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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물과 하늘 (마 06:19-21)

첨부 1


예수님의 혈통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유대인은 ‘문제의 민족’이 될 것입니다. 독일 나치주의자들에게 유대인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미움을 받은 내용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 하나는 종교적 우월성 문제였습니다(유일신 하나님). 또 하나는 혈통적 우월성이었습니다(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고 그 세 번째는 경제 문제였습니다.
유대인은 저들이 살아가는 나라에서 언제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 경제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장악했던 유대인들이고 보면 당연히 게르만 민족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사실상 세계 경제의 중요한 부분들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은 다 유태계 미국인, 유태계 러시아인, 유태계 유럽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저 민족들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무대에 선택받았다는 축복 때문에 여러 가지 경우에서 세계 민족들 가운데 특이한 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저 민족의 움직임은 세계 종말과 직결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의 산상수훈에서 물질생활에 관계되는 교훈을 하시는 중에 그 첫머리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는 소극적 교훈을 하셨습니다. 그 다음 부분에 더 적극적으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였습니다(마 6:20). 여기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 ‘보물’이란 물질적 개념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컨대 금이나, 은이나, 진주나 재산 등일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오늘은 ‘인생과 보물’이란 메시지 중에 ‘보물과 하늘’이란 내용을 생각하기 원합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아주 익숙하게 이해되는 말이었습니다.

Ⅰ. 저축하는 미래적 경제 행위를 금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마 6:19), 「하늘에 쌓아두라」(마 6:2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경제 행위 자체를 정죄한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1. 가족의 부양과 미래를 위하여 정당한 노력의 결과 얻는 소득과 저축 행위를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재물 얻을 능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신 8:18). 부모가 어린아이의 양육을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행위는 마땅한 일입니다. 그것은 가족을 돌보는 선한 일이 됩니다(딤전 5:8, 고후 12:14).

2. 또한 무역이나, 상업이나, 공업이나, 기타 여러 실업(實業) 행위와 그 소득들을 정죄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바로 이 세상 문화의 청지기로 보냄받은 기독 신자들의 육일 동안의 사명입니다. 엿새 동안에 네 모든 일을 힘써 다하라는 하나님의 복스러운 계명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출 20:9). 노동과 경제 행위 그 자체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요긴한 문화적 사명이 됩니다.

3.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진 부자들은 모두 정죄의 대상이 된다는 말도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요셉이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기타 교회사에 나타난 여러 부자들이나, 현존하고 있는 부자들(그리스도인)이 모두 다 하나님의 나라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 아닌가 물질적 부요는 하나님이 인생에게 허락하신 일반적 축복 중에 하나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교훈 중에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감보다 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부자들을 지칭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저축하는 경제 행위는 바른 축복이 됩니다.

Ⅱ. 보물(財物)의 참된 청지기적 사명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물질 사용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물질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6장 20절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좀에게 먹히지 않고, 동록이 슬지 않고, 도적당하지 않는 재물이 어떤 것인가 ‘하늘 창고’에 쌓아 두는 재물이란 말입니다. 완전하고, 안전하고, 영구한 저축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의 구체적 의미가 무엇인가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에 재물을 담아 두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2:33). 바로 물질로 이웃을 구제함을 가리킵니다.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전도행위를 위하여 드리는 연보를 가리킵니다. 또한 디모데전서 6장 18절대로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복음 선교를 위한 모든 감사의 연보 행위를 뜻하고 있습니다.
더 쉽게 노골적으로 말하면 ‘하늘에 쌓아 두는 보물’이란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위하여 바친 감격적 연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주께로부터 받은 모든 류의 물질을 연보로 드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사람은 연보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1. 그는 금세에서도 영적 저축의 재미를 맛본 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생활에서도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저축하는 은행 통장에 금액이 늘어갈 때, 재미가 있고 보람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교회) 운동의 축복을 체험한 사람은 교회와 자신이 언제나 풍족함을 느끼고 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입니다.
잠언 3장 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했습니다.
잠언 11장 24-26절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21장 26절에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22장 9절에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서 11장 1절에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6-7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였습니다.
십일조를 확실히 실행하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 자들을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말 3:11)라고 약속했습니다. 십일조는 결코 많은 분량의 연보가 아닙니다. 오직 그것을 명하므로 우리에게 물질 축복을 더하게 하려 함이고, 또 이미 받은 물질 축복을 복되게 하려 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에게 나오는 백성들을 향하여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출 23:15)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빈곤한 이유들 중에 하나가 보물(물질)을 하늘에 쌓아 두는데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사막이 사막된 이유는 비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면 사막에 비오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막이 수분을 증발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히려 사막에 있는 열기만 올라가서 공중에 있는 수분마저도 증산(蒸散)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물(물질)을 하늘(교회)에 쌓아 두는 일(연보 행위)은 바로 축복을 체험하는 비결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2. 삶의 참된 의미를 맛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음을 아는 사람입니다(눅 12:15). 그 사람은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많은 풍부보다 나음을 아는 자입니다(시 37:16). 그는 은혜를 베풀고 주는 삶이, 꾸고 갚지 않는 악인의 삶보다 더 행복함을 아는 사람입니다(시 37:21). 그는 결코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하는 법이 없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바로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 줄을 아는 자(시 37:25, 26)입니다.
그는 여간 채소를 먹으면서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찐 소를 먹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은 줄을 아는 자입니다(잠 15:17). 그는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은 줄을 아는 자입니다(잠 15:16).
그래서 스펄죤은 “복된 행위로 얻은 한 푼의 돈이 저주받은 행위로 얻은 백만 원보다 낫고… 나사로가 먹은 부스러기가 옳지 않은 부자의 진수 성찬보다 낫다.”고 말하였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둘 줄 아는 자는 이렇게 인생의 인생된 참된 의미를 아는 자입니다. 말하자면 만물(물질)은 인생을 위하여 있고, 인생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고전 3:21-23). 재물은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이고, 하나님의 일(선한 일)을 행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의 청지기라는 참된 의미를 아는 자입니다.

