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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소 (출 10: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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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를 나타내는 웅변적인 대 사건입니다. 저들이 애굽에 머문지 430년이 되는 그 날에 이스라엘은 종되었던 애굽에서 기적의 해방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그 축복의 역사에 참여한 자를 가리켜 장정만 60만 명 가량이라고 기술하면서, 그 무리를 ‘여호와의 군대’라고 표현하므로 그 수의 많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출12:37-41).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토(吐)한 그 네 번째의 거절과 주장입니다.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소’하는 말은 ‘발굽 하나라도 남길 수 없다’, ‘조금도 남길 수 없다’는 당시의 격언적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Ⅰ. 애굽 바로왕의 회유책에 대한 강한 거부를 뜻합니다.

출애굽기 10장 24절에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바로의 회유책은 벌써 네 번째였습니다. 바로 앞에 나타난 모세는 「내 백성을 내어보내라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출애굽의 명제를 제시했습니다(출5:1). 물론 애굽의 바로는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의 바로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① 피(출7:14-25), ② 개구리(출8:1-15), ③ 이(출8:16-19), ④ 파리(출8:20-32), ⑤ 악질(출9:1-7), ⑥ 독종(출9:8-12), ⑦ 우박(출9:13-35), ⑧ 메뚜기(출10:1-20), ⑨ 흑암(출10:21-29), ⑩ 장자의 죽음(출12:29, 30) 등의 재앙으로 바로를 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재앙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모세를 통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내어 놓으라. 그들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출애굽의 명제를 제시하였습니다.
이때 바로는 모세에게 타협책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가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출8:25).
그때 모세는 그것은 불가하다고 거절하였습니다(출8:26). 이것은 바로가 이스라엘을 붙들어보기 위한 계책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향한 사탄의 유혹입니다.
두 번째는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8장 28절에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절하기를 왕을 떠나 기도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출8:29). 그리스도인을 향한 사탄의 유혹입니다.
그 세 번째는 남정만 가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0장 11절에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고 하면서 바로가 그들을 쫓아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 심판을 예고했을 때, 겁을 집어먹은 바로가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기를 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자가 누구 누구뇨」라는 질문을 했을 때, 모세가 답하기를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출10:8, 9). 그때 바로는 남자 장정만 가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과 부인들(가족들)과 재산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붙잡아 놓기 위한 바로의 술책입니다. 이것이 오늘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쓰는 유혹 중에 하나입니다. 전부가 아닌 부분만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합니다. 물론 모세는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그 네 번째는 우양만은 두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가 아홉 번째 흑암 재앙으로 두들겨 맞았을 때 제의한 술책입니다. 출애굽기 10장 24절에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끈덕진 사탄의 도전입니다. 이때 모세는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출10:25, 26).
우리는 여기서 바로 왕의 결사적인 유혹과 계책에 대하여 결정적인 거부의 답변을 하는 모세를 보게 됩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거절입니다. 결코 이럴까 저럴까 하지 않았습니다.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하고 단호한 거부였습니다. 결코 타협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시종이 여일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결코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일에 추호의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신앙적 주장이었습니다.

Ⅱ. 하나님 여호와 예배를 위한 목적적 수단임을 답하는 말입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서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는 명백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출애굽기 10장 26절에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중대한 대답입니다. 지금 모세는 그와 그의 백성이 왜 애굽에서 나가야하는가를 분명히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예배) 것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결정적인 목적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결코 정치적이요, 사회적이요, 경제적임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결코 정치적 해방 신학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길 구원 신학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 섬기는(예배) 필수적인 수단이 양과 소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리의 소나, 양이라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 섬김(예배)에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양과 소들은 하나님 섬기는 제물로써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내용이 있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그 백성은 저처럼도 하나님 섬기는 제물에 대하여 중요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물이 없는 예배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양과 소떼들 중에서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예배) 것인지, 아직까지 알지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모세는 그 전에 바로 왕 앞에서 이 사실을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출10:9). 사람뿐 아니고, 재물(牛, 羊)도 가지고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 섬기는 목적에는 재물(牛, 羊)이 수단으로 따라야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우양들 가운데 하나님께 구별되게 드려지는 제물은 지극히 적은 수입니다. 그 외는 모두 이스라엘 생존의 경제적 수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우양을 이스라엘이 하나님 섬기는 목적을 위한 경제 수단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진리는 바로 전 성경에 충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일반계시, 곧 자연계시(자원)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김에 필요한 수단으로 주신 것입니다. 만물은 다 인생 것이요, 인생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이 우주 존재의 대 질서요, 축복의 원리입니다(고전3:21-23).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것들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10:31).

