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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의 삶 (요일 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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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께서는 본문 서두에서 그가 직접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목도한 것, 그가 두 눈으로 똑똑히 주시하여 보았고 두 손으로 만져 보았던 그 무 엇에 대해서, 그가 직접 체험해 보았던 그 무엇을 전하려고 한다고 말씀합니 다. 그가 직접 체험해 보고 말하자면, 직접적인 촉감으로, 감각으로 체험하 고서 전파하려고 하는 내용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에 의하면 이 생명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 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2)

사도 요한이 이 생명의 말씀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었던 것은,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 께 존재하셨으며 온 세계의 생명 되신 성자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 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을 입고,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의 경 험영역 안으로 들어오셨고, 우리에게 계시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체험할 수 있었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 에게 나타나시어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셨으 나 이 생명의 말씀은 이 세상에 속한, 이 땅에 속한, 이 창조질서에 속한 무 엇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시요 즉, 피조계에 속한 분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시요, 우리가 받 아 누리는 생명은 바로 그 성자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 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 이라"(요일 1:3)

우리가 받아 누리는 생명 또 이 생명을 주신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굳이 너희에게 전파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너희들도 우리와 함께 코이노니아, 사귐, 교제를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이 교제는 보통 교제가 아니요 우 리가 누리는 생명을, 참된 생명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교제입니다. 따라서 이 생명에 대해 또 생명의 말씀에 대해 굳이 너희에게 전하려고 하는 목적 은 우리가 누리는 이 생명을 여러분도 함께 받아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 씀입니다. 왜 우리가 이처럼 우리가 누리는 이 생명을 너희도 누리기를 원하 는가 하는 그 이유는 우리에게 계시된 이 생명은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 요, 만인에게 개방되어 있고 가능한한 모든 사람들을 이 생명에 초청하여 누 리게 하려는 목적을 위해 주어진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도 요한은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누리는 사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 누리는 사귐, 여러분들을 초청하여 함께 나누 기를 원하는 이 성도의 사귐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라고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교회의 사귐, 성도의 사귐은 더 깊은 근원에서 생겨 난, 더 깊은 토대 위에 세워진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사귐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선 성도의 교제는 인간적 차원의 사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교를 위한 모임도 아니 요, 정치토론장도 아닙니다. 매력적인 사람들을 만나서 재미있는 이야기와 담소, 우리의 흥미와 관심을 끄는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어떤 근본 전제를 가지고 있는 인간적 차원을 넘어 더 깊은 근원과 토대를 가진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그 생 명을 전제와 토대로 하는 사귐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이 생 명-물론 이 생명의 성격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형식과 틀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날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사귐의 토대 위에서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 1:4)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수반하는 기쁨 즉, 참 생명을 누리는데서 얻 는 기쁨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기록한 목적 자체 가 우리의 사귐을 통해 즉,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를 함께 받아 누림으로써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5:13에 보면 다음과 같 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믿는 자 로 하여금 이러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음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리하여 그 생 명을 누리면서 얻는 기쁨이 우리들 가운데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다고 사도 요한은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 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과의 사귐,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의 특성에 대해 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는 이 생명의 교제의 특성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먼저 이 생명의 사귐의 가장 근본 대상이신, 상대자이신 하나 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결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상 가운데서 계시하 신 빛 처럼 밝히 드러내신 하나님의 모습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 리는 하나님과 맞닥뜨리는, 하나님과 만나는 삶의 모든 순간과 장소에서 오 직 환한 빛만 볼 수 있으며, 어떤 더듬의 조각이나 그림자도, 티나 주름잡 힌 곳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과 만난 순간이 있습 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모든 순간과 삶의 장소에서 하나님은 환한 빛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전혀 없으십니다.

 디모데전서 6:15-16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 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그 귀 한 성결의 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 님을 보고서 살 자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 심을 목도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고 그는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망하였구나, 모세와 같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하나 님과 대화하였던 사람도 오직 하나님의 뒷 모습의 영광만 볼 수 있었을 뿐입 니다. 따라서 죄로 얼룩지고 더러워진 타락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오직 그리 스도의 의를 의지하고서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의지하고서만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 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스스로 이처럼 성결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 님과 생명의 사귐을, 살아있는 생명의 사귐을 누린다고 말을 하면서도 어두운 가운데, 죄 가운데 사는 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어찌 공존할 수 있으며, 거룩하

신 하나님과 사귀는 자가 어찌 그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는 어두움의 삶 을 살 수 있겠는가

"저가 빛 가운데에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 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 이요"(요일 1:7)