3. 내세의 상급을 믿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3-14절에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2장 33절에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스위스 격언에 ‘수의(壽衣)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천국에는 이 세상의 것이 필요 없습니다. 단하나 자기 자신밖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유대인의 사기(史記) 중에 유대교로 개종한 모노바즈 왕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모노바즈 왕은 흉년 때에 자신의 모든 보물(재산)을 모두 다 털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들이 사람들을 왕에게 보내서 “그대의 조상들이 모으고, 그대의 조상들이 유산에 유산을 더 보태었는데, 이제 그대는 어찌하여 그대의 재산과 조상들의 재산을 모조리 흩어 버리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 왕은 형제들에게 대답을 보내기를 “나의 조상들은 땅을 위하여 재산을 모았고, 나는 하늘을 위하여 보화를 모았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의 손이 통치할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아 두었으나 나는 사람의 손이 통치할 수 없는 곳에 보물을 쌓아 놓았다. 나의 조상들은 이윤이 없는 보화를 모았고, 나는 이윤이 있는 보화를 모았다. 나의 조상들은 돈의 보화를 모았으나, 나는 영(靈)의 보화를 모았다. 우리 조상들은 이 세상에 보화를 모았고, 나는 장차 올 세계를 위해 보화를 모았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모노바즈 왕의 훌륭한 삶은 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박해자였던 로마의 데시안(Decian)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부수고 들어왔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는 교인들이 바친 많은 보물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물을 약탈하러 들어온 것입니다. 황제의 사령관은 그 교회 집사인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에게 교회 안에 있는 보물을 당장 내어놓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때 그는 교회 안 방문을 다시 열어 거기에 있던 과부와 고아와 불쌍한 사람들, 앓는 사람, 근심에 싸인 사람,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들이 교회의 보물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초기 교회는 모든 물질을 그리스도의 사랑 전달의 수단으로 전용했다는 사실에 대한 입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결코 좀도, 동록도 해할 수 없고,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이 메시지는 바로 경향 25년의 4반세기 기록과 함께 우리 경향인 모두가 체험하고 있는 산 진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물질을 최우선적으로 주께 드렸습니다. 그 결과 세계 선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고려신학교 운동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회복지 운동인 성민회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학교법인 경향학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50여 교회에 이르는 개척 교회로 말미암는 교단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늘(교회)에 드려진 보물은 축복에 축복을 더했습니다. 결코 좀과 동록과 도적이 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축복 체험의 재미를 느끼는 자가 되었습니다. 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자, 그리고 영원한 내세의 상급을 보장받은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하늘의 기업을 상속할 수 있는 축복받은 조상들이 된 것입니다.-아 멘-

199

8.

7. 1

2.
인생과 보물(3)
-보물과 마음-
마태복음 6:19-24

보통 말하기를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①언어(말)를 사용하고 ② 두 발로 걷고(직립보행) ③불(火)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실존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이 마음(καρδα)은 인간의 모든 삶 곧 지, 정, 의의 인격 기관의 중심이 됩니다. 말하자면 사고하고, 판단하고, 욕구하고, 결단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는 주체가 됩니다.

