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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제의 기름부음 (삼상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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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보면 사울, 사무엘, 다윗 세 사람이 나옵니다. 여기에 사울은 어제의 기름부음을 대변하는 사람이고, 사무엘은 오늘의 기름부음을 대변하는 사람이고, 다윗은 내일의 기름부음을 대변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오늘날도 성경의 경우와 똑같은 일들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울의 삶을 중심으로 해서 어제의 사람, 혹은 어제의 기름부음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따라서 사울의 경우를 살펴보다보면 사무엘이나 다윗의 경우보다는 자연히 부정적인 면들이 많이 다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부정적인 메시지 속에서 항상 우리 자신에 대해서 비춰보고 경각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순식간에 사울과 같이 어제의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절대로 면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어제의 기름부음이란 말은 이 세상을 떠나서 지금 이 땅에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서도 오늘날 살아있는 누구 못지않게 오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나 기독교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벨의 경우를 보면,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下).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죽은 지 몇 백 년, 어떤 사람은 몇 천 년이 되었지만, 그들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오는 과정 중에 어느 한 시점에서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를 읽으면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작은 책이었지만, 특별히 ‘믿음에 의한 삶’을 배우는 과정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이 세상을 떠난지 꽤 오래된 사람입니다. 그분은 육신은 죽었지만 그의 저서를 통해서 그의 신앙관은 지금도 살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어제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오늘의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서 쉬고 있지만, 지금도 그의 상급을 거둬들이고 있다고 믿습니다.

“어제의 사람, 어제의 기름부음”은 어떠한 사람을 말하는가

제3장 어제의 기름부음
사울과 다윗의 차이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즉 어제의 사람과 내일의 사람의 차이는 사울은 왕관은 가지고 있으되 기름부음이 떠났고, 반면에 다윗은 기름부음은 있으되 아직 왕관은 없는 것을 말합니다. 미래의 사람입니다. 미래의 사람이 할 것은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물론 기다리는 과정에서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어제의 사람은 왕관, 즉 강단과 사역과 일은 있으나 하나님의 기름부음, 하나님의 신임,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이미 거친 사람입니다. 요약하면 한물 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기억할 것은 사람의 눈에 한물 간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눈에는 여전히 놀라운 사역을 이룰 수 있고, 여전히 놀라운 은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눈에는 끝난 사람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분량과 한계가 우리의 기름부음이다.”

먼저 믿음의 분량이란 무엇인지 로마서 12장 6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로마서에서 말하는 “분수”는 “한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양만큼, 그 한계만큼 예언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 혹은 믿음의 한계가 기름부음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특별한 노력이 없이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기름부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가 확인하고 그 범위 안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축복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어제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실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비(非)현실적인 열망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은 사용하지 않으신다.”

여기서 말하는 “비현실적인 열망”이란, 영어표현 그대로 하면,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열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기름부음의 한계를 초월하여 그것을 열망하고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비현실적인 기대는 그 근본이 우리의 교만과 자만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울의 행위는 자기의 기름부음이 아닌 다른 기름부음으로 자신을 높임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부어진 기름부음을 넘어서는 것이고,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침범한 것입니다. 이 부분이 참으로 치명타입니다.