Ⅲ. 완전 구속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 토한 말씀, 곧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소’하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위하여 계획한 모든 사람, 모든 재산은 완전히 다 애굽에서 나가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그리고 은이든, 금이든, 아니면 다른 보석이든 그리고 우양과 다른 생축이든,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다 가지고 나가야된다는 내용입니다. 결국 바로는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役事) 앞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출12:32). 심지어 이스라엘은 고센 땅에서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까지 옷에 싸고, 어깨에 메었습니다. 심지어 애굽의 은금 패물과 의복과 물품까지 구하여, 다 가지고 나왔다고 하였습니다(출12:34-36). 저들이 광야에서 하나님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모조리 다 가지고 나왔습니다. 한 마리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성경 표현은 이 세상에서 인류를 향한 당신의 구원을 완전히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완전 구속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완전 구속의 내용이 무엇일까

1. 전인(全人) 구원입니다-개인적 완전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전인(全人)으로 창조했습니다. 흙으로 육신을 만들었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므로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영육(靈肉)의 존재로 지었습니다. 육신(肉身)이 없는 영(靈)만의 인간이거나 영(靈)이 없는 육(肉)만의 인간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창2:7).
아담은 먼저 그 영이 하나님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그 후에 그 육도 함께 죽었습니다. 영육이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먼저 죽은 영을 살렸습니다. 복음을 듣는 영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부활입니다(요5:24-25). 그 다음에 죽은 몸도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요5:28-29). 그래서 바울은,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살고, 죽은 몸도 다시 산다고 하였습니다(롬8:10-11).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양분하지 않으십니다. 전인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일부분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전인을 요구합니다. 전부를 요구합니다. 전체를 소유하시기 원하십니다. 일생 중 어느 한 때(부분)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전 시기, 전 생애를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삶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한 곳도, 그 어느 부분도 남김없이 전인,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신 분입니다.

2. 전 교회(全敎會)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양 100마리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물론 상징적인 수입니다.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었다고 하였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은 들에 99마리를 남겨두고, 그 잃은 한 마리를 찾도록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눅15:7).
예수의 본수(本數)가 상징적인 100이었다면, 한 마리 없는 99는 완전한 본래의 수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만 4천인이 예정의 본수로 상징되었습니다(계7:4, 14:1). 그 수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표현되었습니다(계7:9). 그러므로 주님은 전 시대, 전 교회를 다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 중에 한 마리도 애굽(세상)에 남겨둘 수가 없습니다. 모두를 구원하여 하늘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3. 그것은 궁극적 완전 구원입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로 39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은 10장 28절로 29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남길 수가 없습니다. 애굽의 세상에 남겨두거나, 바로 같은 악마에게 빼앗길 수가 없습니다. 완전 구속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우리가 잠시 머물고 있는 세상은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합니다(계11:8). 큰 성들이요, 또 성 길들이라고도 합니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바로는 사단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선민 구원의 역사적 현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후손을 가나안의 흉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요셉을 먼저 보내어 그 일을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창45:1-8). 때가 이를 때 애굽의 총리 요셉으로 하여금 야곱의 가족을 애굽에서 부양하게 하고, 430년 어간에 큰 민족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때가 이를 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바로로 하여금 선민을 학대하게 섭리하고, 하나님은 그 백성 중에 모세를 세워 출애굽의 거사를 성취시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애굽 바로의 학대는 선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한 마리의 우양까지도 애굽에 남겨두지 않고, 당신이 받으실 영광의 제물이 되게 하기 위하여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말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현장이요, 무대입니다. 구원받기로 작정된 한 생명도 잃거나, 놓치거나, 빼앗기거나, 버리지 않고, 완전히 구원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지구와 지구 가운데 인간의 역사가 혼전을 거듭함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나중 세상 끝에는 온 세상이 다 일어나 교회(성도)를 박해할 것입니다. 그것은 택자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역사의 섭리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택자는 한 사람도 남길 수 없습니다.-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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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 20.
검은 말과 감람유와 포도주
-경제 공황()-
요한계시록 6:5-6