사람에게 있는 마음은 하나님 자신의 창조적 산물로 하나님 자신이 머무시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시 51:10).
잠언 4장 23절에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함으로 마음을 ‘생명의 근원’ 곧 생명의 좌소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함으로 마음은 ‘하나님을 보는 눈’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에 보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 결과 그 장소가 온갖 죄의 온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마음은 ‘하나님을 모시는 좌소’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아니할 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렘 17:9).

지금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의 마음은 보물이 있는 곳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앞절에 나오는 재물에 대한 두 교훈 곧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마 6:19), 하늘에 쌓아 두라(마 6:20)는 말씀의 결론적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보물과 마음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둔 자는 그 마음이 땅에 있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둔 자는 그 마음이 하늘에 있다는 확실한 말씀이 됩니다.

Ⅰ. 마음과 보물은 함께 다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한 말씀입니다.
마음과 보물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부모들에게 있어서 자식은 보배처럼 귀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 부모들의 마음은 항상 자식이 있는 곳에 가 있습니다. 그곳이 서울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아프리카이든 관계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없이 그 부모의 마음은 자식이 있는 곳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6.25 동란 때 두 번째 아들을 군에 보냈습니다. 그 이후 그 자식은 지금까지 돌아올 줄 모르는 전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마음은 언제나 북쪽 어느 전선을 향하여 헤매이고 있는 것을 언제나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물처럼 귀중히 여기는 재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 I.M.F시대를 맞는 오늘의 경우 부실 금융기관에 예금을 하고 거래하며 사업을 하는 자들은 저들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저들의 재산이 은행이나 다른 어떤 금융기관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물이 있는 그곳에 그 사람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몸에 어떤 값진 패물(보물)을 차고 다닙니다. 또 집안의 어느 장소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의 마음은 언제나 그 보물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보물의식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학문하는 과학자들은 자기가 연구하는 그 내용에 자기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립니다. 예술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예술 전공분야에, 정치하는 사람은 그 정치분야에 그 마음을 다 바칩니다. 광맥을 찾아 헤매이는 광부의 마음은 항상 그 마음이 그곳에 있고, 온천을 찾아 부를 꿈꾸는 사람은 항상 그 마음이 그 어느 장소에 묻혀 있는 온천수에 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물과 인생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깊고 깊은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 있음을 알려 줍니다.

Ⅱ. 마음은 결코 두 보물(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재물이 보물이란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던 예수님은 지금 본문에서 사람들이 보물로 여기는 재물은 실상 보물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보물이라는 의미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심으로 하나님만이 우리가 섬길 주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보물을 보는 마음의 눈이 밝아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눈이 몸의 등불과 같듯이 마음이 밝아야 참 보물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마 6:22-23). 비뚤어진 마음은 마치 비뚤어져 버린 눈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 소유물의 내용과 위치를 확실히 해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① 모든 재물(보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재물의 창조주요 소유주라는 것입니다. 만물이 다 그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롬 11:36).
② 사람은 항상 재물보다 더 귀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소유물을 맡은 청지기라는 사실입니다.
③ 재물은 항상 사람과 종속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사람을 위해 있고, 사람은 그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 섬기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만물(물질)은 인생의 것이요, 인생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한 영감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입니다(고전 3:21-23).

그러므로 결코 돈(재물)은 숭배나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사람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보배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의 보배가 되고 네게 귀한 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욥 22:25). 다윗은 여호와가 자기의 보배라고 하였습니다(시 16:5, 6). 선지자 학개는 오실 메시야 예수를 만국의 보배라고 하였습니다(학 2:7). 선지자 말라기는 오실 예수를 ‘의로운 태양’이라고 하였습니다(말 4:2). 바울은 예수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골 2:3).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초점이 뚜렷해집니다. 인생에게 있어 참된 보물은 하나님 자신이요 예수 구원 그 자체인데, 사람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의 재물(보물)을 선용할 때 그 재물까지도 없어질 수가 없는 보배와 같은 것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받은 재물(보물)을 선용할 때 그 재물도 귀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사람의 참 보물이요 주인이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두 주인으로 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은 이렇게 가치척도를 분별하고 재물의 효용가치를 극대화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결코 사람의 마음은 재물의 좌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임재하시는 좌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모시는 수단으로 재물을 선용할 때, 그 재물까지도 보배처럼 귀한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Ⅲ. 영원을 준비하는 마음과 물질이 되어야 함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멋진 예수님의 교훈은 영원을 향해 가는 인생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영감의 사람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 6:7). 솔로몬은 인생이 어머니 태에서 나올 때 ‘벌거벗고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돌아갈 때에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전 5:15). 저 동방 우스 땅의 부자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고 하였습니다(욥 1:21). 이것은 모든 인생이 실제로 당하고 마는 경험적 지식입니다.

