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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가 회복되는 자리 (롬 08: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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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들이 맛보고 경험한 세계를 표현하는 중에는 종종 '기적'이라는 말이라든가, '신비'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범상치 않은 말들이긴 합니다만은 이런 단어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그는 신앙인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자연과학이 발달했다하지만은 여전히 '기적'이라든가 '신비'라든가 하는 단어들은 퇴색되어갈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리 썩 긴 기간은 아닙니다만은 한 15년 동안의 목회를 해오는 동안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일들을 때때로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려서 그저 하늘만 쳐다보던 교인이 건강을 되찾아 일어서는 경우도 보았고, 불가능한 것 같았던 일들이 가능케 되는 그런 일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이성적으로나 합리적으로는 설명 불가해한 그런 일들이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확신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종교인이 아니고,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앙인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비로운 경험을 한 사람들의 고백 속에 항상 자리하는 또 하나의 단어가 있는데 그게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한결같이 확신하는 것은 그 '기적'이라는 단어와 '신비'라는 단어는 그 '기도'라는 단어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더 이상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우리 믿는 자들은 다 이해할 줄 압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경험을 했고 또 우리 믿음의 형제들에게서 그런 경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이 세상인데 때로 불가능한 것이 가능케 될 때 그것은 이 세상 밖의 어떤 외부적 힘이 작용한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체험자에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삶의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 모두의 고백 속에는 거의 십중팔구 이 '기도'라고 하는 것이 언급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종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런 고백을 우리 스스로가 하고 있고 또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학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리고 현상학적으로 명쾌히 설명할 수 없는 '불가능의 가능'을 경험하면서 한 가지 던져보고픈 질문이 제게 있었습니다. 그 질문이란 '그 기적이 과연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 그 자체가 가능케 한 것인가 아니면 기도하는 사람 즉 기도자에 의해서 가능해진 것일까... 분명 기도가 기적을 낳았지만 기도 그 자체가 기적을 창조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 그 기적을 만들어낸 것일까... 저는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좀 궤변이나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셔서 하나님에 의해서 기적이 만들어진 것 아닌가, 뭘 간단한 것 가지고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정답 중에 정답입니다. 분명코 하나님이 그 기적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런 기적으로 응답하셨나 하는 겁니다. 기도한 사람 때문일까 기도의 내용 때문일까 도대체 하나님의 기적의 응답을 가능케한 바로 그것이 무엇일까 아무 것도 아닌듯 하지만 곰곰 생각하면 그것도 말이 되는 애기입니다. 왜 이렇게 복잡한 얘기를 하는가 하면 이것이 규명될 때에 비로소 기도가 지니고 있는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가정해 볼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입장'입니다. 사실 기도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누가 기도하느냐 중요한 물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기도를 듣기 위해서 한 사람만 택해 놓은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택해 놓으셨습니다. 물론 예언자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만은 그렇다고 평범한 사람들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목사의 기도를 들으시지만 그렇다면 평교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가 샤마니즘과 다른 점입니다.
성경에 보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까 블레셋왕 아비멜렉을 축복하는 아브라함의 기도도 있고, 장가를 가기 위해서 기도하는 이삭의 간절한 기도도 있고, 형의 복수를 두려워 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야곱의 애타는 기도도 있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모세의 중보기도, 범죄한 뒤 참회하는 다윗의 회개기도,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올리며 기도하는 솔로몬의 봉헌기도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사람에 의해서 드려지는 수많은 기도가 성경엔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100% 다 저들의 원하는대로 이루어졌느냐 하면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그 예를 몇가지 본다면 하나님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좀 들어가게해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고 또 다윗이 살아 생전에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는 기도도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기록한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몸에 있는 질병을 좀 더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서 제해 달라했지만 하나님은 '그만 하면 됐다'고 일축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나 다윗이나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못해서 저들의 소원대로 응답해 주시지 않으신 겁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고 기적을 일으킨다'는 말은 맞는 말이긴 하지만 100% 맞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 두번째는 '그 기도의 내용 때문에 기적을 베푸신다'는 가정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종류는 실로 다양합니다. 축복기도도 있고, 탄원기도도 있고, 중보기도도 있고, 찬양기도도 있고, 감사기도도 있고, 봉헌기도도 있고, 심지어 저주기도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기도의 유형을 정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보스턴대학의 종교심리학자인 폴 존슨(Paul Johnson)이란 사람이 이 모든 기도의 형태를 모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를 했습니다.
