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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의 의의1 (욥 0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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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서에 나타난 큰 문제들이 있습니다. 과연 공의로운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악인들이 세상에서 형통함을 묵인하고 계시는가 제지할 힘이 없으신가 왜 의인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당하는가 과연 하나님은 이 세상의 도덕과 질서를 유지함에 주권적 행사를 발동하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들입니다.
그 중에도 왜 하나님을 믿는 의인들이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문제가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의인이 당하는 고난의 의의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먼저 의인 욥을 봅니다.

우리는 욥이라고 하는 인물이 족장시대의 인물이라고 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따릅니다. 그것은 여기 욥기에 나타난 여러 삶의 환경들이 족장시대의 문화적 여건의 표현들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욥의 사람됨을 명백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그는 큰 경건자였습니다.
그의 큰 경건은 몇가지 경우에서 볼 수 있는데,
① 먼저 자신과의 관계에서 ‘순전’했다고 하였습니다(욥1:1). 이 말은 그가 도적적으로 무흠한 자였음을 뜻합니다.
② 타인과의 관계에서 ‘정직’했다고 하였습니다(욥1:1). 이는 그의 대인 관계성(對人關係性)이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했다’는 의미로 ‘곧은 사람’, ‘옳은 사람’의 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③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라고 하였습니다(욥1:1). 말하자면 큰 신앙의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④ 성결(성별)의 사람으로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였습니다(욥1;1). 말하자면 그는 악한 죄악의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⑤ 뿐 아니라 그는 범사에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욥기 1장 5절에는 그가 매일 매일 가족들의 성결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번제란 단어는 노아 홍수 이후 처음으로 사용된 단어였습니다(창8:20). 이러한 생활은 욥의 삶에 규례가 되고 버릇이 되고, 생리가 되었습니다. 습관이 되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1:5)고 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이러한 욥의 큰 경건의 삶을 자랑했습니다. 욥기 1장 8절 중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한 사실입니다. ‘여호와 경외’를 자기 삶 전부로 삼았던 자였습니다(전12:13).

2. 그는 사회적으로 큰 사람이었습니다.
① 먼저 그의 사회적 영향은 그의 큰 물질적 ‘부’(富)였습니다. 욥기 1장 3절에 「그 소유물은 양이 칠 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 백 겨리요 암 나귀가 오 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라고 한 사실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대단한 거부였습니다.
② 뿐 아니라 그는 사회적으로 명예를 떨친 사람이었습니다. 욥기 1장 3절 하반절에「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 ‘큰 자’란 말은 ‘왕’(王)을 뜻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동방 사회에서 그의 위인 됨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Ⅱ. 의인에게 임한 고난입니다.