인생의 영원한 보물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 생명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친히 준비하신 내 아버지의 집입니다(요 14:1-3). 이것을 새 하늘이요, 새 땅이라고 하였습니다(계 21:1). 바로 ‘네(우리) 보물이 있는 곳’은 영원의 세계입니다. 이 세상은 영구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히 13:14).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말 장소라고 하였습니다(벧후 3:10).
그러므로 영원을 받고, 영원을 믿고,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자의 마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영원을 위하여 물질을 선용하는 자입니다. 영원을 위하여 선용되는 그 물질은 보배처럼 귀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린다고 하였습니다(잠 23:5). 그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잡아 하늘나라에 쌓아 두는 작업을 하는 자들입니다.
에머슨(Emerson)은 ‘네가 땅을 소유하면 땅도 너를 소유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가 하늘을 소유하면 하늘(하나님)도 우리를 소유할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였습니다(마 5:1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마 10:32). 「또 누구든지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 10:42).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고 하였습니다. 또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마 19:21)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백 배나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막 10:29-30).
이러한 주님의 교훈은 인생의 영원한 미래를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귀하고 영원한 것은 이 세상이 아닌 영원한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이 세상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그 마음이 미래를 위하여 재물을 선용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하늘(미래)을 향할 때 사는 맛이 나고, 활기를 띠고,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늘, 보물이 있는 곳을 향하여 마음의 눈이 열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물과 세상! 그것은 둘 다 이 세상에서 영구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물을 땅(세상)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거기는 좀과 동록과 도적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보물과 하늘! 그것은 보물의 보물된 진가를 알게 하고 나타내는 시금석이 됩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면 거기는 좀도 동록도 도적도 없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재물은 보물처럼 귀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물과 마음! 그것은 항상 함께 다녀야 될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결코 사람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없고, 사람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보물과 마음! 그것은 영원을 준비하는 도구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제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바로 우리 경향인들에게는 체험적인 커다란 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경향인 모두의 마음은 언제나 전세계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우리가 바친 선교비(연보)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있고, 또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영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를 받은 복음의 제사장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경향인 모두의 마음은 언제나 저 문산에 있는 고려신학교에 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학교를 위해서 연보하고, 기도하고, 봉사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친 물질이 사용된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경향인 모두의 마음은 신림동에 있는 사단법인 한국성민회에 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사회 복지를 위하여 많은 연보를 드려 그 건물을 짓고 이웃 사랑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경향인 모두의 마음은 언제나 이 새 성전에 와 있습니다. 그 큰 이유는 우리 생의 최고의 연보와 기도와 희생의 봉사를 통하여 이 하나님의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가 바친 모든 물질은 이제 물질 이상의 보물로 그 효과가 확대되고 말았습니다. 그 물질들이 모두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경우 그 물질은 사실상 보물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신학교를 사랑하느냐 누가 성민회를 사랑하느냐 누가 세계 영혼을 사랑하느냐 누가 교회를 더 사랑하느냐 그곳에 자신의 마음이 가 있는 자입니다. 왜 거기에 마음이 가 있느냐 귀중한 물질을 거기에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신 주의 말씀의 참된 맛을 보게 됩니다.
참 보물은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구원을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심비(心碑)에 새겨진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받은 물질을 선하게 사용하는 그것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보물이 됩니다.-아 멘-

199

8.

7. 1

9.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1)
-부름(召命)의 복음-
누가복음 19:1-10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성은 이름의 뜻처럼 ‘종려나무의 성’이라고 불려질 만큼 종려나무가 많았습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더라’는 말은 ‘통과하신다’는 뜻으로 오래 머물 계획이 없으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리고는 구원사적 유서가 깊은 도시였습니다. 저 유명한 기생 라합이 무너지는 여리고성에서 여호수아 군인들에 의하여 창가에 달아 놓은 붉은 줄의 계약을 받음으로 구원을 받은 곳입니다(수 2:18, 21, 6:22-23).

많은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 의하여 여리고의 수원(水源)에 소금을 쳐서 풍성한 토산의 열매를 맺게 만들었던 이적의 고장이었기도 합니다(왕하 2:19-22).

예수께서는 이 여리고성 밖에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신 기적을 베푸셨는가 하면(막 10:46-52), 오늘 본문에는 그 성안에 살던 세리장 삭개오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영의 은총을 베푸셨던 곳입니다(눅 19:9-10).
지금 여리고성으로 들어오시는 주님 앞에는 홀을 들고 환호하는 무리도 없었습니다. 주님 자신이 그의 손에 창이나 아니면 금홀을 쥐지도 않았습니다. 화려한 제사장의 옷을 입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한 평범한 유대의 청년으로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 성중에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 뜻밖의 한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 사람을 부르는 음성은 바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는 내용입니다. 예수의 위대한 여리고 선언인 이러한 예수의 음성은 바로 삭개오를 부르는(召命) 복음이었습니다.