저 정배지 밧모섬에서 받은 사도 요한의 영감 기록은 반드시 속히 될 필연적인 종말계시였습니다(계1:1). 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택한 백성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요한 사도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입니다(계1:1).
오늘 주어진 본문은 사도 요한이 받은 세 번째 인 재앙의 계시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타나는 이 계시를 듣고, 보고, 기록하고, 전하는 축복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5절에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셋째 생물이 자기를 오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검은 말이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검은 말을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축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수종자 영물인 생물이 호출하는 음성을 듣고, 검은 말을 타고 있는 자의 모습과 그 손에 저울을 갖고 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네 생물 사이로 나는 듯한 또 다른 음성도 들었는데, 그 음성의 내용은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고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하지 말라는 소리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Ⅰ. 검은 말 탄 자의 출현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5절에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라고 하였습니다.
‘검은’ 빛은 슬픔(悲哀)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비애와 기근의 표상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5장 10절에 「주림의 열기로 인하여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4장 28절에는 「이로 인하여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흑암할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 하였은즉 또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흉년이 든 결과 사람들이 배고픔을 겪는 기근의 비애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전쟁과 흉년과 기근은 항상 함께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전쟁과 흉년 때문에 배가 고파 사람들의 피부가 영양실조로 새까맣게 타 말라 가는 아사 상태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나, 이것이 범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Ⅱ. 검은 말 탄 자는 일종의 경제 공황()의 상징같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5절에 「…그 탄 자의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고 했습니다. 검은 말 탄 자는 분명히 병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검은 말을 탄 병사는 거기에 걸맞지 않게 그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6장 6절은 그 저울에 달린 곡식 값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밀은 고등 식물로, 보리는 하등 식물로 취급되었습니다. 여기 ‘되’(Χονιξ)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보이는 낱말로서 당시 장정 하루의 식량에 해당됩니다. ‘한 데나리온’은 병사 또는 노동자의 하루 품값이었습니다(마20:2).
성경의 이러한 표현은 그렇게 곡식 값이 비싸다는 것입니다. 이 곡식 값은 당시 일반 시세의 12배, 또는 8배 내지 16배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상상을 불허하는 곡식 값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흑마 탄 자는 기근과 주림의 표상입니다.
에스겔 4장 16절로 17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경겁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민답 중에 물을 되어 마시다가 떡과 물이 결핍하여 피차에 민답하여 하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경제적 공황입니다. 경제적 공황으로 인한 주림과 배고픔의 환난입니다. 이는 자연적 흉년이나 기타 여러 경우의 재앙일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사용하시는 환난의 도구들입니다. 전쟁의 결과 노동력의 부족으로 땅이 생산력을 놓쳐 버릴 때도 있고, 또 많은 군비의 지출로 사회적, 국가적 경제가 파탄에 이르기도 합니다. 예컨데 2차 대전 중 레닌 그라드가 독일 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노동자의 품값이 겨우 한 끼의 빵을 구하는 정도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일제 식민치하와 625 동족 상잔의 비극을 통하여 이것을 뼈저리게 경험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백성들의 나태로 인한 소득의 감퇴나, 백성들이 허랑하고, 방탕하는 소비적 낭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여러 천재(天災)들로 인한 생산의 마비와 경제 유통의 마비 등일 수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것들을 사용하시는가
성경은 여러 경우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① 사람들의 배신과 교만을 경계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30장 9절에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밭의 소출이 풍성한 부자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부자는 고운 베옷으로 인생을 꾸미고 날마다 허랑하고 방탕했습니다. 양털 깎던 부자 나발도 그러한 자였습니다.
② 인간들의 자살 행위를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하였습니다.
경제지상주의, 배금주의, 황금만능주의를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③ 확실한 소망의 근거를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인생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전 소망을 거는 연약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6절에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결코 인생의 참된 소망은 물질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④ 참된 인생의 미래를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부를 믿고, 내세의 실존을 부인하거나 무시해 버립니다. 저들은 모두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고 합니다(사22:13). 인생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인줄을 자각하지 못합니다(약4:14). 배를 저들의 신으로 삼고(빌3:19), 오직 땅에 일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생이 인생됨을 교육하는 방법 가운데 그 하나가 전쟁과 흉년과 기근 등입니다. 물론 악인을 심판하는 섭리적 도구도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근이 세상 끝 날이 가까워 올수록 세계적으로 확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은 24장 7절에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Ⅲ. 환난(기근) 중에 풍요한 은혜