1. 의인에게 임한 고난은 하나님 자신의 섭리적 산물(攝理的 産物)입니다(욥1:8-12).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경건과 위인 됨을 자랑하였습니다(욥1:8). 그때 사탄은 하나님께 항변하기를 “욥이 그렇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모든 것이 부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여유 있는 경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삶의 환경이 어려워지면, 그도 별 수 없이 ‘주’를 욕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사탄으로 하여금 욥에게 환난을 더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의인에게 임하는 환난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결재 아래서 오는 신적 산물(神的 産物)입니다. 욥은 그가 받은 여러 류의 환난이 예외 없이 하나님 자신께로부터 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욥기 16장 7절과 8절에는 「주께서 나를 곤고케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또 「주께서 나를 시들게 했다」고 했습니다. 욥기 7장에서도 죽음에 이르는 그의 고난이 하나님의 기쁘신 작정 속에서 나왔다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2. 의인에게 임한 고난의 참상들은 전 생(生)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① 그것은 먼저 물질적 환난이었습니다.
스바 사람의 침략을 받아 소와 나귀를 빼앗기고, 그 종들이 저들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급보였습니다(욥1:15, 1차 시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양과 종을 살라버렸다는 소식이었습니다(욥1:16, 2차 시험). 갑자기 갈대아 사람이 세 떼로 몰려와서 약대를 빼앗아가고 종들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욥1:17, 3차 시험).
그래서 욥은 순식간에 그 많은 재산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일시에 알거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그가 만난 물질적 시험이었습니다.
② 자녀 10남매의 급사(急死)였습니다.
욥의 모든 자녀들이 맏형의 집에서 잔치를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대풍이 와서 집 모퉁이를 침으로 집이 무너져 집안에 있던 그의 10남매가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다는 비보였습니다(욥1:18, 19, 4차 시험).
우리는 이러한 성경에서 아주 이상한 장면을 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욥에게 급보가 들려와서 그 소식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종이 오고, 그 종의 소식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종이 와서 환난의 급보를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욥1:16, 17, 18). 또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욥1:15, 16, 17, 19)라는 말도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절단 나 버리는 극악의 사태 중에서 꼭 한 사람의 목격자가 살아 남아서 그 비극적 참상의 현장 소식을 욥에게 전하도록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환난의 진상은 욥에게 임한 환난이 ⓐ 아주 계획적이고, 의도적이고, 목적적이고, 필연적인 시험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 순식간에 불어닥친 불가항력적 시험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 평안하고 즐거운 행복한 생활 중에 갑자기 당한 시험들임을 보여 줍니다. ⓓ 신앙의 사람이 당하는 시험이라는 사실에서 더욱 의미 심장한 것입니다.
③ 자신이 죽음에 이르는 질병의 환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은 욥의 몸을 쳤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습니다. 그는 집안에 거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악창으로 인한 냄새와 살갗이 썩어 흐르는 진물을 감당할 수 없어 잿구더기 가운데로 거처를 옮기는, 산송장이 되어 버렸습니다(욥2:7, 8).
④ 아내로 말미암는 환난이었습니다.
욥은 재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절개를 변치 않았습니다. 그때 그를 수종들던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향한 순전(純全)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고 하였습니다(욥2:9).
⑤ 그의 네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과 엘리후로 말미암는 시험이었습니다.
저들은 욥에게 한결같이 욥이 겪는 고난은 욥 자신의 죄 때문일 것이라고 직접, 간접으로 그를 괴롭혔습니다. 저들은 수없이 욥의 마음을 번뇌케 하고, 아프게 했다고 하였습니다(욥19:2, 3).
⑥ 욥을 수종들던 그 많은 종들로 말미암는 시험이었습니다.
저들은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고 그에게 등을 돌렸다고 하였습니다(욥19:15, 16).
⑦ 욥의 형제들을 위시하여 욥의 집에 머물렀던 여러 객들과, 이웃 동포들까지도 욥을 외면하고 욥을 모르는 외인처럼 대하게 되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욥19:13-20).
⑧ 더욱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욥의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시험이었습니다(욥19:6, 7).
더 이상 그 무엇으로도 욥을 괴롭게 할 것이 없을 만큼 그는 죽음에 이르는 환난을 겪고, 고난을 씹고 있었습니다. 인간 욥이 생각하고, 갈 수 있는 자리는 죽음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해가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아 버리셨다」고 하였습니다(욥19:9, 10). 인생과 고난과 죽음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Ⅲ. 고난의 의의(意義)