Ⅰ. 예수께서 부르시는 객관적 소명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5절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 편에서 예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 편에서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삭개오 편에서 먼저 예수를 찾아 나와 뽕나무 위로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2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 결과 일어난 반응입니다(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는 일로 인한 삭개오의 반응이었습니다. 본문 5절에도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여리고→삭개오의 순서가 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의 복음은 내 편이 아닌 하나님의 편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부름의 복음은 주관적 산물이 아니라 객관적 산물이란 뜻입니다. 부름의 복음은 인본주의적 자율의 산물이 아니라 신본주의적 타율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범죄 후 아담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아담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창 3:9). 그 결과 아담에게 복음이 주어졌습니다(창 3:15, 21).
아브람이 하나님을 먼저 찾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아브람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창 12:1). 그 결과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실로 성전에 있는 어린 사무엘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아, 사무엘아!” 이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삼상 3:1-9). 어린 사무엘은 생전에 처음으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 주시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사사 전국시대는 끝이 나고 빛나는 다윗 왕국시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저 기독교 박해의 도상을 달리던 사울에게 예수 편에서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영광의 빛으로 그를 길바닥에 엎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음성으로 “사울아, 사울아!” 하시며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행 9:1-19). 그 이후 사울은 바울로 변하고, 그 결과 세계의 지도를 새롭게 그려 놓는 세계 복음 선교의 총아(寵兒)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방 종교와 기독교 복음 종교의 차이점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섬길 신을 스스로 만들고, 인간 편에서 그 신을 찾아가서 복을 구하는 기복 종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 주시고 불러 주신 결과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나를 찾아 주시고, 나를 부르셨다! 이것은 참으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자기보다 훌륭하고, 지위가 높고, 이름을 떨치는 사람에게 초청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을 기대하고, 또 자랑으로 여깁니다. 일국의 대통령에게 초청을 받은 사람은 영광입니다. 그래서 뉴스의 각광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왕 중의 왕이요, 주 중의 주이신 예수의 초청(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무한한 축복의 영광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았습니다(마 20:1). 말하자면 모태로부터 예수의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3시(오전 9시), 어떤 사람은 제6시(12시), 어떤 사람은 제9시(오후 3시), 또 어떤 사람은 제11시(오후 5시)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생 초기나 중기나 말기를 막론하고, 예수님은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을 불러 자기 포도원으로 초청합니다(마 20:2-7). 이는 불신앙의 세상에서 헛된 인생을 보내는 자, 잘못된 인생길을 가는 자를 부르시는 복음의 초청을 의미합니다.

결코 예수 외에는 인생을 부른 사람이 없습니다. 부다(석가모니)나 마호멧이나 공자는 사람을 부른 일이 없습니다. 저들 자신은 모두 사람인 피조물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부르는 곳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을 부르십니다. 지금 삭개오는 이 영광의 축복을 입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Ⅱ. 세리 삭개오를 부르시는 인격적 소명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19장 2절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름 ‘삭개오’의 뜻은 ‘순결’, 혹은 ‘정의’를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여리고의 삭개오는 그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의 ‘불결’과 ‘불의’로 가득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공인된 ‘매국노’였습니다. ‘공인된 변절자’로 업신여김을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세리장으로서 부자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로마의 통치 아래 있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는 식민지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하여 곳에 따라서는 지방자치 정부를 두기도 하고, 종교적 이유로 반란이 심하였던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총독을 파송하여 관할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또한 상업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는 세관을 두고 로마의 행정관을 파송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세관 관리들로 하여금 정부가 요구하는 인두세(人頭稅)나 지세(地稅)를 징수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로나 해로를 통하여 수송하는 재산(물품, 노예… 등)에는 일부 청부업자들에게 하청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일종의 청부 세금 징수는 여러 경우에 적용이 되어 많은 유대인들이 고용되었습니다. 그 외 로마 정부가 부여하는 여러 벌금 류의 세금도 있었습니다. 예수 당시 여리고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로마 세원(稅源)의 도시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이른바 하청업자()격이 된 유대 세무 공무원들은 일정한 세금을 로마 정부에 바치는 반면 과다하게 징수한 여러 세금들을 중간에서 착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치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정부 편에서나 유대인 편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된 자는 그 백성들에게 일종의 저주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들의 세금 징수가 자신들의 정복자인 로마 정부를 돕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착취당한다고 생각하며 종교적 신념과 결부시켰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 세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대상으로, 백성 앞에서는 매국노로 여겨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들을 도덕적으로 창기와 같이 천민으로 여겨 버렸습니다. 저들은 유대인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의 여리고성의 ‘세리장 삭개오’를 생각할 때 그는 그 백성에게 혐오와 증오, 분노와 저주의 대상이었음이 확실합니다. 우리 성경에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눅 19:2)는 말이 더욱 그 당시 삭개오에 대한 사회의 분위기를 입증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하신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는 예수의 선언은 가히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도다」(눅 19:7)라고 하는 실망과 회의의 함성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세리장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 자신이 세상에 오신 결정적인 목적이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자기를 나타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하고, 음식을 먹고, 교제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에게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딱지가 붙었습니다(마 11:19, 눅 7:34, 15:1).