요한계시록 6장 6절에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장면을 나타내는 기록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 죽음의 기근 속에도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감람유와 포도주는 약용과 식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약5:14, 눅10:34, 사55:1). 이것은 풍성한 생명 종교의 상징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의 환난 속에도 살아남는 축복의 은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께서 친히 섭리하시는 은총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컨데 아합과 이세벨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전 이스라엘에 흉년으로 가득 찼을 때에도 아합의 궁내대신 ‘오바댜’는 100명의 선지자들을 두 굴에 숨겨두고, 떡과 물을 제공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사렙의 과부는 진리의 종 엘리야를 대접할 수 있었던 가루(빵)와 기름이 있었습니다. 시편 37편 19절에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전세계적인 기근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재림의 징조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 국가들이 풍요를 누리는 것 같지마는 사실상 10억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매년 400만이 넘는 생명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끔찍스러운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복음 선교를 위하여 「감람유」와 「포도주」를 은밀히 예비해 두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위한 특별 보급물과도 같이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경제 공황(經濟 恐慌)()이란 어떤 느낌마저 들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가 갑자기 혼란 상태에 빠져 산업이 침체되고 금융이 원활하지 못해서 경제적 혼란 현상이 일어납니다. 생산이 소비보다 훨씬 많아 물가가 떨어지고, 기업가는 파산하여 실업자가 많이 생기는 상황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자유경쟁의 생산체제입니다. 그 결과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깨어지는 경우가 일어나게 됩니다.
소비보다 생산이 훨씬 많아 갑자기 물가가 떨어져서 산업을 더 할 수 없는 경우가 일어나는 상태를 경제 공황이라고 부릅니다.
1929년 10월 미국에서 일어난 경제 공황을 대 공황이라고 부릅니다. 이 경제적 위기가 1933년까지 이르는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경제 공황이었습니다.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엄청난 국제적 불노소득(不勞所得)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겪은 구라파 여러 나라들에게 큰 이윤을 남기는 달러도 빌려주고, 패전 국가들의 부흥에 따르는 여러 면의 물자를 만들어 수출하므로 큰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후 피해를 입은 구라파 여러 나라들이 재생을 하게 되자, 높은 이윤의 달러나, 여러 류의 수출품들의 생산이 갑자기 중단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경제적 혼란을 겪게 되고, 이것이 다시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으로 파급이 되어 모든 나라들이 경제적 붕괴의 위험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황을 계기로 자본주의 경제 체질 개선과 국제 협력의 필요성이 촉구되어 미국에서는 관리 통제라는 정책이 생기고, 이른바 뉴딜 정책이 수립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 상태는 일종의 복합 불황(複合 不況) 현상()을 느끼게도 합니다. 이런 복합 불황 현상은 지난 90년도에 일본이 겪었던 일입니다.
당시 일본 경제는 부동산 거품이 빠지면서 찾아 온 일종의 복합 불황 현상으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부동산을 담보로 금융 기관으로부터 돈을 대거 끌어다가 쓴 대 기업이 잇따라 쓰러지고,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면서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부실 채권을 견디지 못한 금융기관이 연쇄적으로 파산하는 등, 경제 전체가 불황 국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에서는 주가 폭락, 수출 증가율 감소, 실업률 증가, 부도 기업 증가, 금융 기관의 부실 채권 등이 함께 연관성을 가지고 일어나는 이른바 복합 불황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만난 한국 경제도 일종의 복합 불황()의 현상을 느끼게 합니다. 오랫동안 자리 잡은 구조적인 경제와 금융의 부조리가 권력, 이른바 관치 경제와 맞물려서 일어났습니다.
여러 대 은행들은 그 동안 대 기업들에게 빌려 준 돈을 환수해야되고, 대 기업들은 그 돈을 환수하려고 하니 안 돌아가고, 그 결과 이른바 구조조정이 해결책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빅딜’이라고 하는 생소한 이름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고, 그 결과 250만이 훨씬 넘는 실직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생존 투쟁으로 이어지는 노동자의 데모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생산에 차질이 일어나고, 수출에 타격이 왔습니다. 돈은 유통이 안되고, 그 결과 중소기업은 부도 사태를 면치 못하고 사양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해 온 금융기관이 부실 채권 증가로 이미 파산되었고, 또 파산의 문 앞에 서 있는 경우들입니다. 여기에다가 정치권의 정쟁(政爭) 싸움은 앞이 안보이게 되니, 결과적으로 마이너스 경제 성장의 지표가 백성을 불안하게 합니다. 아무도 뚜렷한 경제 전망을 시원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현상이 세계적으로 확대가 되는 때가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세계적인 기근입니다.
참으로 검은 말 탄 자가 손에 저울을 잡고 있는 기분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감람유와 포도주」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환난 속에도 하나님이 비밀히 남겨 둔 은혜를 가리킵니다.
시편 34편 7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 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시편 34편 9절이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시편 34편 10절에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31편 19절에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남겨두신 「감람유」와 「포도주」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남겨두신 「감람유」와 「포도주」는 하나님 백성의 소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 주시는 특별한 축복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남겨 두신 선교 자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사모하는 자는 검은 말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는 극한의 환난 때에도 이 「감람유」와 「포도주」를 마실 것입니다. 이 축복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아멘-