고난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코 그것은 우연의 산물일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악인에게 임하는 고난이든지, 의인에게 임하는 고난이든지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결재와 주관 아래서 오고 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의인, 곧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하는 고난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욥기를 중심하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1. 절대하신 하나님의 주권(主權)신앙을 체험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욥은 물질적 환난과, 순식간에 자녀를 잃어버린 환난의 비보 앞에서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 주권 사상(主權 思想)을 고백하는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실 자유가 있다고 고백한 사상입니다. 욥은 자신이 오직 하나님 자신의 전적인 지배 아래 살수밖에 없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절대하신 하나님 주권 신앙이 어떻게 나타났던가1) 인간의 과거 곧 본래를 바로 앎에서 나타났습니다.
욥기 1장 21절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으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날 때부터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었던 존재라고 고백했습니다. 솔로몬도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전5:15).
2) 인간의 현재를 바로 앎이었습니다.
욥기 1장 21절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누린 수많은 재산과, 자녀들 그리고 아내, 부자라고 하는 명예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것임을 고백했습니다.
3) 인간의 마지막을 바로 앎이었습니다.
욥기 1장 21절에 다시 말하기를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고 했습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인생의 마지막 정돈은 그 하나님에게 가서 끝이 난다고 하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4) 그 하나님께 인생의 본분을 다하는 신앙, 곧 예배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절대하신 하나님의 주권 앞에 드리는 욥의 예배는 몇 가지 특색이 보입니다.
ⓐ 먼저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욥기 1장 20절에 「욥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욥이 넘어졌다거나, 기절했다거나, 좌절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지고하신 하나님을 뵈옵고저 하는 최상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는 환난의 폭풍을 타고 오시는 하나님을 영접하고자 일어났습니다.
ⓑ 겉옷을 찢는 예배였습니다. 욥기 1장 20절에 「…겉옷을 찢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정을 쪼개는 회개를 가리킵니다.
ⓒ 머리털을 미는 예배였습니다. 욥기 1장 20절에 「…머리털을 밀고…」라고 하였습니다. 머리는 인생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예배는 겸손의 예배였습니다.
ⓓ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고 하였습니다(욥1:20). 이는 최고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였습니다. 욥기 1장 21절 중에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주권 신앙에 자리잡은 욥의 예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욥1: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숨쉬는 여기는 결코 천국이 아닙니다. 정말 의인과 악인이 함께 섞여 사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때로는 악인이 득세하고, 아니 악인의 세상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 안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을 향한 순전과 이웃을 향한 정직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신앙)라고 하는 그 선한 이유, 복스러운 이유들 때문에 세상에서 더 큰 고난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복음 선교라는 이유 때문에 고난을 겪고, 하나님을 향한 주일 예배 성수와 여러 사랑의 선행들 때문에 뜻하지 않은 고난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 고난이 어떤 때는 죽음에 이르는 순교적 환난에까지 이릅니다.
이런 극한 환난의 태풍 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만이 온 세상을 주장하신다」, 「하나님만이 전 세계를 지배하신다」는 하나님 절대 주권 신앙을 경험하는 도구로, 그가 만난 고난의 의미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임한 ‘고난’을 결코 무의미하게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온갖 류의 일들을 하나님 절대 주권주의 신앙으로 감사하고 받으면 그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음을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199

8. 10. 1

1.
고난의 의의(2)
-성화-
욥기 42:1-6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온통 하나님 자신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성도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라고 하였습니다.
영감의 사도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11:33)라고 하였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11:36)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우연이나 무의미가 자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이 세상에서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야말로 난제 중에 난제 같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바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 살던」 동방 우스 땅의 큰 사람 욥의 경우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날마다 온 가족의 성결을 위하여 번제(예배) 생활로 그 삶의 중심을 이루고 살던 자가 아닌가(욥1:8)
그러던 욥에게 죽음에 이르는 극한 고난의 태풍이 불어닥치고 말았습니다. 그 많은 재산과 종들이 절단이 나버렸습니다. 그 몸은 살았으나 죽은 송장과 방불하였습니다. 그로 인한 아내의 원망과 친구들의 조소와, 종들과 형제들과 여러 객들 그리고 동포들에게 조차 그는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이르고 있던 욥이었습니다.
의인 욥의 고난은 우연이었을까 돌발적이었을까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아닙니다. 우리는 욥의 고난에 의의를 성경에서 그 대답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Ⅰ. 그것은 절대하신 하나님의 주권 신앙을 체험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욥1:20-21).

하나님 자신의 자존적 영광, 그 영예로운 속성과 완전성,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 결코 거부당할 수 없는 그의 전능,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의 영광, 꺾일 수 없는 그의 정의, 도전받을 수 없는 그의 엄위하신 주권을 체험케 하는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창조와 통치 그리고 섭리를 체험시키는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주이시오, 우리의 주님이시오, 끝까지 우리의 신(信)망(望)애(愛)가 되시는 분임을 체험시키는 수단이 욥에게 임한 고난이었습니다. 결코 악인에게 임하는 형벌이 그리고 의인에게 임하는 궁극적 축복이,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공의로운 주권적 계획임을 알게 해주는 고난이었습니다(욥1:20-21).

Ⅱ. 성화적(聖化的) 삶의 수단이었습니다.

욥기 42장 5-6절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욥의 이러한 말은 그가 당했던 ‘고난의 의의’를 확실히 대답해주는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는 말은 부요하였을 때의 신앙 생활에서 보다 환난 중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실감있게 체험했다는 고난의 참된 뜻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은 욥의 신앙을 성장시킴에 필요한 성화적 수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성화적(聖化的) 내용들이 무엇인가

1. 죽음의 실존에 대한 바른 이해였습니다.

