하면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손해를 끼치고 거부감을 준다고 해서 ‘사랑’이나 ‘축복’ 등 좋은 이야기를 쓰기 시작해 권위 질서가 상당히 모호해졌다. 하나님은 두려워해야 할 분이고, 그와 우리는 대등한 관계에 있지 않다. 우리는 오직 그가 명령하실 때 ‘네’하고 대답하며 그 일을 해야할 존재들이다. 하나님 앞에 왜라는 질문이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이 두 구절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우리는 더 이상 자기의 삶이나 자기의 존재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를 보낸 분이 계신다. 우리는 보낸 이의 목적을 이루어야 할 보냄을 받은 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보냄을 받은 자로서 보낸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낸 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의로 보낸 분을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낸 것이 어떤 것인가를 확인하려면 예수님의 삶을 그런 시각에서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럴 때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자기를 보낸 분 앞에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을 취하신 것이다. 그 앞에 항복하고 자기를 비어 무(無)로 만드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어 놓으신 것이고, 그 빈 것을 종의 형체, 인간의 모양으로 되게 하사 십자가의 죽는 자리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가라고 시키신 일인 것이다. 그 일이 예수님을 보내신 일이다.

예수님은 자의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자 하나님이 그를 십자가로 보내시며, 그 십자가의 죽음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에게 요구되는 봉사요 헌신인 것이다. 예수님은 자의로 무엇을 하겠다고 하신 분이 아니라 그렇게 되신 분이고, 스스로 어디를 가겠다고 하신 분이 아니라 거기에 동행하신 분인 것이다. 이 말은 그의 서 있는 장소, 그가 하는 일은 그를 보내신 이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일을 하면 그 일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누가 받아야 하는 것인가 보낸 분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신자에게 헌신과 봉사라는 것은 내가 주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비우고 그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 뿐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이 그 일을 시키신 분이 있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주님은 가만히 계시고 내가 주를 위하여 열심히 뛰어다니며 그것이 봉사요 헌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열심으로 자기 신앙의 만족과 불안감을 메꾸려는 표현일 뿐이지 하나님이 원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이제 신자가 영적으로 출생했으면 그 수준에 맞게 성장해 나가야 주인의 뜻을 잘 알고 그 뜻대로 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열심을 내는 것은 오히려 주인의 편에서 볼 때에는 일을 그르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내 것이 아니고 보냄받은 인생이다. 내가 선 곳은 갈 곳을 정하지 않고 보냄을 받은 장소이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냄받은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에 치중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내가 어떤 일의 필요성을 인식한다고 해서 그 일을 혼자 다 하려고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 일을 시키지 않는한 우리가 공감하고 필요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할 능력이 있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꼭 필요하지만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은 겸손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어떤 일을 시작하였을지라도 자기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고, 하나님이 능력주시지 않는 한 못하겠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도 아니요, 신앙이 없어서도 아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이사야 선지자의 겸손한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 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이사야는 환상을 보고 ‘내가 가겠습니다’ 말하지 않았다. 다만 ‘보내어 주소서!’ 겸손하게 말했다. 우리는 가고 싶어도 하나님이 보내 주시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 보냄이 어떤 보냄이었는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 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 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아주 패역하고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의 보냄인 것이다. 실패의 사역을 위해 보냄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주 보잘 것없이 죽는 일로 보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늘 성공하고, 세상으로부터 드러나는 보냄은 아니다. 실패의 사역을 위한 보냄을 받을 수도 있고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보냄을 받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기준과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우리는 보냄을 받았다. 그 보내심이 어떤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 요한복음 17:4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 게 하였사오니(요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는 것이 보냄을 받은 목적인 것이다. 내가 자의로 ‘이런 일을 하면 주님께서 좋아 하시겠지’하고 정한 일을 이루기 위함은 아닌 것이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이유였다. 똑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꼭 승리하고 성공해야만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하나님께서는 죄의 멍에를 끊고, 어둠에 있던 자들이 애통하는 자들을 부르시는 것으로 그의 영광을 펼치시기도 한다. 싸움에서의 승리로가 아니고, 그의 은혜와 사랑을 펼치시는 것으로 영광을 취하시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며 ‘다 이루었다’ 말씀하심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셨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버지께서 무엇으로 영광을 받으시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참으로 무지한 자들이다. 