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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전쟁 (계 16: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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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대단히 호기심이 많은 존재입니다. 호기심 때문에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은 활성화되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문화 발전에서 상상력 혹은 호기심이 큰 동기를 부여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 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호기심의 부정적 역할도 무시할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락하는 이유가 바로 이 호기심 때 문입니다. 청소년들의 탈선도 그렇고 중년에 접어든 남편과 아내들 의 타락도 그렇습니다.진리에 접근하는 일에서도 호기심은 긍정적으 로도 작용하고 부정적으로도 작용합니다. 사실 저는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 세계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이 어떤 책일까 하는 호기 심에서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것이 제 삶에서 결 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요즈음 제가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 면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 하면서도 성경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 초반부터 조는 사람들을 볼 때 참 안타깝습니다. 성경이 도대체 무엇을 말 하고 있는지, 왜 성경 말씀이 진리인지 전혀 알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진리에 대한 호기심이 있습니까?

성경 말씀 의 뜻이 이해되지 않아 고민하면서 잠 못 이룬 경험이 있습니까? 진리에 대한 호기심,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 에 대한 호기심도 잘못 이용될 수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진리, 자극적인 진리를 찾으려는 호기심 때문에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자극적인 호기심은 때때로 우리를 매우 해롭 게 만듭니다. 마치 자극성 있는 음식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것 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지극히 상식적이며 평범할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그 깊이가 더해질 뿐입니다.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이나 신앙이 아주 깊은 사람은 이단에 빠질 가능성이 많지 않 습니다. 그러나 정리되지 않은 신앙과 약간의 호기심을 가진 사람 들은 이단의 가장 중요한 표적이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말을 들어 보면, 자기들은 기성 교회 교인 200명 중에 한 명 꼴로 사람들을 개종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한 명에 해당하 는 사람의 대부분이 신앙이 깊지는 않지만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 람이라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주는 중요한 경고를 듣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私慾)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사람이 올바른 교훈을 거절하고 자기의 개인적인 욕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그런 교훈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 단순히 지식의 축적을 위해서 또 호기심의 만족을 위해서 성경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이 4절에 나온 것처럼 이단의 제물이 됩니다.그 귀를 진리에서 돌 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새로운 진리처럼 포장을 해서 선 전하기 때문에 매우 신선하게 들려오고 그 안에 굉장한 진리가 있 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을 좇아가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허탄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호기심이 잘못 된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음을 알고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 성경 공부를 할 때는 중심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려는 자세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이번 과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호기심에 대한 서론을 펴는 이 유는, 본문에 나오는 마지막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이 어디에 그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계에 서 본문의 마지막 전쟁(아마겟돈 전쟁)처럼 인기 있는 주제도 없 을 것입니다. 이 전쟁을 소재로 한 글도 많고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도 많았습니다. 또 그만큼 이 전쟁에 대해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를 많이 오해하기도 했습니다.아마도 이 아마겟돈 전쟁 에 대한 내용을 대할 때 사람들의 일차적 관심은 그 전쟁의 발발 시기와 장소, 그리고 전쟁에 참여하는 나라들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를 할 때도 그런 방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 나 성경 본문을 조심스럽게 읽어 보면, 성경 기자의 관심이 결코 그런 문제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 는 것 자체는 잘못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전쟁을 다루는 성경 본 문이 강조하려는 바가 그런 문제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 그렇다면 본문이 강조하는 마지막 전쟁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단에 의해 일어나는 마지막 전쟁 이 전쟁에는 분명히 지상의 많은 국가들이 관련될 것입니다. 성경 은 그 국가들이 어떤 국가들이라고 밝히지 않고 다만 많은 왕들이 이 전쟁에 가담할 것이라고만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국가들 을 움직이는 배후 세력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십 시오.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

귀신의 영이 이적을 행함으로써 온 천하 임금들을 동원하여 마지막 전쟁에 가담케 한다고 했습니다. 이 귀신의 영에 대해서는 바로 앞 절에서 언급합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13절).

세 더러운 영, 그것은 마귀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가리킵 니다. 바로 이들이 모든 천하의 왕들을 움직여 마지막 전쟁에 가 담케 합니다. 본문은 이 마지막 전쟁의 배후에는 사단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아름다운 나의 아가씨」(My Fair Lady)의 선전 포스터 를 보니까 세 사람이 그려져 있더군요. 우선 이 뮤지컬의 여주인 공 역을 맡은 엘리자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 남자 주인공인 닥 터 히긴스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 지배하려 하고 지배받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들 위에 구름이 그려져 있고, 그 구름 위에 뮤지컬의 원작자인 조지 버나드 쇼가 앉아 있었습니다. 저작자에게 왜 이런 선전 포스터를 그렸는지 물었더니 , 결국 이 두 주인공도 작가에 의해서 움직임을 받고 있다는 것 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 공들은 그들 배후에 있는 작가에 의해 움직여집니다. 그들 스스로 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요. 이 원리는 정치 지도자 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나름대로 의 정치 철학에 따라서 어떤 결정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결정의 배후에는 다른 세력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바로 악마의 세력입니다. 인간의 삶의 영역 중에서 우리에게 직접적이고 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무래도 정치 무대일 것입니다.

