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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과 들보 (마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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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5장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어떤 영적인 상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신 것이라면 6장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7장은 어떻게 생활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 복음 5,6,7장을 산상보훈이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현대인들은 삶에 대해 굉장한 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안락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까 또 나만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준비보다는 오늘의 안락한 삶에 대해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어 집니까
마음에 의해 결정되어집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생활의 방향이 결정되어집니다.
마음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어 집니까 영적인 상태에 의해 결정되어 집니다.

그 사람의 생활을 잡고 들춰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드러나고, 마음을 들춰보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나타나게 됩니다.

왜 청소년들이 범죄가 자꾸 늘어만 갑니까 세월이 흐를수록 사회가 불안하고 그들의 장래가 불안하고 마음이 불안하니까 범죄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아무리 법을 만들어 뇌물을 받고 부정을 저질은 사람들을 처벌을 하고, 대통령이 돈 한푼도 안 받겠다고 해도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무슨 수를 써도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개혁이 되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니까 개혁이 안돼는 것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하도 돈을 많이 받아 놔서 지금 대통령이 돈은 안 받는다고 해도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믿지 못합니다. 정부를 신뢰하지 못합니다. 노동자는 기업을 믿지 못합니다. 기업은 근로자들을 믿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안 바뀌면 개혁은 실패입니다.
부정과 부패를 개혁한다고 소리치지만 부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안 바뀌니까 개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영적인 변화가 오기 전에는 바뀌지 않습니다.
진정한 개혁은 영혼에서 부터 시작되어집니다. 사회제도가, 정치가 개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개혁은 교회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사람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교회가 잠자고 있는 한 개혁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영혼의 변화가 없이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고 마음의 변화가 없이는 생활의 개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역사를 보면 사회 개혁은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 요시아왕, 느헤미야 시대, 중세의 루터나 칼빈의 종교개혁이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처음 가르치면서 영적인 변화를 먼저 말씀하시고 마음의 변화와 생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고 싶습니까 삶의 변화를 가져오고 싶습니까 가정의 변화를 가져오고 싶습니까

영적인 변화를 먼저 시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예배 시간 빠지지 말고 충실하게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들이십시오, 하나님에게 감사하십시오, 십의일조를 하나님에게 드리십시오, 봉사하지 못해쓰면 봉사를 하십시오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마음의 변화와 생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생활의 변화는 마음에서부터 일어나고, 마음의 변화는 영혼의 변화에서 시작되어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기를 소망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원하는 변화를 가져오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향한 마음에 변화가 와야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에 변화가 와야됩니다. 내가 변해야 교회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영적인 변화가 없이 교회가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은 허공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들의 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까

1.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던 우리들이 이제는 비판하지 안는 성도로 변화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적인 변화를 가져고 마음의 변화를 가져와서 비판하지 않는 성도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잘못한일을, 실수한 일을 책망하고 꾸짖을 지라도은 할지라도.
책망과 꾸짓음에는 애정과 사랑이 있지만 비판에는 미움이 잇고 정죄가 더나아가서 저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판이란 무엇입니까
비판 (κρνω)-법적인 용어로 심판하다, 재판하다. 판단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좀더 강한 의미는 “정죄 하다. 저주”입니다.
재판관이 재판석에 앉아서 후회할 수 없는 전혀 틀리지 않는, 마지막 최후의 판단과 형별을 가하는 것이 크리노의 원래 의미입니다.
마태는 이 단어를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공의의 심판, 혹은 판단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말을 우리들 서로서로 인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혹은 판단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서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을 대수롭지 않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떻게 생활을 해야 하는가에 첫 번째 주제로 등장시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비판이 왜 이처럼 무서운가
왜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1) 심판은 ,판결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판을 한다는 것은 이미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자서 나는 옮고 당신은 틀렸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똑 같은 피조물입니다.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습니다. 허물과 실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찌 우리를 판단할 수 있습니까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습니까
옳고 그름을 선언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는 안되기에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공의의 판단을 하시지만 우리들은 공의의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감과 편견에 따라 판결하기 쉽습니다., 진리보다는 감정에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절대적이지 못하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가 아니라 누구는 이렇고, 누구는 이렇습니다의 식입니다.

3) 비판은 비판의 악순환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마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판은 비판을 낳고, 비판은 또 비판을 낳습니다.
내가 비판을 하면 나의 비판을 들은 사람이 또 비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비판은 반드시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눅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4) 비판의 근원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책망하고 또 책망하기 이전에 용서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를 위해서, 그의 영혼을 위해서
사실을 말하는 것과 비판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왜 비판을 하게 되는가
비판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판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나에게 들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7: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들보(δοκ, 도코스)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집을 받치고 있는 가장 중심되는 기둥을 말합니다. 떠받치다, 지탱하다, 붙잡다에서 온 말입니다.

형제에게 있는 티를 보게하고 그것을 나로 하여금 뻬 내게하라고 너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를 그런 사람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가 보는 것이 아니라 네 안에 있는 그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뻬 내라는 것입니다.

내 눈이 그 무엇이라는 들보에 가리워서 나 자신도 올바로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참 모습도 보지 못하게하고 티를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한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판하게하는 나쁜 들보가 내 눈을 가리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내 눈에 나도 모르게 그런 나쁜 들보가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들보(δοκ, 도코스) 라는 말은 받아 드리다, 영접하다(δεχομαι)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비판하는 말을 듣고 보고 조금식 조금식 받아 들이고 나도 한 마디 하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비판하는 들보가 나에게 생기다는 말씀입니다..
비판하지도 말고 비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지도 말아야 들보가 생기지 않습니다.

나에게 들보가 있으면 나도 모르게 상대방의 티를 보고 비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들보가 없으면, 상대방의 티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은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를 나타냅니다. 내 마음은 나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무엇이 나를 붙잡고있는가 무엇이 나를 떠받치고 있는가
내 영혼이 무엇인가에 붙잡혀 있으면 그가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것입니다.

자기에게는 들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나로 너에게 있는 티를 빼게 하라는
것 자체가 외식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맺는 말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말씀은 자기에게 있는 들보에 의해서 비판하는 자들을 개와 돼지에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종교의 지도자들이 였습니다. 자기들에게 있는 들보에 의해서 예수님을 비판했고, 연약한 백성들을 정죄했습니다.

요 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롬 2: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롬 2: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고전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고전4: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고전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좋은 교회는 영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교회입니다.
좋은 성도는 비판 보다는 권고를 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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