예수는 혈통이나 신분의 구별없이 누구든지 구원의 은혜를 위하여 자기의 원하시는 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어느 곳에서든지, 누구에게든지 확실하게 했습니다. 거리낌없이, 서슴지 않고, 자신이 죄인을 부르러 온 죄인의 친구요 죄인의 구세주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막힌 진리의 내막을 바로 깨달았던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저 유명한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뮐러(George Muller)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16살 되던 해에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갔었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술과 여자, 노름 등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뮐러가 20살 되던 해 성경 속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놀랍게도 그의 삶에는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예배와 기도와 헌신의 새 삶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의 전 재산 13만 5천 달러의 돈을 모두 이웃을 위해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불쌍한 고아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한평생을 고아를 위해서 헌신하는 중에 수많은 축복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그에게 있는 재산은 1천 달러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도 계속되는 고아 사업을 위해서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돈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를 찾아 불러 주신 부름 은총의 결과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저 유명한 예수 여리고 선언 중에 첫 번째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된 부름의 은총, 부름의 복음, 부름의 축복이었습니다. 그것은 내 편이 아닌 예수 편에서, 이 편이 아닌 저 편에서 먼저 나를 찾아 주신 결과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세계의 소망이 무엇인가 철학적, 정치적, 문화적인 어떤 유토피아인가 우리는 그것들에게 오늘까지 속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또 속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바로 이러한 예수 부름에의 음성이 역사 속에 들려 올 동안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말한 이른바 종교적 실존의 단계입니다. 육체적 쾌락을 넘고, 양심과 이성이 가르쳐 주는 윤리적 실존의 단계를 넘어서서 인생 자신이 본래 맺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종교적 실존의 단계, 영적 실존의 단계로 들어가는 세계는 바로 하늘부터 들려 오는 복음의 초청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예수의 음성만이 사람이 사람되는 행복의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편에서의 결단이 아닌 예수 자신의 오심에서 이루어집니다.-다음 주 계속-

199

8.

7. 26.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2)
-부름(召命)의 복음-
누가복음 19:1-10

저 덴마크의 이른바 우수(憂愁)의 철학자라 불리던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사람은 딜레마(Dilemma)에 빠져 죽음의 병에 이르게 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결혼하여라.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말라. 너는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거나 결혼하지 않거나 간에 너는 후회할 것이다.

바보 같은 세상을 웃어 주라.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바보 같은 세상을 탄식하여라. 너는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바보 같은 세상을 웃어 주거나 탄식하거나 간에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처녀의 하는 말을 믿으라.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처녀의 하는 말을 믿지 말라. 너는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처녀의 하는 말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간에 너는 후회할 것이다.

목매어 죽으라.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목매어 죽지 말라. 너는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목매어 죽거나 목매어 죽지 않거나 간에 너는 후회할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 이러한 절망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 기로에 선 인간의 처절한 모습은 마침내 불안의 절망으로 이끌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삭개오 편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불안 속의 결단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 자신 편에서 여리고에까지 오시고, 삭개오를 불러 주셨습니다. 삭개오에게는 ‘이럴까, 저럴까’ 하는 선택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삭개오가 만난 실존적 인간의 중심에 예수께서 일방적으로 깊이 개입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을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타율주의 종교에서만 볼 수 있는 부름(召命)의 복음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Ⅰ. 예수께서 부르시는 객관적 소명이었습니다.
Ⅱ. 세리장 삭개오를 부르시는 인격적 소명이었습니다.

