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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수를 갈망하는 사람들- (요 0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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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지방에서 도보로 먼길을 여행한다는 것은 고통스런운 일입니다. 지침, 배고픔, 갈증 이 세가지가 여행자에게 고통을 줍니다. 이 세가지 중에 어느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아마도 갈증일 것입니다. 뜨거운 여름날에 긴 도보여행 끝에 목이 갈한 한 남자가 우물을 발견하고 또 마침 그곳에 두레박과 물동이를 가지고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을 만나게 되어 물을 한잔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하필 목이 갈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물 한잔 달라는 것이 그리 무리하거나 무례한 청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여인의 친절로 그 여행자는 갈증을 해결했다는 자연스럽고 평범한 이야기로 끝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목말라 보이던 여행자에게 물을 두레박 채로 물을 마시우게 함직합니다. 어떤 이유라도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물을 마셔야 한다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를 물리칠 만한 이유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야기는 전혀 의외로 전개됩니다. 그 여인은 의외로 그 여행자의 청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사람이면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제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이것이 목이 갈하여 물 한잔을 청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여인과 이 낯선 유대인들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불신하고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한 것이 아니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중요한 종교적 이유가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넘지 못할 높은 불신과 적대의 장벽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 땅을 디디지 않을 정도로 사마리아를 부정하게 보았고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을 억압자로 보았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들렸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 사마리아 여인과 유대인 남자 사이에는 여자와 남자라는 관계가 있습니다. 당시 풍속에는 여자와 남자가 우물과 같은 장소에서 단독으로 만나거나 말을 나눈다는 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수작'을 거는 불건전하고 부도덕한 행동으로 생각할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볼때, 이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청하는 유대 남자에게 쌀쌀맞고 불친절하게 대한 것은 이해되는 일이라 할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목마른 나그네에게 물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좀 심한 처사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끼 역시 엉뚱했습니다. '만일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았다면, 만일 그대가 그대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다면, 도리어 그대가 그에게 생수를 달라고 청했을 것이고 그는 그대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은 목마르지 않은 것같이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갈증을 인정하거나 해결하는 대신에 거꾸로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청해야 할 쪽은 그 자신보다도 오히려 두레박을 가지고 우물을 통째로 가지고 있다시피한 그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수를 줄수 있는 쪽은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이는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다른 종류의 갈증이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 갈증을 해결하는 물도 두가지 종류가 있는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체적 갈증-이것은 예수님의 갈증이었습니다-이 있고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전혀 다른 종류의 갈증-그러나 더 중요한 갈증-을 가지고 있음을 예수님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었입니까 본문에 이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이 어떤 것인가를 명시적으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그 여인 자신이 어떤 종류의 갈증을 느꼈다는 것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그 여인 자신이 어떤 종류의 갈증을 느꼈다는 것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만일 그대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나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고 나는 그대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데에서 이 여인이 갈증이 있다고 암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뜻을 제대로 이해했는가는 본문을 보아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크게 호기심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 여인의 그 다음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주님, 그 물을 제게 주셔서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 다니지 않도록 해 주십시요.(15절)" 이 여인의 말을 빈정대거나 냉소적인 말이라고 볼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더 이상 단순히 낯선 한 유대 남자로 여기지 않고 있을뿐 아니라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사롭지 않는 사실을 보아서 그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이 '선생님'이란 칭호는 단순히 우리 사회에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부르는 칭호는 아닙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을 부를 때와 같은 "주님"이라는 칭호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이 말씀하는 생수의 의미를 알고 그런 생수를 청했다고 보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비록 그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보다도 더 생의 갈증을 느꼈던 것을 여기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행복한 가정이 없었습니다. 생사 고락간 모든것을 함께 나누면서 일생을 함께 살아가는 생의 동반자인 남편도 없습니다. 