몇 년 전 제가 사람들 앞에서 새물결 선교회 후원회 회장님으로 섬기는 서강복 장로님을 지하 성전구입을 위한 준비위원장으로 소개하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박수를 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장로님께서 시험에 들 뻔 하셨다고 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새물결 선교회 화요모임 처음 집회를 시작하기 그 이전부터 제가 장로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모임을 시작할 때도 같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장로님 표현을 빌리자면, 장로님 자신이 전에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도 장로이고, 회사에서는 사장이고, 사회적으로도 지위도 그렇고 해서 나서기를 좋아했답니다. 그런데 새물결 선교회에 와서는 2년이 지나도 모두 다 회원이라고 하지 장로이기 때문에 한번도 특별대우를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장로님이 현재는 선교회 후원회장직을 맡고 계신데, 그전에는 다 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나 집사가 구분이 없고, 모두 다 회원일 뿐이고, 또 결정권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후원회원들은 기도하고 일을 집행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그렇게 쭉 했는데, 여주봉 목사님이 어떻게 됐길래 사람들 앞에 자기를 위원장으로 세워서 박수까지 받게 하다니! 이건 대단히 변했다는 생각에 시험들 뻔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나무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나, 새물결선교회 정기집회가 인도되는 과정에서나, 장로님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 부분이 큽니다. 그리고 제가 장로님을 개인적으로 안지 오래 되었고, 선교회에서 같이 기도한 것만 해도 3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제가 그 분에게 후원회 회장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더 안맡겼습니다. 왜 안맡겼냐면, 장로님 스스로 조금이라도 나서고자 하는 것이 제 눈에 보이는 한 아직 준비가 안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무리 많은 헌신을 했어도, 준비가 안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생각하기에 그렇게 헌신하는 사람을 그렇게 대우했다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로님이 하나님 앞에 한 것입니다. 설령 서운해서 떠나고 싶다면 떠나셔야합니다. 그럼 지금은 왜 세웠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그동안 그 부분을 다루셔서 이제 그것이(스스로 세우고자 하는 것)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에게 감동주시기를 이제는 세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새물결선교회에 참여한 목사님들 중에 그렇게 기다리지 못해 떠나시는 분들을 종종 보았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스스로 세우고자 하는 것을 버리지 않는 한, 절대로 그 사람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밑에는 야망이 있습니다.