그 첫째 유형을 그는 '신비적 기도'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영혼의 깊은 요구와 내 삶의 필요를 위하여 하나님과 단독으로 그리고 수직적인 대화로서 교통하는 기도의 행위를 이르는 말입니다. 일종의 개인기도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개인이 하나님과 깊이 씨름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속하는 것으로는 탄원기도를 들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신비적 기도'를 성경에서 찾는다면 바로 시42편과 같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 나의 영혼이 주를 찾아 헤매옵니다. 나의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목말라 사모하오니 내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이르러 뵈오리까..."이것이 바로 신비적 기도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두번째의 기도 유형을 그는 '예언자적 기도'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초점이 '나'로 부터 '너'에게로 옮겨진 기도를 말합니다. 신비적 기도는 자신을 놓고 기도합니다만은 이 예언적 기도는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버림받은 자, 고난 속에 있는 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자, 그러한 '너'를 위한 중보기도를 말합니다. 조금 더 확대한다면 사회개혁을 촉구하고 '민중'들의 유익을 위하며 공의를 소망하는 기도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면 바로 아모스 선지의 기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정의를 하수같이 공의를 물같이 흘릴찌로다..." 또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이렇게 남을 위한 기도가 바로 '예언자적 기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기도 유형을 폴 존슨은 '제사장적 기도'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 제사장적 기도란 바로 예배의식 속에 행해지는 기도입니다. 우리 개신교에는 예배의식 속에 기도문이 별로 없습니다. 고작해야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나 성공회 동방정교회 등은 참으로 많은 의식기도문이 많습니다. 제가 전에 휴가 때에 예배의식을 좀 연구해야 되겠다 싶어서 서울 덕수궁 옆에 성공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는데 무슨 기도문이 그리도 많고 의식이 많은지 앉았다 일어나기를 수 차례, 사제가 뭐라고 기도하면 또 그 톤에 따라서 뭐라고 응답을 해야 됩니다. 어떤 것은 책을 보고 하고 어떤 것은 그냥 하는데 도대체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바로 제사장적 기도입니다.
이 제사장적 기도는 개인의 요구나 사회개혁이 그 초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통과 권위에 의하여 올바른 말과 표현으로 정리된 예문을 정중하게 암송하는 종교의식적 기도입니다.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형식화되기가 쉽습니다. 좋긴 좋은데 이런 약점이 있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주문에 그칠 위험이 있는 겁니다. 사실 개신교 안에도 주보에 참회의 기도를 공동기도문으로 적어서 함께 기도하는 교회들도 많습니다만은 저는 그렇게 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식화, 형식화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냥 제가 참회의 기도를 함께 느끼면서 드리곤 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이렇게 구분한 폴 존슨의 지적이 뭐냐하면 오늘의 교회와 기독자의 삶 속에 커다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게 뭔고 하니 개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신비적 기도'나, 사회의 회개와 개혁을 부르짖는 '예언자적 기도'는 사라져 버리고 오직 '제사장적 기도'로 알려진 의식적 기도문과 예문만이 남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공중기도'만 남았지 '개인기도'는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와서 기도시간에 마지 못해 참여하는 기도만 있지 정작 개인의 삶 속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비적 기도'나 '예언자적 기도'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폴 존슨이 지적하는 서구교회의 문제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더 이상 서구교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왜 신앙생활이 메말라갑니까 왜 교회가 귀찮아집니까 왜 성경공부다 기도시간이다 하는 것보다 TV 연속극 하나 보는게 더 즐겁습니까 하나님과 자신의 긴밀한 기도인 '신비적 기도'가 사라지고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메말라지는 겁니다.
신자들이 점점 더 이기적이 되어가는 것도 남을 위한 '예언자적 기도'를 상실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와선 '너'를 위한 기도를 합니다. '교회'를 위한 기도를 합니다. '목회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사장적 기도 중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정말 진심으로 너를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목회자들을 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가 있느냐, 그게 중요한 겁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무슨 남을 위해 살 수 있다는 겁니까 그건 거짓말입니다. 기도해야 그를 위해 살 수 있는 겁니다. 목사는 교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장로님들, 권사님들, 안수집사님들은 자기교구의 식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구역장과 권찰은 자기 구역식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사들은 자기반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교회수첩을 펴들고 이름 석자를 한번이라도 불러가며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기도로 인하여 교회학교가 크고, 구역이 크고, 교구가 크고, 교회가 큽니다.