다만 그때그때 일시적으로 동거하다 헤어지는 남자들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여인에게 부모도 자녀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만하면 아주 불행한 여인임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러한 여인에게 생의 목마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에 대한 목마름, 안정되고 행복한 생에 대한 목마름, 사회적 떳떳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살수 있는 신분에 대한 목마름, 생의 의미에 목마름,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목마름, 등등 온갖 목마름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육적, 영적 목마름이 있었다고 보이고, 그것은 개인적, 민죽적 목마름, 등과 섞인 것으로도 보입니다.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이 여인이 가진 목마름은 영적 목마름, 종교적 목마름, 메시아에 대한 목마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 시점에서 예수님을 보고 '제가 보기는 당신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곳 그리심산에서 예배해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시온산(예루살렘)에서만 하느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는 산에서 하느님을 에배해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예수님에게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목마름이고 영적 목마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 여인은 예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란 메시아가 올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일러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모순과 문제의 해결을 민족의 통일에 걸고 통일에 대한 목마름으로 살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 같이 당시 로마 제국에 의해 억압 받고 있던 유대 민족은 민족해방과 그것을 주도할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목마름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피억압민족 중에서도 지배계층과 정통 유대인들에 의해 다시 이중적으로 억압과 차별과 소외를 당하고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목마름이 더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 여인은 여자라는 이유로, 그것도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로 3중, 4중으로 천대받고 차별 당하는 처지여서 이 여인의 목마름은 신체적으로 목마른 낯선 남자의 목마름이 무색할 정도로 비참할 정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여인의 목마름을 간파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체적인 목마름을 잊은채 이 여인에게 영적 갈증을 채워주기 위하여 진지하게, 또 긴장한 채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못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여인아, 내 말을 들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니 그에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셨고,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실 것입니다"고 대꾸한 그 여인에게 "그대와 말하고 있는 내가 그이다"고 바로 말씀을 했습니다. 아마도 실제로는 여러가지 말을 더했을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세한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이 여인의 영적 눈이 열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낯선 유대인 남자의 모습을 한 분이 그가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임을 알아 보게 됩니다. 그때 그는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로 뛰어갑니다.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이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아를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알아보고 그전에는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으로 목마른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정작 메시아가 찾아왔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모습으로, 뚜렷한 표가 없이 메시아가 그를 찾아 왔습니다. 그를 마주하고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고 말합니다. 절호의 기회입니다. '예, 그 생수를 제게 주십시요'라고만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 가련한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딴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에게 생수를 줄수 있는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이마에 메시아라고 써 놓지 않았으니까 쉽게 알아본다는 것은 기대하기 무리했다고 할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와의 짧은 대화이기는 하지만 그분이 보통분이 아니라는 것은 속으로 짐작을 하면서도 그가 자신을 목마름으로 축여 줄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가 그에게 생수를 줄 수 있는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이유들이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말하는 데에서 볼 때, 적어도 세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체째는 인종적 장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는 외형적으로 유대인으로 보였습니다. 사마리안인을 억압하는 인종집단의 한 사람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가 영원한 생수를 줄 수 있는 메시아로 믿지 못합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이면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제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또 여성과 남성 사이에도 높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이 양자 사이에 있는 넘지 못할 높은 불신과 증오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종적, 종교적 장벽이 편견으로 되어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가 그에게 생수를 줄 수 있는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믿지 못한 이유는 우물은 깊은데 생수를 줄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 이 예수가 두레박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생수를 주겠다고 하면 그럴 만한 도구를 가지고 있어야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고 있으니 이 여인이 믿을리 없습니다. "당신은 물 길을 두레막도 가지시지 않았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제게 생수를 주시겠습니까"(11절)라고 반문합니다. 