욥은 환난을 당할 때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경험하는 공감적인 지식인 것 같습니다. 이때 불신자들은 죽음을 우연으로 돌리고, 싫지마는 받아드립니다. 그리고 자살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의 죽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결코 자신의 목숨은 자신에 의해서 끊어지거나 주장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자기의 생명을 끊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욥6:8, 9). 그래서 그는 죽는 것을 사모한다고 하였습니다(욥6:8).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고, 위로받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6:10). 욥기 13장 15절에도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욥의 심리는 염세적 사상이나, 자기 포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예 그 뜻에 순종하고 말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한 번 죽기로 작정된 마음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해도, 그 마음은 늘 안정되어 있습니다(시57:7).
월터 랠리드(W. Releght)란 성도는 죽으면서 하는 말이 ‘죽음은 아프지만, 모든 병을 고치는 양약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불사의 몸을 덧입는 영화로운 부활의 몸을 내다보고 한 말입니다.
영국의 찬송 작가 테일러(T. R. Taylor)는 청년 시절에 죽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나는 길가는 나그네니…’라는 찬송을 작곡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용사와 같이 검을 손에 들고 죽노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약속된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가는 것을 뜻함입니다.

2. 내세(天國) 소망의 신앙입니다.

욥은 극한 환난 중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뜻하신 계획대로 자기를 데려갈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기뻐하고 사모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세계, 곧 내세(天國)를 소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믿겠다’(욥13:15)고 하였습니다. 욥기 19장 25-27절에도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육체 밖에서 살아 계신 그의 구속자를 볼 것이라는 확실한 내세 신앙을 가졌습니다.
내세 신앙의 체험은 죽음이라고 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더 확실해지고, 더 분명하게 직감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그에게 임한 죽음의 환난 속에서 그것을 기다린 것은 빨리 그 고통을 벗어나 주님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영원을 사모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잠언 14장 32절은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기도의 인내였습니다.

죽음에 이른 환난 앞에서 죽음을 실감한 욥은 기도밖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의 생각대로 하나님은 그를 빨리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달째 곤고의 밤들이 계속된다고 몸부림쳤습니다. 밤이 오면 아침을 기다리고, 낮이 되면 밤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숨쉬는 호흡이나, 잠자는 것까지도 마음대로 못하도록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고 토로(吐露)하였습니다. 침 삼키는 것조차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육체뿐 아니라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다고 부르짖었습니다(욥7:). 욥기 16장에서는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고, 곤고케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나를 꺾고, 다시 꺾고 용사같이 내게 달려드신다고 하였습니다(욥16:14). 그때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욥16:16). 그때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린다」고 하였습니다(욥16:20). 그 눈물 속에 올리는 자신의 기도는 「정결하다」고 하였습니다(욥16:17). 그는 인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 인내를 기도와 함께 감수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5장 11절은 「욥의 인내」를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4. 말씀의 은총입니다.