199

8.

9. 2

7.
죽임을 당한 영혼들
-순교신앙-
요한계시록 6:9-11

예수의 제자 사도 요한이 정배지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해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 황제 도미티안(Domitian) 때, 핍박을 받아(A.D. 95) 그곳까지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는 에게해 바가 가운데 자리잡은 무인고도(無人孤島)의 밧모섬에서, 주일 아침,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 뒤에서 들려온 큰 나팔소리 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계1:10). 그는 바로 그 시간, 그곳에서, 부활하신 영광의 주 예수께서 자기를 찾아오신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으로부터 반드시 속히 될 종말 역사의 계시를 받았습니다(계1:1, 11-20).
우리는 지금 사도가 받은 영감 계시 중에 핍박의 상징인 인 재앙 중에 그 다섯 번째 인을 떼실 때, 사도 요한이 체험한 환상 계시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땅의 지상 교회가 아닌 천상 교회의 보좌였습니다(계6:9).
사도 요한은 뜻밖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보게된 것입니다. 저들은 모두 「제단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란 ‘생명’이란 말로 ‘땅에서 순교 당한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Ⅰ. 왜 죽임을 당했던가

요한계시록 6장 9절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성경은 저들이 이 세상에서 순교를 당한 이유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신앙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6장 9절을 더 확실히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말씀인가
① 그 말씀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란 사실 때문입니다.
결코 성경의 진리는 어떤 개인의 의견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법률의 조문도 아닙니다. 어떤 심리학자의 의견서도 아닙니다. 어떤 철학자의 교양문제나, 정치적, 사상적 이상도 아닙니다. 물론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를 나타내는 학설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② 또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은 진실, 곧 참의 말씀이었습니다.
오착이나, 거짓이나, 허실이 아닌 진실, 곧 참된 말씀입니다. 천지 창조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진리(진실)입니다. 그의 오심과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진실입니다. 한편 구석에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인공지의 역사적 사건의 사실입니다.
③ 그가 허락하신 구원과 구원의 약속이 진실입니다.
그 진실한 구원의 약속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인격의 지성소에서 효력을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믿는 자의 마음속에 살아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④ 그 말씀은 우리에게 진실한 명령입니다.
사람들은 그 말씀의 명령을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아니하면 죽는 줄을 압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사람의 명령이나 말을 듣고 따름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지키고 따라야 되겠다고 하였습니다(행4:18, 19). 그 이유는, 저들이 예수 사건의 진실을 보고, 들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의 명령은 바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행1:8, 마28:18-20).
그래서 순교자들이 그 말씀에 저들 삶의 전 승부를 걸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교자들이 순교당한 본질적 이유가 인간 자신 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 자신들의 고집이나, 주장이나, 열정이나, 어떤 이상의 향수에 젖어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객관적 이유, 곧 하나님 자신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 둘째 이유는 그 말씀의 증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계6:9).