짐 베이커 목사님은 미국에서 유명한 방송설교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죄를 짓고 옥살이 중에,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의 저서를 읽다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훗날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께서 「The Anointing」이라는 책을 발간하실 때, 그 책의 서문을 짐 베이커 목사님께서 쓰셨습니다. 그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첫 부분에 요셉의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책을 통해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다루시는가.” 하는 내용을 쓰고 있고,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다루시는 것은 스스로 서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라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책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비현실적인 열망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시지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비현실적인 열망이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기름부음의 한계를 벗어난 열망을 말합니다. 그것은 야망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기름부음과 어제의 사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기름부음이란 우리의 인간적인 특별한 노력이 없이도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나를 통해서 물이 흐르듯이 하나님의 역사들이 이루어질 때 이것이 지금 나에게 부어진 기름부음이다. 우리의 이러한 기름부음은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삶, 온전한 복종, 빛 가운데 거하는 삶,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에서 나오는 새로운 기름부음(fresh Anointing)에 의해서 비롯된다. 그것이 새롭게 되어지지 않는 한 그 사역은 순식간에 어제의 사역이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기름부음 즉 우리의 사역은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삶, 온전한 복종, 빛 가운데 거하는 삶,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있어야 사역이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요소들로부터 나오는 fresh anointing(신선한 기름부음)에 의해서 날마다 새롭게 되어지지 않으면, 즉 우리의 기름부음은 어제의 기름부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어제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전혀 모르는 가운데 우리 모두가 어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안목에서 어제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안목에서 보면 이미 버려진 사람, 이미 지나간 사람, 이미 한 물 간사람 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사실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사울처럼 처음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여기서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는 “돌이킴이 없느니라.”라는 말입니다. 한 번 주시면 빼앗아 가시지 않는다. 취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후회함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후에 돌이킴이 없다. 한 번 주신 것은 회수하지 않는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소명)에는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죄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바로 거두시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단의 능력은 처음부터 사단이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천사장으로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타락해서 쫓겨난 지금도 그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는 돌이킴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기를 구하고, 주님 안에서 온전히 복종된 삶을 살고, 빛 가운데 사는 삶을 통해서 순간순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fresh anointing(신선한 기름부음)을 구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16장 1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 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 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을 버렸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신임이 이미 그에게서 떠났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임재는 사울에게서 이미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신임으로부터 나오는 신선한 기름부음 즉, 새로운 기름부음이 그를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그 후 18년 동안 여전히 왕으로써 권세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떠난 후에도 적들을 물리치고 많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임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다스렸음을 보여줍니다. 더 놀라운 일은, 하나님의 임재는 사무엘상 15장에서 떠났고, 16장 1절에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19장 23절-24절을 보면 은사가 여전히 나타납니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사무엘상 10장 11절에 보면 사무엘이 예언한대로 사울이 선지자 그룹들을 만났을 때 그에게 성령이 강력하게 임해서 예언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기스의 아들 사울도 예언자중에 한 사람이냐” 이렇게 말할 만큼 사울에게 강력한 예언의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를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19장에서 또 사울에게 여전히 강력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은사는 돌이킴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이미 그를 떠났어도, 그는 여전히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예언의 은사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셨음에도 은사는 여전히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심각한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받아 드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과 왕관을 가지고 있었던 사울 왕, 누가 그러한 사울을 보고 어제의 사람이라고 감히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무엘은 알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기름부음이 떠나도 여전히 놀라운 성공을 거둘 수 있고, 여전히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고, 여전히 엄청난 사역이 있을 수 있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의 신임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임재는 걷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은 걷힐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제의 사람입니다. 그 놀라운 성공 가운데에서도 어제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심각한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세우심, 만지심, 하나님의 새롭고 신선한 기름부음에 의해서 날로 새롭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어제의 기름부음에 의존하는 어제의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폴 케인 목사님이 강조하는 점이 있습니다. “캠핑 금지” 여행을 하다보면 어떤 지역에 “캠핑하지 마시오.”라고 팻말이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이 의미는 성령이 나타나시는 현상 자체에 머물러서는 절대로 안된다 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모임에 갔더니 쓰러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막 웃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거기에 머무르기 쉽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캠핑”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역할 때마다 사람들은 어떤 현상들을 기대하게 됩니다. 여러분, 어떤 분들은 그런 현상을 기대하면서 쓰러지는데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 어리 석느냐하면, 현상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나온 신선한 기름부음으로 새롭게 되지 못하는, 어제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그러한 경우가 많습니다. 전에 잭키 플린저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녀가 한국에 와서 사역을 인도하는데, 사람들이 기도 받다가 다들 쓰러지려고 하니까 강하게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무슨 짓 하십니까 왜 쓰러지려고들 그러십니까 하나님께서 쓰러뜨리실 때 하는 것이지, 왜 쓰러질 것을 기대하십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여기서 쓰러진다는 것이 나쁘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얘기는 현상에 머무르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현상에 캠핑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하실 때가 있고, 또 하나님이 약하게 역사하실 때가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택하신 대로 역사 하시는 것인데, 왜 거기에 집착 하느냐는 것입니다.

화요 모임을 인도하다 보면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사람들이 통곡하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뒤집어 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근래 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약간 바꿔 가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사역을 하다가 죄 짓기 전까지 가기도 합니다. 사역하다 보면 눈에 보이는 역사들이 나타나기를 자꾸 부추기는 듯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한 발짝 물러 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배워갑니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을 자꾸 나타내시는가 하면, 조용한 가운데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조용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는 매우 강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이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조용하니까 “별 거 없나보다.” 뭔가 큰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쿵쿵 넘어지고 여기저기서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야만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현상만 기대 하다 보니까 때로는 조용하면 “아-하나님이 역사 안 하시나 보다.” 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생각 자체가 지금 현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사울의 경우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놀라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또는 여전히 놀라운 지위에 앉아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존경을 받는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은밀하게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을 발견하기까지 여러 해가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빨리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절대로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름부음이란 새로운 기름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폴 케인 목사님이 얘기하기를 자기는 50년 동안 이러한 사역을 하면서, 어제의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세 가지를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첫째도 기름부음을 사랑, 둘째도 기름부음을 사랑, 셋째도 기름부음을 사랑” 여기에서 말하는 기름부음은 신선한 기름부음을 말합니다.