욥기 6장 10절에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의 태풍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 당신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 은총의 방편이었습니다.
욥기 38장 1절부터 41장까지는 고난의 태풍 속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당신의 주권적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그가 당하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심, 바다를 통치하심, 새벽 별을 주장하심, 어둠의 세계를 주장하심, 기후변천을 주장하심, 별들의 움직임과 번개를 주장하심 그리고 구름과 비를 주장하심에 대한 메시지를 주었습니다(38장).
그리고 산 염소와 암사슴의 생육, 들 나귀의 거처, 들소의 성격, 타조의 어리석음, 말의 힘과 용기, 매와 독수리의 지혜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알려주었습니다(욥39장)
하나님께서 악어를 길들임을 말씀하였습니다(욥41장).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네가 창조하고 관장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욥은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욥은 창조의 능도 없었고, 통치와 섭리의 지혜도 없었기 때문입니다(욥39장). 사람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창조하거나 통지하거나 섭리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알려주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욥을 고난의 태풍 가운데 두시고 위대하신 당신의 주권적 창조와 통치와 섭리를 교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고난 속에서 주의 말씀을 받는 순간입니다. 위대하신 주님의 말씀을 받고, 듣고, 깨닫고, 믿는 고도의 영적 성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성도는 고백하기를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고난을 통하여 주의 말씀을 깨닫고 지키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5. 종의 신분을 확인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허락하신 환난의 태풍을 정돈하실 무렵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괴롭혔던 세 친구에게 노하시면서 저들에게 욥을 다시 인식시켜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 종 욥」에게 너희가 말한 것들이 정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욥42:7). 「내 종 욥이」 「내 종 욥의 말 같이…」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욥42:8).
하나님은 욥을 가리켜 「내 종 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전에도 사탄 앞에서 욥을 소개할 때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고 한바 있습니다(욥1:8).
그렇다면 그는 순경 중에도 「하나님의 종」이었고,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종」이었고, 환난 후에도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종」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최후를 설명할 때도 썼던 말입니다(신34:5).
이 말은 하나님이 그가 즐겨 쓰시는 사람들, 좋아하시는 사람들,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즐겨 쓰시는 일종의 애칭과도 같습니다. 저들이 얼마나 하나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욥은 환난을 통하여 그에게 다시 한번 빛나고 영예로운 이름이 확인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환난의 태풍을 가지고 욥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욥은 죽음에 이르는 고난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습니다. 맹목이 아닌 목적이었습니다. 무의미가 아닌 의미였습니다. 왜, 의인들에게 고난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진리였습니다. 말하자면 고난의 의의(意義)를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대하신 하나님 주권 신앙을 체험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성장하는 신앙, 곧 성화적 신앙을 위한 섭리적 환난이요, 고난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주신 고난을 통하여 그 신앙이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했는데,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고도의 영적 수준에까지 오르게된 것입니다.
그는 그 고난을 통해 ① ‘죽음’ 준비를 제대로 하게되었습니다. ② 죽음 후에 있는 내세 신앙이 더 뜨거워지고, 확실해졌습니다. ③ 하늘의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는 정결한 기도와 인내를 배양할 수 있었습니다. ④ 그 고난 속에서 꿀과 송이 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미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⑤ 그리고 고난 속에서 그가 「여호와의 종」인 자신의 영예로운 신분이 더 빛나게 되었음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난은 하나님의 절대하신 주권 신학을 배우는 학교가 아닌가! 신앙의 성장을 맛보는 성화 신학의 요람지가 아닌가!
예수 십자가의 진리를 따라갔던 제자들(사도들)이 모두 순교에 이르지 않았던가 그 사도적 신앙을 계승한 초기 박해 300년 동안의 위대한 지도자 폴리갑(Polycarp), 익나티우스(Ignatius), 유스티노(Justin Martyr), 키프리안(Cyprian)이 모두 고난의 용사들이 아니었던가 초기 중세기 저 영국의 위클립(J. Wycliffe), 보헤미야의 허스(J. Hus)가 고난의 등불이 아니었던가 중세 개혁시대 루터(M. Luther), 칼빈(J. Calvin), 파렐(G. Farel), 베자(T. Beza), 요한 낙스(J. Knox)가 모두 다 고난의 별들이 아니었던가
이것이 바로 죽음을 통하여 생명이 나오고, 자기 희생을 통하여 영광의 결실을 보고 마는 고난 종교의 특색이 아닌가
-다음 주 계속-

199

8. 10. 1

8.
고난의 의의(3)
-축복-
욥기42:1-16

세계적인 문호 버나드 쇼(Bernard Shaw)는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내 생활에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절망이요, 다른 하나는 내 마음의 소원대로 되어질 때의 절망이다. 마음의 소원대로 되지 않는 때도 절망이지만, 마음의 소원대로 되어진 결과의 절망은, 그것이 또 시원하지 못한데서 오는 절망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진실한 그의 고백입니다. 해 아래 사는 여기 세상에는 그 어느 곳이나 100%의 만족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천국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택자 구원 성취를 위한 구원사의 현장, 곧 선교의 무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구령운동의 장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는 그 존재와 의미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방 우스 땅의 큰 사람(부자, 왕) 욥에게 고난의 태풍을 더 했습니다. 비록 그 인격은 순전하고 정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지만, 그는 아직도 세상에 자리를 잡고 사는 세상에서의 성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고난(환난)이라고 하는 특별 학교에 입학 시켰습니다. 그 고난의 종목들은 욥의 전 인생을 죽이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이란 학교에서 진정한 고난의 의의를 전수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난의 의의’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이 고난에서, 자신이 당한 고난이

Ⅰ.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의 수단임을 배웠습니다.
Ⅱ. 성화적 신앙(성장하는 신앙)의 수단임을 배웠습니다.