정말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니까 그럼 지금처럼 교회생활 안합니다. 목사를 위해서 기도합니까 그럼 지금처럼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그럼 지금처럼 인간관계를 맺어가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깐 모든게 엉키고 뻑뻑해지는 겁니다. 공중기도만 있고 개인기도는 점점 상실되어간다는데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의 위기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 어떤 소원을 아뢰는 탄원적 기도가 갖는 위험요소가 없지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회의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는 예언자적 기도가 갖는 위험성도 없지 않은게 아닙니다. 자기 욕심이 앞서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킬 수도 있고 개혁만을 강조하다 보면 신앙을 떠나 혁명가로 치우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적 기도'와 예언자적 기도'는 삶과 역사 속에 살아있는 실존적 존재인 나와 하나님과의 생동하는 관계를 형성시킵니다. 갈급함이 있게되고 진지함이 있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가 오늘날에 와서 상실되어 버리고 마니 점점 더 그리스도인들은 '생동감 넘치는 기도'를 잃어버린 맥없는 존재로, 그저 이름만 신앙인인 경우로 전락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왜 그럼 그런 개인기도가 사라지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왜 신자들은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생기도 잃어가고 그러면서도 기도는 하려 들지 않는 것일까 하는 겁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들의 실존적 고뇌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래요. "목사님, 저도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안됩니다." 아마 가장 솔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그분 말씀이 또 이렇습니다. "목사님, 아무리 기도해도, 아니 소리높여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점점 나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듯한 공허감을 느껴요... " 이것 역시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바로 '기도의 역설'이 있습니다. 내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고, 너의 미래를 위해 중보 기도하고, 이 사회와 이 민족을 위해서 예언자적 기도를 드리는 동안 우리는 그 기도의 응답을 내가 쟁취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는 깊은 한계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나 그 응답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데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도, 기도의 언어도, 기도의 표현도 잃어버리고 맙니다. 이건 우리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우리의 경험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못하나"라는 구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도의 불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의 기도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이란 스스로는 기도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접하면서 어떤 기분이 듭니까 절망입니까, 좌절입니까 저는 언젠가 이 구절을 발견하고 뛸듯이 기뻐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기도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이 말씀을 만났습니다. 성경은 그게 당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의 애씀으로 기도가 안되는 것은 이제 참으로 기도하는 단계에 한걸음 더 가까이 왔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자기기도의 절망을 경험한 자가 진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그렇게 받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기도가 다시 가능해질 수 있는것입니까 기도할 수 없는 내가 다시 기도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기도의 신비를 묻는 마지막 질문입니다.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수 없다는 절망을 경험하는 바로 그 자리에 진짜 기도가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의 의미입니다.

그럼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가 26절을 다시 보십시다.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내 생각, 내 소견으로 기도하는 자세를 버리고 성령께서 친히 간구하시도록 자신을 비우는데서 참기도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없지만 우리 속에서 대신 기도해 주시는 성령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합시다'할 때 기다렸다는 듯이 총알처럼 튀어나오는 기도는 진짜 기도가 아닙니다. 적어도 몇초의 머무름 속에 기도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왜 내 기도를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간구하시도록 자기를 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요청되는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때문에 성령께서 기도하시도록 자신을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에 침묵이 흐를 때 어쩔 줄 몰라하며 조바심한다면 그는 아직도 참기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침묵이 의미없는 침묵이라면 모르겠습니다만은 자기를 비우는 과정으로서의 침묵이라면 그건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기도를 그가 이미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참기도인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엔 잘못된 기도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잘못된 기도를 우리 속에서 다 걸러내서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신비입니다. 기도는 내마음대로 기분따라 생각따라 되뇌이는게 아닙니다. 성령께서 간구하시도록 자기를 비우는게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창조되는 언어나 표현이 아니라 우리 속에 영으로 기도하시는 성령의 간구에 대한 감사와 응답일 뿐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기도의 불가능성'이 '기도의 가능성'으로 변화됨을 보는 것입니다.

이제 처음 물음으로 되돌아 가겠습니다. 우리가 때로 경험하는 기적은 기도의 내용 때문도 아니고 기도하는 그 사람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시는 성령의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겁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베푸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오늘 28절 말씀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 아닙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마음이 곧 기도입니다. 기도 못해도 좋습니다. 달변이 아니면 더 좋습니다. 그냥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려 보세요. 성령께서 그 마음에 함께 하시고 가장 최선의 기도를 우리 대신 하나님께 드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잃어버린 기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기도가 회복되는 자리는 역설적이게도 '나 스스로 기도할 수 없음을 자각하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스스로 기도하기를 포기하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령께 자기를 비우며 내어 놓을 때 바로 거기서 참기도는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온갖 좋은 것들이 우리 생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금 '신비적 기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예언자적 기도'도 회복해야 되겠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 상실해버린 그 기도의 자리를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기도의 언어를 잃었다면 성령 안에서 다시 찾으십시다. 성령은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시지만 특별히 이 하나님의 전 안에서 강하게 역사합니다. 주님 전에 올라 성령의 도우심을 힙입어 기도하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 아닌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던 저희들이 말씀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기도가 아니었음을 알게 하시고 이제 자신의 기도를 거두고 성령의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저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잃어버린 기도가 자리가 많고 더하여 잃어버린 하늘의 소중한 몫들이 많습니다. 다시금 기도를 회복하게 하셔서 영육간의 풍성함을 맛보게 하옵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귀한 은총을 누리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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