오직 하나님께서 환한 빛 가운데 계신 것 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할 때 만이 우리는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빛 가운데 살 때, 거룩한 삶을 살 때 하나님과의 사귐, 그 생명의 교제를 계속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 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 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그러나 7절 말씀 중에 한 가지 주의해야할 표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 실 것이요' 하는 표현입니다. 즉, 빛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누리는 성결한 삶이 그리스도의 피로 날마다 정결하게 되는 삶, 용서와 정결 의 삶을 수반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매일 용서와 정결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죄와 더러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매일 용서받 고 정결해 진다고 하는 것은 죄와 더러움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앞 에 말한 것과 전혀 상반되는 상충되는 말씀입니다. 죄짓지 않는 성결한 삶을 사는 자만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다고 해놓고서 이제와서는 용서와 정결 이 필요하며 그와같은 용서와 정결이 수반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역설적인 말씀을 다음과 같은 질문의 시각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 다. 왜 여기에서 성결한 삶을 사는 자만이, 빛 가운데 사는 자만이 하나님 과 생명의 교제를 누린다고 해놓고서 왜 그와같은 생명의 교제를 누리는 삶 에 용서와 정결하게 함이 수반된다고 이야기하는가 전혀 앞뒤가 맞지않는 말인 것 같지만 이 역설적인 말씀을 다음의 질문의 시각에 비추어 생각해 봅시다. 예수 믿는 사람은 믿은 후에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가 믿다가 범 죄하면 영영 어두움 속으로 떨어지는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단절되는가 이 와같은 질문의 시각에서 앞에 말씀드린 역설적인 말씀을 바라본다면 비록 외관상 역설적인 말씀으로 들릴지는 모르나 이해가 가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아직까지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입장에서는 두 가지 말씀이 다 필요하다 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8절 말씀은 이와같은 질문에 대해 우리가 죄없다고 함은 스스 로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그 안에 있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앞에서 죄짓는 생활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해놓고서는 여기서는 전혀 뒤집어서 만일 우리가 죄없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죄를 완전히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따라서 아무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생명의 교 제를 누릴 수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짓는 생활과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는 것 처럼 죄짓는 생활 가 운데에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에 충실하자고, 그러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불신자거나 신자이거나 간에 하나님과의 거룩한 생명의 교제를 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정결하게 하시리라고 하 는 이 말씀은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거룩한 하나님 앞에, 어두움과 죄와 더러움이 도저히 설 수 없는 그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이 열려있음을

뜻합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의 용서와 정결케하심 으로서만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계속 누릴 수 있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나 불신자에게나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그 하나님, 어두움이 한 조각도 없으신 그 하나님, 그 거룩하심에 접하고서 '나는 망했도다'하고 고 백할 수 밖에 없었던 그와같은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서만 그의 용서와 정결케 하심을 의지하고서만, 우리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 과 생명의 사귐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어 이 생명의 교제로 들어온 신자에게 지금 드린 말 씀은 또 다른 방향의 오해를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 그리스도 안에는 죄사함이 있으니 그저 죄짓고 회개하면 될 것이요, 적당히 편리하게 살면되지, 죄짓지 않기 위해서 아둥바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또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 지라도 나는 그래도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남에게도 이야기하고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은, 자기 스스로까지 속여서 생각하기를 나는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한다고 하지만은 실제로는 적당주의와 편리주의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말씀 이 경계하는 것은 습관적인 범죄, 6절 말씀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여기서 '행하며'라고 하는 말의 원어를 보면 현재 가정법이 쓰였는데 이것은 그저 한 번만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거하는 삶을 뜻한다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의지해서 성경이 경계하는 것은 습관적인 범죄, 계속 죄짓 는 생활에서 떠나지 않는 경우를 경계한 것이요, 어쩌다가 실수 한 것까지 책망하는 것은 아니니 그저 우리는 계속 죄짓는 생활에만 빠지지 않으면 된 다고 편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아무리 사소한 것 일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반역인 만큼 그 죄의 사인이 아무리 가볍 고 경미한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어느 것을 택해서 죄쪽을 택한다고 그러 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하나님께 등을 돌려대는 일이요,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버리는 일인만큼 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기 전에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가 손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짓고 나면 마음이 편해요 죄를 지으면 생명의 교제를 누리는 기 쁨이 떠납니다. 따라서 참으로 믿는 자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 한 자라고 한다면 비록 사소한 죄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인 만큼, 하나님을 버리는 것인 만큼 이로 인해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 을 느끼게 되며,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에서 단절된 듯한 죽 음과 어두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시체는 아픔을 모릅 니다. 칼로 찔러도 때려도 모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도, 생명이 없는 자 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은 아무리 죄를 밥먹듯이 먹고 지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가 죄인줄 모릅니다. 자기 입으로는 죄라고 하면서 도 마음에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 있는 몸은 아픔을 느끼듯이 영적 생명을 소유한 자라고 하면, 참 믿음의 소유자라고 하면, 죄 로 인한 아픔과 고통을 느끼게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 몸은 여러가지 지체 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지체는 주사바늘로 찔러도 아프지 않은 둔 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우리 눈 처럼 예민한 부분은 조그마한 티끌만 들어 가도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느끼듯이 예민한 영적 생명을 소유한 사람, 하나 님과의 사귐을 더욱 깊이 풍성히 누리는 사람일수록 사소한 죄까지도 주 앞 에 마음을 찢으며, 고통을 느껴 괴로와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회개하는 반 면, 영적으로 둔한 사람일수록 그 고통이 약한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그 느낌이, 자책의 고통이 점점 둔해진다고 하면 하나님과 누리는 생명의 사귐 이 병들었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은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 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 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비록 신자라 할지라도 죄를 완전히 피할 수 없으며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도 회개하는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사귐을 계속 누리게 하는 그리스도 의 용서와 정결케 하심이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이, 결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좋다는 면허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죄를 가 볍게 생각해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이 말씀이 분명히 말씀합니다. 아무리 사 소한 죄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죄입니까 물론 그 객관적인 근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 니다만은 가장 기초적으로 죄를 판별하는 법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 꿇어 과연 이것이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그에 대한 확답이 없 으면 그것이 죄인 것입니다. '과연 주께서 이것을 기뻐하십니까' 그에 대 한 자신이 없이 행동하는 것이 모두 죄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죄라 할지라 도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생명의 교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생명의 교제를 소중히 여기는 자라 그러면 목숨을 걸고 죄를 피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죄를 지은 경우, 범죄한 것이 기정 사실화 된 경우 에는 이로써 모든 것이 끝장났다,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이런 죄를 범 했으니 어찌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절망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기억하라, 온 세 상 죄를 속죄하고도 남을 구속을 이루시는 그리스도,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 라 할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실 수 있는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 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 라"(요일 2:3-6)