Ⅲ. 더 큰 축복의 수단임을 배웠습니다.

욥이 고난의 학교에서 받은 축복은 대단했습니다. 그 축복을 대별(大別)하면 영, 육의 축복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집약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욥기 42장 10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곤경을 돌이키다」(-)라는 말의 본래 뜻은 ‘외국에 잡혀갔던 포로가 해방을 받아 되돌아 옴’을 의미했습니다. ‘돌이키다’, ‘풀려나다’, ‘돌아오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환난 중에서 하나님이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진 듯이 느껴져, 마치 본국을 떠난 포로같이 느껴졌을 때가 있었습니다(욥19:11, 23:8, 9). 그 결과 아내와 친구들과 종들까지도 외인처럼 되어버린 때가 있었습니다(욥19:13, 15). 더욱이 자신은 몸에 악창이 나서 죽음에 이르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욥2:7-10).
이제 하나님은 그 모든 억압과 고통에서 욥을 도로 찾아 나오고, 본래로 되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 말의 뜻이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라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절대하신 주권 행사를 되새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곤경에서 욥을 돌이키신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1. 먼저 영적인 축복입니다(욥42:5-9)

그것은,
1) 영의 눈이 열린 축복입니다(욥42:5).
욥기 42장 5절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욥의 신앙이 관념적이고, 지식적인 신앙의 상태에서, 직접적이고,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신앙의 단계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신앙과 지식이 더 높아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고, 밝아지고, 중(重)하여졌음을 보여 줍니다. 열열한 확신 속에 들어간 상태를 가리킵니다.

2)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깨달은 축복입니다(욥42:6).
욥기 42장 6절에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극한 환난 속에서 자기 스스로가 말을 하고, 헤아릴 수 없는 무지한 말로 하나님을 향하여 짜증내고 불평했던 일이 있었습니다(욥42:3).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하신 주권 행사에 항변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학대하고, 이웃과 친구들을 원망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스스로 한」하고 하나님께 회개한다고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존숭한다고 하였습니다.

3) 욥이 하나님께로부터 정당하다고 인정을 받은 축복입니다(욥42:7, 8).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에게 노하시고, 자기의 종 욥의 말이 너희들보다 정당하다고 변호해 주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종 욥을 괴롭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친구들에게 노하시고, 저들 세 친구보다 욥이 의롭다고 변호해 주었습니다.

4) 제사장적 축복을 받았습니다(욥42:8-10).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욥에게 가서 회개의 번제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욥42:8). 그때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사죄와 축복의 기도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욥42:8). 욥의 친구들은 그대로 행했고, 또 욥은 벗들을 위하여 용서와 축복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욥42:9, 10). 그 결과 세 친구들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화평의 축복을 입었습니다.
남들을 위하여 기도함이 축복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누는 축복이고, 주는 축복입니다. 바로 복음의 제사장들이 받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신약교회가 받은 큰 사명이요, 축복입니다(롬15:16).

2. 육신적 축복입니다(욥42:10-16).
1) 그것은 욥의 건강 회복입니다.
바로 욥기 42장 10절 중에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라고 한 말씀입니다. 그는 이제 여호와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렀던 고통의 질병에서 완전히 건강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2) 물질적 축복이었습니다.
욥기 42장 10절에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고 했습니다. 욥기 42장 12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 만 사천과 약대 육 천과 소 일 천 겨리와 암나귀 일 천을 두었고」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위로의 축복입니다. 배(培)나 더하는 물질적 축복이 왔습니다.

3) 사회적 명예의 축복입니다.
욥기 42장 11절에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욥에게는 새로운 대인 관계, 대 사회와의 관계가 재개되었습니다. 저들이 욥에게 와서 예물을 표징으로 드리는 행위는 새로운 유대 관계의 형성을 입증하는 표식이었습니다. 과연 그는 다시 동방 우스 땅의 가장 큰 자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욥1:3).