여기에도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증거」란 법적 용어입니다. 이는 법정에 출두하여 어떤 사건을 증명하는데 책임을 지고, 그 사건을 확증하는데 쓰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증거」란 말은 ‘증인’이란 말과 상관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에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고, 그 제시하는 바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때 그 증인은 자기가 보고, 들은 바를 사실대로 증거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거」란 ‘증인’입니다. 그 말씀의 뜻 자체가 ‘죽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증거하는 증인은 ① 그 어떤 사건을 확실히 보아야 합니다. ② 또 들어야 합니다. ③ 그 보고 들은 것을 사실대로 말하기 위하여 증언대에 나서야 합니다 ④ 그리고 사실을 증언(말)해야 합니다. ⑤ 그 증언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⑥ 그 책임에 죽음이 따라 왔습니다. 이것이 순교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순교 이유는 명백합니다. 먼저 말씀(진리) 신앙이고, 그 다음에 그 신앙에 대한 증거(행위)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확실히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9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7절 중에는 용이 「그 여자의 남은 자손(교회) 곧 하나님의 계명(말씀)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날에 교회가 순교를 당하는 이유도 말씀과 증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계14:12).
그렇다면 말씀에 대한 신앙은 구원입니다. 그 말씀 증거는 자기 신앙고백에 따르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것은 상급, 곧 축복과 연결됩니다. 여기에 신앙과 행위의 일치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말씀과 증거’는 ‘신앙과 행위’의 일치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비유 중 좋은 나무는 구원의 말씀 곧 신앙이고, 좋은 열매는 바로 증거의 행위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들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 이유입니다.

Ⅱ.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탄원

요한계시록 6장 9절로 10절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땅에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영이 하늘 보좌(제단)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대 주재이신 하나님 앞에서 ‘큰 소리’를 질렀다고 하였습니다. 소리는 일종의 탄원이었습니다.
그 탄원의 내용은,
①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계6:10).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원했습니다. ② 그리고 순교자 자신들이 흘린 피도 신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땅에 거하는 총독들과 임금들과 여러 류의 이방인들에게 끌려가고, 심문을 당하면서 무참히 죽임을 당했습니다. 온갖 류의 배금주의자들과 향락주의자들 그리고 배신자들로부터 예수 때문에 피를 흘렸습니다. 바른 예배, 바른 전도, 바른 진리, 바른 구원, 바른 소망을 외치다가 인권이 유린을 당했습니다. 자유가 박탈을 당했습니다. 재산이 착취를 당했습니다. 가족들이 내쫓김을 당하고, 유리 방황하는 처절한 비참을 씹었습니다.
저들은 저들의 피를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신원해 주셔야 한다고 탄원한 것입니다. 썩을 수 없고, 없어질 수 없는 살아 있는 피 소리였습니다. 아벨의 피 소리, 사가랴의 피를 위시하여 이 세상에서 예수 복음 때문에 흘린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이 토하는 탄원이요, 절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바벨론이 하나님의 불 심판을 당하여 온 천지가 잿더미가 되어버린 폐허 속에도 이 땅에서 흘린 순교자의 피가 불타지 않고 빛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계18:24).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공의만이 대답을 할 수 있는 탄원이 아닌가!