윗분들이 정치를 잘못하면 국민들이 먹고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그 래서 정치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단이 이 정치 영역에 깊이 관 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영역에 관심을 가 져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악령들 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반기독교적 성향을 띠는 정치 세계에 기독교적 세계관이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것, 그것은 그리 스도인으로서 중요한 책임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 더러운 영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13 절을 보십시오.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왜 개구리 같다고 했을까요? 레위기 11장에 보면 개구리를 더러 운 생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 관상이 안 좋아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개구리는 상징적으로 더러운 것으로 묘사됩니 다. 아마도 본문의 경우는 가치관을 왜곡시키고 거룩한 것을 속되 게 만드는 더러운 영들의 역사를 보여 주고자 개구리라는 표현을 쓴 것 같습니다. 그 더러운 영들이 온 세계의 모든 정권들과 정 치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인류의 마지막 전쟁을 위하여 역 사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 이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문자적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견해입니다. 그들은 여섯째 대접이 유브라데 강에 쏟아 져서 강물이 마른다는 구절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실제로 유브라데 강의 수심이 낮아지고 있는 현상을 주목하여 그 강이 완전히 마 르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동쪽에서 거대한 군대가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이스라엘로 진격해 올 것인데, 아마도 중국 을 비롯한 그 예하 국가들이 동원되지 않을까 상상하기도 합니다.

이런 해석도 일리가 있습니다.그러나 본문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유브라데 강은 성경에서 이스라엘로 들어 오는 하나의 입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지역입니다. 여기가 무너지 면 약속의 땅이 위험해집니다. 그러므로 유브라데 강이 말라서 동 방의 왕들이 그곳을 통해 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상징적인 의미일 수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은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전쟁에 대해 문자적으로 해석 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아마겟돈이라는 곳에서 이 전쟁이 일어난 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마겟돈 이란 단어는 『아』 혹은 『하르』라고 하는 단어(산을 의미함)와 『마겟돈』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여기서 마겟돈은 이스라 엘 땅에 존재하는 므깃도 평원을 가리킨다는 것이 보편적 견해입니 다. 그러므로 문제는 므깃도 평원이 므깃도 산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므깃도는 한번도 산으로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그곳 은 언제나 평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서 므깃도를 산이라 고 했을까요? 저는 아마겟돈이란 곳이 특정 장소라기보다는 사단에 의해서 일어나는 마지막 전쟁에 대한 단순한 상징적 표현에 불과하 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아마겟돈 은 모이는 장소, 모이는 산이라는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 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이라는 단어는 최후의 전쟁을 위해 서 모이는 곳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여하튼 성경이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는 특정 장소 가 아니라 마지막 전쟁이 악마가 일으키는 파멸의 전쟁이라는 점입 니다.

여섯번째 대접이 쏟아질 때 모든 나라들이 이 마지막 전쟁을 위해 서 모이게 됩니다. 이어서 일곱번째 대접이 쏟아지는데, 17절에 보면 일곱번째 대접이 공기 가운데 쏟아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공기라는 단어가 쓰였을까요? 문자 그대로 대기권에서 어떤 전쟁이 일어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악마의 보좌가 있는 공중 (air)과 연결시켜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사단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이제 마지막 대접과 함께 쏟아진다는 사실 을 성경이 강하게 경고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극적인 간섭으로 끝나는 마지막 전쟁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 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 이 있도다.

주께서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묘사할 때마다 나 오는 표현으로서, 예기치 아니한 때에 갑자기 오신다는 의미입니다 .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의 구조에서 이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단이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이 세상은 점점 더 반기독교적으로 되어 가고, 그리스도의 역량은 점점 감소됩니다 .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아무래도 기독교는 진리일 수가 없 구나 하면서 등을 돌릴지도 모릅니다. 역사는 바야흐로 사단의 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도덕하게 그리고 비도덕적으 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돌 연히 예기치 아니할 때에, 역사 속에 숨은 것같이 보였던 예수님 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숨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역사의 주인이셨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 그분은 자신의 주(主)되심을 나타내면서 왕 중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도적같이 오신다는 선언대로 말입니다. 그 리고 마지막 전쟁은 끝이 날 것입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최선의 준비 본문이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종말을 기다리는 최선의 준비가 거룩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 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 이 있도다.