4) 자녀의 축복입니다.
욥기 42장 13절에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배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배의 축복이 됩니다. 그것은 저들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다시 부활의 몸으로 만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욥의 딸들은 전국에서 으뜸가는 아름다운 딸들이라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욥42:14, 15). 그 첫째 딸의 이름은 「여미마」인데 ‘비둘기’를 의미했습니다. 둘째 딸의 이름은 「긋시아」인데 ‘향이 나는 계수나무’를 의미했습니다. 셋째 딸의 이름은 「게렌합북」인데 화장할 때 쓰는 ‘물감’을 의미했습니다.
성경이 욥의 다시 받은 딸들의 아름다움을 언급한 것은 당시 근동 사회에서 딸들의 아름다움은 그 집안의 자랑이자 큰 축복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영적인 의미는 딸들의 아름다움은 밝음을 의미합니다. 유쾌를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욥의 가정에 새 희망이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욥42:15)고 하였습니다. 이는 고대사회에서 희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딸들에게 산업을 분배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5) 장수의 축복이었습니다.
욥기 42장 16절로 17절에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유대 70인역(LXX)에는 욥이 70세 때 환난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욥은 210년을 산 셈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고, 다만 욥이 환난 후에 140년을 더 살았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경우든, 그는 장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장수는 ① 육신의 장수였습니다. ② 영의 장수, 곧 신앙의 장수였습니다. ③ 부의 장수였습니다. ④ 명예의 장수였습니다. ⑤ 자녀의 장수, 곧 계대적인 축복이었습니다.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3주간 동안 욥이 당한 ‘고난의 의의’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동방 우스 땅의 큰 사람, 곧 큰 경건, 큰 물질, 큰 인품의 사람 욥을 ‘고난이라는 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욥이 고난이라는 학교에서 얼마나 공부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욥기 7장 3절에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하는 말을 볼뿐입니다. 여기 ‘여러 달’이라고 하는 시간이 얼마간의 어간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긴 시간’임을 시사하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이 고난이라고 하는 학교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 과목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성화’라고 하는 과목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복’이라고 하는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고난 가운데서 이런 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고 하였습니다.
여기 ‘단련’은 순금을 빼어내는 재련소와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뜨거운 불에 모든 불순물이 다 타버리고 순수한 순금만을 뽑아내는 과정을 뜻합니다.
우리가 아는 알프레드 웰레스(Alfred Wallace, 1823-1913)는 영국이 낳은 20세기의 위대한 자연주의 학자입니다. 하루는 그가 산누에 나비의 일종인 천잠나방의 새끼가 누에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힘겨워 보여서 웰레스는 고치를 잘 찢어주어 나방이 힘들지 않고 쉽게 나오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쉽게 나온 나방은 힘들이고 나온 다른 나방과는 달리 날개만 파닥거릴 뿐 날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나방이 좁은 구멍으로 빠져 나오려고 애쓸 때 날개의 어깨 부분에 몰려 있는 영양분이 날개 전체에 퍼져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 힘으로 날 수 있는 것인데, 쉽게 고치에서 빠져 나온 나방은 날개와 어깨에만 힘이 모여있었기 때문에 힘의 균형을 이루지 못해서 날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웰레스는 새끼 나방이 반드시 그 고통의 과정을 거쳤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돌과 섞인 금 덩어리가 순금이 되기 위하여는 불에 녹여 불순물을 없애는 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온다」는 고난의 참 맛을 배웠습니다.
참 성도는 시련을 받은 후에야 광채를 발하는 빛의 인격이 되어집니다. 강한 바람에 많이 흔들린 나무의 뿌리는 더 튼튼하고, 그 나무의 무늬는 아름다운 목재로써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평안 중에서만 살고, 또 고난을 받을 때 즉시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 도와주신다면, 연단 받을 기회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시나무에서 핀 장미꽃은 더 진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바다 속에 진주는 더 고귀하게 보입니다. 골짜기의 백합화는 더 진한 향기를 토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통과하는 고난의 동체(胴體)는 예수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십자가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닌가 십자가의 학교에서만이 진정한 고난의 의의를 배우게 되고, 알게되고, 찾게됩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학교에서야말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공의의 심판과 용서하는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난의 여정 속에서만이 믿음이 성장하는 성화의 진보를 맛봅니다. 십자가의 학교에서만이 부활과 영생의 축복을 보장받게 됩니다. 그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예수 때문에 욕을 먹고, 죽음에 이르는 환난을 받을 때,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역설적인 인생관을 가지게 됩니다(마5:10-12).
욥은 고난의 학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배웠습니다. 성화의 은총을 배웠습니다. 마침내 축복의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바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필수과목이 아닌가 그리고 확실하게 약속된 미래 보장의 보증이 아닌가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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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0. 2