그러면 우리가 그를 알았고, 그 안에 있고, 그 안에 머문다는 사실 즉, 날 마다 끊임없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명의 교제를 누리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무엇을 보고 우리가 그와같은 생명의 교제를 누린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 그의 말씀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께서 그와 더불어 우리로 하여금 함께 받아 누리기를 원하 는 것이 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성경은 이 참 생명, 영생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 또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하는 등의 표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믿는 것, 아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무엇에 대해 아는 지식, '아! 그렇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은 지식의 내용과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만의 무엇은 아닙니다. 생명의 토대를 둔, 생명과 관련 된 지식은 '아! 그렇구나' 하는 바로 그 속에 지식과는 다른 무엇인 생명의 움직임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갖는 인격을 믿는다고 하는 것, 인격를 안다고 하는 것은 차디 찬 비인격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 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인격 안에 나 자신을

던져 넣는 것을 뜻하는 것이요, 쉽게 표현하면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을 뜻하 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수학 공식을 안다는 그 뜻과는 달리 내가 내 아버 지를 안다, 내 어머니를 안다고 하는 그와같은 앎인 것입니다. 앞에서 그리 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사귐이라고 하는 형식과 틀 안 에서 우리가 받아 누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다는 말씀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의 사귐 안에 들어가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누린다고 하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날마다 인격적 사귐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 릴 수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그와 하나되어서 누리는 사귐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누릴 수가 없는 것 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우리에게 있어서 성령님을 통해서 이 루어집니다. 성령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 와의 사귐을 우리는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가능케 하시는 이 성령님의 생명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 이 아닙니다. 비록 미약한 신앙이어서 겨자씨 같이 아주 적은 믿음, 미약한 움직임이라 할지라도 참 믿음을 가진 자는 이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 니다. 이 생명의 움직임이 우리의 인격과 심령과 삶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한 생명의 움직임이, 이 생명의 역사가 우리 인격과 심령과 삶 을 변화시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구원얻은 사람이 아닙니 다.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요. 10년을 믿어도 좋고 50년을 믿어서도 좋습니 다. 그러나 이 생명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꾸 며댈 수도 있고요, 말로는 나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다른 사람은 그 말에 대해 아무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그러 나 하나님은 아시고 그 사람도 압니다. 과연 내 속에 그와같은 생명의 움직 임이 있는지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 을, 자신의 심령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 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믿는 너희로 하여금 이 영 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 이 말씀은 한편으 로 보면 매우 미약한 신앙인 경우, 그 생명의 움직임이 너무 미약해서 감지 하기가 힘든 경우,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참되다고 하면, 내가 이 생명을 소유하였다고 하니 비록 미약한 느낌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참 새 생 명이구나, 세상이 주는 생명을 내가 밥먹고 사는 그 생명과는 다른 무엇, 어떤 참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확신케 하는, 연약한 믿음을 도우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말한다면 이와같은 생명이 없는 자는, 이 생 명의 움직임이 없는 자는 믿는 자가 아니요, 한 때는 믿었다 할지라도, 믿는 척 했다 할지라도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내 속에서 성령님의 생명의 움직임이 충만한가 아니면 정말 죽은 믿음 처럼 쓰러져 없어졌는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 다. 다른 사람이 말해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심령 을 들고 하나님께 물어보시고 여러분 심령을 스스로 들여다 보시기를 바랍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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