내가 있게 된 이 시대, 내가 있는 이 장소가 보냄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환경을 바꾸어 놓으면 내가 올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제대로 신앙 생활 못 하는 것을 얼마나 환경 탓으로 돌렸는가 나 때문에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좋은 신자가 되고, 좋은 나라가 되도록 보냄 받았는데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곳이라면 나는 보냄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부 누리고 되어져 있는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밖에 없는 자들이다. 그 일에 동참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봉사이고 헌신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하느냐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나에게 맡긴 일을 이루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떤 일을 그가 원하시는 것이냐 할 때에 그가 기뻐하는 일을 했다는 것도 하나의 큰 조건이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 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나의 모든 환경을 통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우리는 각자 이것을 깨닫고 이 일을 해야 한다. 남이 다 하는 것으로 할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가 늘 생각하고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 뜻을 묻는 일에 너무 소홀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 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 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어떤 큰 일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사활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 뜻과 요구 아래 순종하는 것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와 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믿음은 언제나 대상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분에 대한 약속, 소망, 요구, 명령에 대한 모든 것을 지켰다는 것이다. 주를 위하여 얼마나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믿음을 지킨 것이다. 그분의 뜻을 지켰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셨던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것과 우리가 이 땅에 보냄을 받은 목적이 같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을 위하여 사셨듯이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하는 일에 동업자가 아니라 내가 죽고, 내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그가 사는 것으로 바뀌어져 나타나는 생애를 살자는 것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 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 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48-53)”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운 떡이라고 하시면서 신자의 삶은 자신을 먹는 것으로만 된다고 한다. 신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힘이고, 생명이고, 지혜와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를 힘입고 살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나에게 오시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을 단순히, 나의 삶의 어떤 어려운 부분을 해결해 주고 빈 곳을 메꾸어 주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모두 그분이 없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깊은 평화나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은 그분 외의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그분을 소유하지 않고는 우리의 삶에서 아무 것도 지탱해 나갈 수 없는 것도 그분을 증거하는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를 소유하지 않으면 그가 우리의 양식이 되지 않는 한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고, 위로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신자의 삶에 있어 큰 일 중의 하나이다.

사마리아 성에 가셔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일을 이루는 것이 그의 양식이라고 하셨다. 그 삶의 전 존재가 그를 보내신 자의 일을 이루는 것이요, 우리로부터가 아니라 그 일을 맡기신 분으로부터만 그 일을 완수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그 힘이 늘 공급되는 것이고, 그것이 그분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7)” 이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으매 내 삶은 그로 인하여 살고, 그것이 내 삶의 목표이고, 이유인 것이다. 우리의 삶은 결국 그분이라는 양식이 필요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분이 보내고, 그분이 시키신 일을 하고 있는가의 싸움으로 우리의 봉사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존재하는 자들이어야만 한다. 그의 생명이, 성품이, 인격이 우리를 대신하여야 한다. 내 존재의 어느 부분도 그분과 대치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 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 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봉사라는 것은 내가 주를 위해 일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을 알아서 그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신앙상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근본적으로 어려운 것은 신앙적으로 이런 일을 할 때마다 자신을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참 어렵다. 자신을 비우기보다 언제나 내가 무엇을 만들어서 주 앞에 드리는 쪽이 훨씬 더 떳떳하고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쪽을 택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동업하려 하지 결코 순종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제일 어렵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인이시다. 그분이 우리 주인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사랑하되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가 우리의 모든 기쁨이요 모든 소원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 라(고전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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