기름부음을 사랑하라는 말은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듯이 은사를 사모하고 은사를 사랑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온전한 복종과 빛 가운데 거하는 삶,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삶에서 나온 신선한 기름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사모하라는 얘기 입니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목숨을 걸고 그것을 사모하라는 얘기 입니다. 모든 일을 제쳐놓고 그것을 열망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을 소중히 여기라는 얘기 입니다.

기름부음이 걷히게 하는 요인들

신선한 기름부음을 우리에게서 걷히게 하는 요인 중에는 많은 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 중요한 요인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세우는 것, 자기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것,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사역을 이루려고 하는 것, 경쟁심, 그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종이 되고자 하는 야망들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것들이 성령을 떠나게 합니다. 이 하나하나의 것들은 치명적인 독소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버림 받게 하는 독소입니다.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새물결 선교회 가운데 이것이 싹트면 우리는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사역을 통해서 여러 번 말씀하신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경쟁의식, 사람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의식,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능력이 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사역하는 것이 낫다, 내게는 저 사람보다 더 많은 능력이 주어졌다, 혹은 자기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 우리 가운데 싹이 트면 그 즉시 우리는 끝납니다. 아무리 엄청난 사역이 있다 할지라도 어제의 기름부음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니까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닙니다. 지금 설교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매우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는 것은 설교이기 때문에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을 가는데 필수적인 요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우리 가운데 스스로 세우는 일이 일어나면 모두가 죽는다는 각오를 가지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여태까지 설교하면서 이것이 설교이기 때문에 또는 사람들에게 하기위해서 말씀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무의식중에는 혹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제가 아는 바로는 없습니다. 제가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거기에 온전히 섰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지금 우리가 주님을 따라감에 있어서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죽는다.’ 라고 하는 그러한 절박한 마음으로 말씀합니다. 물론 항상 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자세로 했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안됩니다. 여러분, 좋은 출발은 언제나 좋은 끝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아도, 또 역사적으로 보아도, 매우 순수하게 시작했다가, 그렇지 못하게 끝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어떻게 보면 무거운 메시지입니다. 어제의 사람이 되는 것에 관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경각심을 갖기 원합니다. 왜 경각심을 가져야 하냐면, 저와 여러분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제외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어느 누구도 다 어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특히 한 가지 심각한 것이 시기와 질투입니다. 사울이 어제의 사람이 되면서부터 그의 영혼 속에 자리 잡은 것이 시기와 질투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러한 시기나 질투가 있으면 우리는 어제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치명적입니다. 시기가 사울의 마음을 병들게 했습니다. 여러분, 어제의 사람은 오늘의 기름부음과 오늘의 사람을 시기 합니다. 질투 합니다. 미워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가장 대적한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행하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가장 강하게 반대하고, 대적하고, 비판하고, 정죄한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바로 앞에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제의 사람은 시기와 질투에 사로 잡혀있기 때문에 오늘의 사람을 시기하게 되어있습니다. 이 시기심은 하나님의 자녀인 형제와 동료를 향해서 온갖 노력과 시간과 힘을 집중하여 싸우도록 부추깁니다.