Ⅲ. 삭개오만 부르시는 선택적 소명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고 불렀습니다.
그 여리고 성내는 수많은 인파로 붐볐습니다. 그리고 그 뽕나무 위에는 바단 삭개오 뿐아니고 호기심에 가득한 많은 소년들도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도상을 지나가시던 예수님은 그곳에 이르사, “삭개오야!”라고 삭개오만 지목해서 불렀습니다. 개인적 소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백성을 떼를 지어 집단적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룹별로, 연령별로, 성별(性別)로, 지역별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창 12:1). 하나님은 사무엘을 실로에 있는 성전에서 개인적으로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시며 세 번이나 연속해서 같은 내용으로 불렀습니다(삼상 3:1-9). 하나님은 이사야를, 예레미야를, 에스겔을 각각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나다나엘을 미리 아시고 불렀습니다(요 1:47-48). 베드로와 요한의 형제를 고기잡이하는 어장에서 불렀습니다(눅 5:10-11). 마태를 세관의 공직에서 불렀습니다(마 9:9). 사울을 박해의 도상에서 불렀습니다(행 9:1-9).
여리고 도상을 지나가시던 주님은 삭개오가 있는 현장에 이르렀을 때, 걸음을 멈추시고 “삭개오야!”라고 그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 수많은 여리고성의 인파 속에서 ‘삭개오’를 지목하여 불렀습니다. 물론 주님과 삭개오는 그 전에 만난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삭개오’라고 그 이름을 지목해서 불렀습니다.
① 이는 주님 편에서 삭개오만 지목하고 부르시는 주권적 선택의 소명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완전히 일방적인 부르심이었습니다.
② 주님 편에서 먼저 ‘삭개오’를 아시고 부르시는 예정(계획)된 부르심이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의 대명사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삭개오를 아셨습니다. 알고 보면 창세 전에 이미 구원하시기로 계획되어 있었던 이름이었습니다. 그 일은 결코 갑자기 된 일이 아닙니다. 결코 뽕나무 위에 올라갔던 삭개오의 열심이나 이른바 구도심(求道心)이 주님을 감동시킨 결과 불려진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전에 계획된 부르심이었습니다.
③ 그 많은 여리고성 사람들 가운데서 삭개오를 구별시키는 음성이었습니다.
부름의 복음은 세상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을 빼내는 복음입니다. 세상에서 갈라 세우는 부름입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에서 갈라 세우는 부름입니다(창 12:1). 예수의 이름과 그의 부름 때문에 이 세상 집(가문)이나 부모나 형제나 친척이나 고향으로부터 갈라져 버리는 소명입니다.
④ 그것은 또한 삭개오를 개인화(個人化) 시키는 소명의 음성입니다.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세상의 어떤 덩어리에 붙어 밀착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 덩어리가 가문일 수도 있고, 어떤 문벌일 수도 있습니다. 그 덩어리가 우상 숭배의 헛된 종교일 수도 있고, 어떤 무서운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여러 형태의 어떤 그룹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일 수도 있습니다.
주께서 삭개오를 부르심은 그러한 세상 덩어리에서 떼어놓는 부름입니다. 말하자면 삭개오를 개인화 시키는 작업입니다. 여기서 ‘개인화’(個人化)란 말은 ‘개인주의’(個人主義)와 전혀 다른 의미임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주의는 자기를 왕으로 섬기는 인본주의입니다.
그러나 ‘개인화’란 말은 인간 창조 본연의 실존으로 복구시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창조가 개인 개인이었습니다. 타락도 개인 개인이었습니다. 구원도 개인 개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예정도, 부르심도, 중생도, 믿음도, 칭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됨도, 성화도, 인내(견인)도, 영화도 결국 개인 개인입니다. 범죄 이전에 지음받은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모두 개인적 실존이었습니다. 그 개인 개인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의 존재로서 무죄 세계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인생은 모두 그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결과 자신을 사탄에게 맡기고, 인생을 허무한 우상에게 맡겨 버리고, 아니면 세상이라고 하는 집단 사회의 통제 아래 자기를 밀착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사탄 운동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속해 있거나 믿는 덩어리에 집착하여 생사의 운명을 같이합니다. 이북에서 훈련받은 간첩들은 자결에 이르도록 잘못된 이념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상(神像)에서 인상(人像)으로, 인상(人像)에서 물상(物像)으로, 물상(物像)에서 축상(畜像)으로 인생이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붙어서 살아야 할 여호와 경외적인 인생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어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인생이 돼지를 치는 사람으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눅 15:12-16).
바울은 이 사실을 가리켜 인생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롬 1:25) 타락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롬 1:23). 말하자면 하나님께 붙어살아야 될 의존적(신뢰적, 경외적) 존재가 하나님 아닌 다른 피조물에게 붙어살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울아!’, ‘삭개오야!’, ‘마리아야!’ 하고 부르심은 그러한 세상의 덩어리에서 인생을 떼어놓는 개인화의 소명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위치와 자세로 되돌리기 위한 재창조 역사의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부름의 복음은 개인화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본래 형상의 복구를 목적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붙어 있게 하는 창조 본연의 의존적 피조물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에게 부름받은 사람은 예외없이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존재의 소속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우상 숭배에서 하나님 숭배로, 땅에서 하늘로,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과 영생의 자리로, 악령(사탄)의 지배에서 성령의 지배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근본적인 인격 혁명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5:17).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이라고 하였습니다.
적어도 ‘삭개오야!’ 부르시는 주님의 소명에는 삭개오 전 인생의 근본적 혁명(변화)을 목적하는 선택적 소명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이 세상에서 새로 이름을 얻은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입니다. 그리스도당,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사람이란 내용의 이름입니다. 아예 인생 족보가 바꾸어지고 만 것입니다.