Ⅲ. 죽임을 당한 영혼들에 대한 위로

요한계시록 6장 11절에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① 각인에게 입혀지는 흰 두루마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칭의, 신앙 수절자에게 주는 승리와 상급과 영광의 보증입니다.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표식입니다(계7:14).
② 안식의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잠시 동안만 쉬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순교자들의 지상 생애는 가득 찬, 수고 위의 수고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에게 잠깐만 쉬라고 안식의 위로를 주었습니다.
③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지상 교회에서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계6:11)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상 교회는 아직까지 순교자의 시대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헤미아의 순교자 제롬(Jerom)은 순교자 요한 허스(J. Huss)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선생과 함께 진리 운동을 하다가 그 선생 허스가 순교당한 후 잡혀갔습니다. 그는 고문에 못이겨 자신이 선생과 함께 주장하던 진리를 포기하고 석방되어 나왔습니다. 그 후 그는 언제나 양심의 고통을 겪다가 마침내 자진해서 박해자를 찾아가서 다시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그의 형(刑)은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火刑)이었습니다. 그는 화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이야말로 우리 선생 요한 허스에게 진 빚을 갚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태우는 불꽃 중에 15분 동안이나 찬송하면서 숨져갔는데, 그가 불꽃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주께서 나를 위하여 가시 면류관 쓰신 것처럼, 나는 그를 위하여 능욕의 면류관을 쓰노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윌리암(William) 목사는 ‘환난이야말로 위장(가장)하고 오는 축복이다.’(Blessing in Disguise)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앞서 간 순교자들의 발자취에서 무엇을 배우고, 받을 것인가
① 구원의 은총에 죽기까지 감격한 열정적 신앙을 보면서 나의 냉냉하고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해야할 것입니다.
② 저들이 죽기까지 수절한 그 확신을 보면서 나의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회의적인 신앙 태도를 부수어 버려야할 것입니다.
③ 죽음도 불사한 저들의 인내를 보면서 나의 단기적이요, 감정적이요, 순간적인 옅은 신앙의 뿌리를 새롭게 착근(着根)시켜야 할 것입니다.
④ 저들이 이 세상을 분토같이 버리면서 죽기까지 즐거워한 확고한 내세 신앙을 보면서 너무나도 금세적이요, 기복적이요, 이기적인, 나의 땅에 붙은 육체의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것입니다.
⑤ 순교자의 피가 없어지지 않고 살아 있어서 말을 하고 있는 이 위대한 피 소리를 들을 때, 정의의 복음이 이기고 만다는 주님의 약속이 얼마나 달콤한가를 감지해야 할 것입니다.
⑥ 순교자의 수가 아직까지 교직자와 평신도 중에 남아 있다는 성경을 볼 때,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신앙 수절의 각성을 해야할 것입니다.
⑦ 결코 순교자의 신앙은 이 죄악 세상에서 불신앙과 비진리와 타협할 줄 모르는, 오직 외길 신앙임을 생각할 때, 시시 조석(時時 朝夕)으로 다변하는 우리들의 보호색적인 기회주의의 악습을 도려내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⑧ 이 세상 도성에서 버림받은 순교자들이 하늘의 보좌에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앉아 있는 사실을 볼 때, 현재의 고난과 장차의 영광은 실로 비교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 때문에 옷 벗김을 당했으나 하늘에서는 예수로 말미암아 옷 입힘을 당했으니, 교회들이여!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의 미래를 확실히 소망하라!
⑨ 순교는 내 힘, 내 고집, 내 주장,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절대 신앙과 증거하는 신앙 행위가 만나는 일치의 경점이 순교의 영광이 아닌가! 그것은 오직 은혜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信) 행(行) 일치의 삶이 순교적 삶이 됩니다.
⑩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종자’라고 한 교부의 말은 2000년 기독교에 살아 있는 위대한 웅변이 되었습니다. 순교자가 많이 나온 그 가정, 그 교회, 그 나라, 그 민족은 결국 축복을 받고 말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 한국 교회 부흥의 밑거름이 앞서간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아니었던가
⑪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다음의 순교 시대가 언제인가 순교자의 고장이 어디인가 경건자의 요람지가 어디인가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내 차례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내 가정, 내 교회가 마지막 순교자의 고장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⑫ 순교는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주 앞으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시대가 아닌 평화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도 순교와 맞먹는 영광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것은 평화 시대를 사는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바로 내 생의 최고의 시간과, 물질과, 몸을 주께 바쳐 사람의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전도와 선교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기까지 이르는 복음 전도 운동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헌신적 충성입니다.
복되게도 저와 여러분은 순교자의 후예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순교자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를 위시하여 순교적 신앙으로 투옥 생활을 하던 출옥 지도자 고(故)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님 등이 세운 고려신학교의 후예들이 되었습니다.
금번에 우리 교회가 새 성전으로 옮긴 후 처음으로 이런 순교자의 후예들을 모시고, 간증 부흥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출옥 성도 조수옥 권사님과 고(故) 주기철 목사님의 4남 주광조 장로님, 사랑의 원자탄으로 살았던 손양원 목사님의 장녀 손동희 권사님을 모셨습니다. 큰 축복의 은총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순교적 신앙의 재무장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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