그 예로 사울의 삶을 보십시오. 그의 권세와 군사력으로 모든 힘을 다해서 관심을 가지고 싸운 상대는 다윗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시기와 질투가 교회 가운데 자리 잡으면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일보다 교회 내에 있는 다른 목회자와 교단과 교회를 대적하는데 온갖 힘을 다 쏟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 보십시오. 사울은 심지어 정직성을 잃어버리면서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타락의 길로 점점 깊어갑니다. 사실 정직을 잃으면 다 잃는 것과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직성을 잃으면 다 잃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하라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여, “지혜롭게 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지혜는 사단의 지혜입니다. 그 배후에 사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지혜는 거룩하고 의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과만을 중요시하고, 눈에 보이는 실적을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그런 나머지, 정직성이 무너지건 상관없이 행동합니다. 이것은 다 잃는 것입니다. .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의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시138:2) 원어를 보면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모든 이름보다 더 높이셨습니다.”라고 되어 있다고 합니다. (참조:표준 새 번역) 잘 이해가 안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Living Bible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이름들보다 더 높이셨다”라는 구절에다 각주를 달면서 “문자 그대로는 그렇게 쓰여 있다.”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힘은 능력,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시되 “야훼, 스스로 있는 자, 놀라운 능력” 등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4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는 복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즉 말씀을 보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로마서 4장 3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셨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소개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말씀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계속 말하기를 말씀은 하나님의 정직성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정직성이 무너지면 능력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울은 정직성을 훼손하면서까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상대방을 못 믿어도 상대방이 말하기를 ‘맹세한다.’고 말하면 믿어주었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이 말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아들인 요나단에게 맹세까지 했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입으로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인 맹세까지도 했는데, 거침없이 그 맹세를 스스로 어겼습니다. 완전히 자기의 정직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시기했습니다. 사울이 무너져 가는 과정을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이러한 일들이 전혀 새롭게 들려집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심각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심각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기, 경쟁의식,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노력, 자기가 자기를 세우는 노력,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야망들을 우리 가운데에서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가운데서 반드시 시기와 질투를 제거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함께하신 은사가 여러분의 것보다 더 크다고 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권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성령의 사역을 독점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새물결 선교회가 이 시대의 성령의 사역을 독점하지 않습니다. 독점하려 한다면, 그 자세는 매우 잘못된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날마다 새로운 기름부음으로 새롭게 되지 않으면, 우리의 사역은 언제든지 어제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는 버림을 받을까봐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날마다 내 자신을 쳐 내 육신을 복종케 한다.”(고전 9:27) 바울의 경우와는 달리 사울에게는 이런 경각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떠나셨음에도 그는 전혀 몰랐습니다. 물론, 그는 훗날 깨닫게 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삼상26:21) 그는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 사무엘상 28장 15절 下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이 말은 과거에는 하나님이 사울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때로는 어제의 사람으로 전락했다가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앞에서 말씀드린 짐 베이커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스스로 그 서문에서 고백 하듯이, 그는 분명 어제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때 그의 사역은 참으로 엄청났었습니다. T.V 방송설교를 통해서 하루 헌금이 6억원이 들어왔었으니까. 한달이면 180억. 1년이면 2000억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엄청난 성공 가운데서 어제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신선한 기름부음 가운데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감옥 속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40년 형을 받고 실형 중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강권적인 역사로 꺼내신 것입니다. 그는 과거의 사람에서 돌아온 사람입니다. 삼손도 들릴라로 인해서 기름부음을 잃었기 때문에 과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죽을 시점에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다윗 같은 경우에도 한때는 과거의 사람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밧세바 사건 때문입니다. 나단이 그를 직면하기 전까지 다윗은 자기가 과거의 사람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무엇이 차이인가요 돌아오지 못하는 과거의 사람과 돌아오는 과거의 사람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걸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과거의 사람이 되지 않고, 설령 거기에 빠질지라도, 돌아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여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여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서서 방향을 전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릇된 길을 가면서, 자기 스스로의 음성을 듣고 속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제의 사람에서 돌아오는 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꾸짖으심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입니다. 사무엘하 12장 11-12절을 보면 다윗이 옛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죄를 짓고, 그 죄가 점점 깊어 갑니다. 죄는 자라게 되었습니다. 죄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근본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죄는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시어 그를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직면한 내용이 듣기에 쉬운 내용이 아닙니다. “또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내 눈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사람들 앞에서...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삼하 12:11-12) 듣기에 얼마나 어려운 내용 입니까 “재화를 일으킨다.”는 말은 화를 내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선지자를 통해서 왕에게 한 말씀입니다. 옛사람이 되면 마음이 굳어지게 되어 있는데, 지금 다윗은 왕입니다.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지자 하나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하는 말은 우리들이 기도사역 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그러시는데 자매님보고 이러이러한 죄를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다윗의 자세를 보십시오. 이 자세의 차이 입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삼하 12:13)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꾸지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침묵 하시는 것 보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꾸짖어 주시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떠한 꾸지람이라도 달게 받고 돌이키길 원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하나님 저를 떠나지 말아주세요.” 이처럼 다윗은 얼마나 기름부음을 소중하게 여겼는지 모릅니다. 그는 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듣기 원하는 말만 듣기 원합니다. 어쩌다 듣기 싫은 자그마한 소리에도 금방 시험에 빠져 이렇게 말합니다. “그따위 예언이 어디 있어,” 기도사역자에게 반발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든지, 전혀 말씀 안하시는 것보다 낫습니다.