Ⅳ. 삭개오를 재촉하는 화급한 소명입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은 다시 말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속히 내려 오라’(σπεσα κατβηθι)는 말은 동시적 행동을 요구하는 명령사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삭개오에게 들려지는 순간, 지체없이 내려 와야 하는 행동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지체하거나 머뭇거리거나 주저할 수가 없는 화급한 결과만을 요구하는 단호한 명령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행동의 기회를 촉구하는 명령입니다.

바로 여기에 부름의 복음의 특색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에게 결정적인 요구입니다.
집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런 경우 집안에 있는 자식을 향하여 속히 나오라고 하는 부모의 음성은 화급하기 짝이 없는 명령 이상의 절규인 것입니다. 홍수가 났습니다. 산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엄청난 흙과 돌멩이가 지금 무너져 버린 산턱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 산밑에 살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속히 나오라고 하는 외침이 있다면 그것은 명령 이상의 절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 곧 부름의 복음은 속히 나오라는 것입니다. 지체 말고 예수께로 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인류는 멸망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저 정배지 밧모섬에서 이 세상 종말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한 날을 맞이하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불심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8장에는 이 세상 마지막 역사의 현장이 온통 불바다가 되어 버릴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무서운 재앙의 날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사도는 이런 영감의 소리를 지릅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일이면 너무 늦어 버리고 말 경우가 있습니다.
스펄죤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내일’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달력에 없습니다. 내일! 이것은 어디에서도 없는 사탄의 달력입니다. 내일, 이것은 해변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약탈자의 불빛 같습니다. 내일, 이것은 무서운 유혹입니다. 내일, 아-내일. 여러분은 고통받는 지옥을 볼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시계 저 너머에서 ‘오늘’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맥박은 ‘오늘’이라고 속삭입니다. 나는 나의 가슴이 ‘오늘’이라고 고동치며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모든 것이 오늘이라고 소리치고, 성령께서도 연합해서 ‘오늘날 주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부르심에 지체하거나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그의 설교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속히 내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눅 19:5).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눅 19:9).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회개하는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구원을 허락했습니다(눅 23:43).
저의 형님은 늦게야 예수를 믿었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은지 27년이 지난 다음에야 기독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그 분이 중병을 앓으면서 개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남 진해에 사셨는데 서울에까지 와서 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분이 임종을 하면서 모든 가족들이나 고향 교회 장로님들과 성도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여러 면으로 확인시켜 주고 갔습니다. 그 분이 임종을 하면서 “너희들은 예수를 더 잘 믿어야 한다. 예수는 일찍이 믿으면 믿을수록 좋다.”는 말을 남기고 소천하셨습니다. 그 분은 늦게 예수 믿게 되었던 것이 후회되었던 것입니다.
속히 나와야 합니다. 속히 믿어야 합니다. 지체치 말고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정말 내일이면 너무 늦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름의 복음은 ‘속히 내려 오라’는 화급한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이 위대한 부름의 초청은 지금도 역사의 한가운데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시와 농촌과 산촌과 어촌에까지 속히 내려오라는 주님의 음성은 계속해서 들려 오고 있습니다. 강한 자에게나 약한 자에게나,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를 가리지 않고 속히 내려오라는 부름의 복음이 들려 옵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들에 이르기까지 예수에게 나오라는 복음의 초청이 쉬지 않고 있습니다. 그 수다한 무리들과 공간 가운데 주님이 찾으시고 부르시는 오늘의 삭개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교회가 받은 복음 전도, 복음 선교의 명령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역사의 끝날이 오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4:14). 그래서 교회는 온 천하 만민을 찾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가서 천국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막 16:15).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구원받을 모든 삭개오를 찾아서 세례를 주라고 하였습니다(마 28:19). 이 위대한 복음 초청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임마누엘의 승리를 약속하였습니다(마 28:20). 역사와 세계는 오늘의 삭개오를 부르는 예수의 음성이 들려 올 동안 아직까지는 그 존재적 의미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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