이것은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는 우리들의 판단 기준이 진실을 보지 못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이 낯선 유대인 남자는 사마리아인들이 조상이라고 숭상하고 있는 야곱보다 위대할 수 없다는 전제적인 '신앙'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 전제가 분명히 이 여인의 눈을 어둡게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우리의 조상 야곱보다 위대할수는 없다'는 것, 이것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 교리이고 '민족적' '신앙'이라고 까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종교적 민족적 '신앙'에 가까운 메시아 상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배척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평범하게 생긴 이 낯선 남자가, 결코 야곱보다 위대할 수 없는 초라한 이 남자가 무슨 생수를 내게 줄 수 있겠는가 라는 불신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화가 진전하면서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와 말하고 있는 그와 말하고 있는 그 남자가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사마리아 사람들과 그 여인이 믿고있는 그들의 위대한 조상 야곱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와 대화하는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과 비슷한 말은 하지만 그보다 나을 수는 없다는 어떤 전제적인 생각이 이 여인이 예수를 불신하게 된 근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마지막 순간에 그 낯선 남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메시아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물을 제게 주십시요. 그리하여 제가 다시 목마르지도 않고 이 무물에 물을 길으러 올 필요가 없도록 해 주십시요"라는 말을 예수님에게 합니다. 이 여인의 청은 상당히 상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여인의 말에서 오늘 현대인들이 목이 말라 생수를 가람자하고 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목마름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마치 신체적인 장애와 제약이나, 질병처럼 되어 사람의 건강과 성함을 막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사이비 종파가 많고 그 사회적 폐해가 지적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 안팎에서 사이비 종교를 단속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의 깊이를 보아야 합니다. 단속을 하여야겠지만 단속이나 처벌이라는 행정력으로나 공권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목마름이 있는 것을 기성교회들이 채워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이비 종파와 이단 종파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 사실이 현실 교회를 비판하고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 오실때를 전후하여, 또 그가 세상을 떠나신 후 유대땅에 사이비 메시아 운동이 횡행햇습니다. 그래서 민심이 흉흉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경험이 많습니다. 오대양 사건과 휴거소동과 같은 것들도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목마름을 유대교가 채워주지 못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 동포들의 목마름을 우리 교회가 채워 주지 못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오늘 많은 현대인이 그런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처럼 생수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리처드 블랭카드(Richard Blanchard)가 그의 감동적인 신앙시로 표현했습니다. "주님, 저의 잔을 채워 주소서"라는 시가 곧 그것인데 이 시는 많은 신앙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직역을 하여 소개하겠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 저는 만족시킬 수 없는 것들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 그 때 저는 저의 구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씁니다:'마르는 법이 없는 나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라.' / 주님, 저의 잔을 채워 주소서 / 주님 제잔을 듭니다 / 오셔서 저의 영혼을 축여 주소서 / 하늘 떡으로 / 배부를 때까지 저를 먹여 주소서 / 제 잔을 채워 주소서 / 제 잔을 채워 주시어,/ 저를 온전하게 만드소서."
이 신앙시는 우리말로 번역되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애창되고 있습니다. 본래 시에서 "채워 주지 못하는 것들"이란 표현을 "헛되고 헛된 것들"이라고 의역을 한 것 이외에는 대체로 충실히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갈증의 뜻을 다소 희석시킨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번역된 가사도 우리들에게 매우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캐트린 핏셔(Kathleen Fischer)라는 여성 신학자는 여성 신학적 시각에서 해석하여 현대 여성들도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생수를 목말라 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현대 여인들은 생수에 목말라 하고 있다. 그들은 우물가에 서서, 고대 전통으로부터 생을 물길으려 희망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지혜, 능력, 창조성과 힘의 원천인 그들 자신들의 내적 우물을 발견하고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을 만나려고 염원하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비전과 희망의 옹달샘이기를 원하고 그들의 선물을 사용하여 그들의 공동체와 세계 공동체를 변화시키기를 원하고 있다."주1)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에 경험했던 온갖 생의 목마름이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축여졌음을 이 사마리아 여인은 경험했습니다. 목이 말라 목타는 사람이 생수를 한 잔을 더 마셔 시원하게 된 것처럼 이 여인은 그런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치유와 함께 그 자신의 신성함을 발견한다."주2) 사마리아 여인이 마신 예수님의 생수는 어떤 물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면, 다시는, 아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고, 그 생수를 마시면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로 나와서 그의 생수로 우리의 갈증을 해갈하십니다. 목을 축인 사람들은 목이 갈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이 샘물에로 데리고 오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언제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 6: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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