이 간단한 메시지 속에 종말에 대한 우리의 모든 준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로 자기 옷을 지켜 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벌거벗지 말아야 된다 혹은 다른 표현으로 부끄러움을 노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야말 로 마지막 순간에 정말 복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세 가지 준 비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첫째,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영적인 각성을 촉구할 때마다 쓰이는 표현입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성경에서 깨어 있다는 말이 쓰인 구절을 찾아보면 반드시 그 전후 문맥에 기도라는 단어가 함께 등장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는 기도하 는 자입니다. 하루의 일정한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 만, 더 중요한 것은 항상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갈 때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한번 당신의 삶을 뒤돌아보십시오. 당신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가 혹시 기도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던 때는 아니었습니 까? 어두워져 가는 이 마지막 때에 우리가 깨어 있는 것은 얼마 나 중요한 일입니까? 둘째, 자기 옷을 지켜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옷이라는 표현은 성도들의 의(義)를 강조할 때 많 이 사용됩니다.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바른 가치관이 무너져 가는 이 말세에 주님이 강조하신 의와 거룩함으로 마땅히 옷을 입고 자 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벌거벗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죄 짓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고 거룩함을 추구하며 소극적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 것, 그것이 말세에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요즘 92년 10월에 예수님 오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말세를 준비하는지 보셨습니까? 남편이고 자녀고 모두 팽개치고 밤 12 시에 자정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자기들끼리 만나서 밤마다 기도 하는 것이 말세에 대한 준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 지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유혹이 우리를 향해서 엄습해 오는 이 시대 속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 내는 것 이 말세를 준비하는 자세입니다.얼마 전에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 한 분을 만났는데, 요즘 한국 교회 상황이 어떠한지 질문을 드렸 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군요.

요즘 참 한국 교회 부흥되기가 쉽습니다.

『아니, 목사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요새 부흥되는 교회를 보면 그 원리는 간단합니다. 목사가 실수 만 안 하면 그 교회는 부흥합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거룩함을 추구 하지는 못할망정 실수만 안 해도 교회가 부흥을 한다니,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넘어가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만큼 한 국 교회의 도덕적인 수준이 낮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 를 단순히 개인들의 실수로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 람들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파괴하는 사단의 공격이 그 배후에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성결을 잃어버리고 패배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경건함과 거룩함을 지킬 수 있을까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옛날 로마에 그리스도인들이 자 꾸 증가하니까, 로마 황제가 신하들을 불러 놓고 그리스도인들을 없앨 방도를 강구했습니다. 먼저 황제 자신이 의견을 제시합니다.

지금까지 로마의 법률이 너무 허술해서 그런 것 같다면서 그리스 도인들을 무조건 죽이는 식으로 법을 개정하자고 합니다. 그랬더니 한 신하가 폐하, 그러면 절대로 안 됩니다. 저 그리스도인들 은 죽기만 하면 순교자로서 추앙을 하기 때문에 그 방법은 역효과 를 냅니다라고 말하며 반대합니다. 그러고 나서 대안을 내놓는 것이 이제부터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기만 하면 잔인하게 고문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다른 신하가 저 예수쟁 이들은 고문을 받기만 하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좋아합니다.

또 고난을 많이 받을수록 상급이 더 많아진다고 좋아하는 놈들입 니다. 고문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게 되었다고 좋아하며 자랑하고 다니는 녀석들한테 어떻게 고문을 가하겠습니까? 그 방 법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없앨 수 없습니다라면서 반대를 합니다.

이때 구석에 있던 한 신하가 조용히 의견을 내놓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편안하게 놀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놓으면 간 단합니다. 그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 죄를 지을 것이고, 그러면 기독교는 있어도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일화에는 대단히 위대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기독교를 없애 는 가장 무서운 요인은 외부의 박해가 아니라 내부의 부패입니다.

우리가 범죄할 때, 우리가 쓰러질 때 역사는 빛을 잃어버립니다.

이 마지막 때에 주님이 기대하시는 사람들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 람들입니다. 그들만이 역사의 황혼을 지키는 하나님의 파수꾼들이 될 것입니다.

주 하나님,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 것인가 하는 질문보다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물을 수 있는 저희들 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이 어떻게 끝나든, 우리가 주님 앞에서는 날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기를 원합니다. 깨어서 자기 옷을 지 키며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 주께서 도적처럼 오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의 시각이 가까운 이때에 우리에게 거룩함을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 다. 하나님,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는 자극적이고 솔깃한 메시지 보다 우리의 거룩함을 준엄하게 촉구하시는 주님의 경고의 음성 앞 에 더 심각하게 응답할 줄 아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내일 세 계의 종말이 올지라도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 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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