우리가 사역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잃으면 어제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어제의 사람이 되었다는 하나의 증거는 우리 스스로 단순히 하나님께서 어제에 하신 일을 붙잡고 있음으로, 오늘도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제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을 보는 하나님의 신성한 가치를 상실합니다. 이러한 자세 가운데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단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의 영광과 신임과 특별한 임재가 떠나갔습니다.

제가 전에 화순에 집회를 가다보니까, 폭풍 때문에 엄청나게 큰 나무가 뿌리까지 뽑혀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여전히 푸르게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심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말라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걷히면, 겉으로 보기에는 그야 말로 활발한 것 같지만, 사실은 죽어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탁월한 실력이나 자질, 돌이킴이 없는 하나님의 은사, 사람들을 이끄는 인상적인 성품, 영향력있는 강단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나오는 신선한 기름부음으로 날마다 새롭게 되어, 그분 앞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겸손히 순종하는 자세가 없으면, 그것은 어제의 기름부음입니다. 하나님의 신임은 떠났습니다. 어제의 기름부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항상 과거에 받았던 은혜만을 기억합니다. 과거에 받았던 체험만을 좋아합니다. 그것에 집착하고 안주하려고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새 일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다고 시편기자는 노래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왕국과 지휘권을 유지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우리의 적인 사단보다 새로운 기름부음과 오늘의 사람들을 대적하는데 온갖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고민하고, 시간을 드리고, 삶을 투자하고, 눈물을 흘리기보다, 형제들을 비판하고, 대적하고, 형제들의 잘못을 찾아내어, 신빙성을 무너뜨리고, 끌어내리는 일에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 일을 위해 온갖 열정과 관심과 재력과 시간을 낭비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정확하게 어제의 기름부음과 오늘의 기름부음과 내일의 기름부음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기름부음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사역들이 행해진다 하더라도 오래지 않아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때가 되면 뿌리까지 뽑혀 쓰러진 나무처럼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살아있는 것 같고, 매우 규모가 크고, 사역이 왕성하고, 활동력 있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시간이 말해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어느 누구도 여기에 면역되어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서 있다고 해서 내일도 서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온전한 복종, 빛 가운데 거하는 삶, 그리고 날마다 그분의 얼굴을 구하여 그분을 찾는 삶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길수 목사님의 표현처럼,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밑으로 들어가는 삶을 통해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되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그 순간부터 어제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반면에 여러분 가운데는 내일의 사람들도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현재 강단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부어주신 기름부음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지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지도록, 사용할 수 있는 강단이 아직 없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직 여러분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기름부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세우고, 변화시킬 텐데,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겐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뒷받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후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빚어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기름부음은 빚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과 내일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놀라운 일들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 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고, 어느 것이 옳은 가를 분별하여 보고, 하나님의 길로 따라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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