5.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
-종교개혁 481주년-
요한계시록 13:11-18

Ⅰ. 세기적인 역사의 격동들

창조이래 지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후로, 정말 세기적이고 우주적인 대 사건들의 연속이 세상의 역사를 이루어 놓고 말았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1. 천지 창조(창 1:)

바로 하나님의 천지창조 역사가 그러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여호와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실 때, 하나님 자신의 ‘가라사대’가 발동하였습니다.
그 결과 본체적 발광체인 빛을 위시하여 궁창과, 땅과 식물과, 천체, 어류와 조류들 그리고 동물과 인생들이 그 각이한 존재 형식을 취하여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권적 창조 역사일 뿐입니다.

2. 홍수 심판(창 6-9:)

그후 인류가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했을 때 저들이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는 무신(無神)과 반신(反神)과 배신(背神) 사상으로 가득 차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셋의 자손)들이 사람의 딸들(가인의 자손)로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아내를 삼는 시대가 야기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에는 네피림 곧 거대한 육체적 용사들만이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홍수를 가지고 온 세상을 심판해 버리시고, 방주를 통하여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시고, 새 시대 새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외에는 할 수 없는 새로운 천지개벽의 대 사건이었습니다.

3. 출애굽 운동의 거사(출애굽기)

그후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선택받은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한 후, 그 자손들이 애굽에서 번성하게 하는 섭리를 하였습니다.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저 유명한 출애굽의 거사를 일으켜 선민들을 본래의 땅 가나안으로 정착시켰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역사의 한 모습이었습니다.

4. 부림절 기록(에 9:)

계속해서 세월은 역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등이 선민 유대와 이스라엘을 역사상에서 영원히 도말해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페르시아라고 하는 제국을 역사상에 등장시켜, 그 나라의 통치자들을 도구로 삼아 선민을 죽음에서 구원하여 내는 기적의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5. 예수 십자가와 부활-역사의 신기원(요 1:14, 19:30)

다시 역사가 헬라와 로마로 이어졌을 때, 마침내 유대 베들레헴에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어 지구에 오신 사건입니다. 그가 33년을 지구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의 오심과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마침내 역사의 신기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그분 예수를 분기점으로 B.C(主前)와 A.D(主後)로 나뉘어졌습니다. 지금 그 역사의 연호가 벌써 1998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사건이야말로 천지창조이래 가장 큰 지구촌의 대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사람이 사는 이 세상에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6. 종교개혁 운동

그후 역사의 연호가 1517년을 기록하는 시절부터, 교회사는 이를 근세 교회사로 이름 붙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1517년부터 1800년 어간을 종교개혁 시대라 이름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그 초반기인 16세기는 참으로 엄청난 역사적 격동기요, 변화기였다고 할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전반에 걸친 구조학적인 대변화요 변동이요 요동이었습니다. 역사의 대지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자각은 물론이고 인류 생활 전반에 걸쳐 실로 엄청난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문예부흥이라고 하는 사조(思潮)가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격동의 배후에는 바로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놀라운 힘이 중세기를 새롭게 창조해 내는 동력이 된 것입니다. 문예부흥으로 말미암는 개인의 자각과 의식과 판단에서 학문과 예술의 갱생을 생각할 수도 있지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 인생과 역사의 뿌리를 마구 뒤집어 놓은 것이 이른바 종교개혁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세기가 중심으로 요구했던 것은 문예부흥이 아니라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이야말로 신약 선교 도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큰 역사 중의 역사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별과 같이 빛나는 세기적인 구속사의 한 무대였습니다. 무려 1,200년이 훨씬 넘는 로마 카톨릭 영적 압제와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압제에서 인류를 해방시킨 위대한 영의 운동이었습니다.

7. 예수 재림과 역사의 최후

이제 성경은 역사의 마지막 대 사건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홍수 심판이 아닌, 불 심판과 함께 도래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출현입니다.

Ⅱ. 종교개혁의 중요 과제들

1. 구원론에 대한 개혁이었습니다.

천주교는 구원에 따르는 세 가지 필수 요건을 주장합니다. 1) 선행과 공로를 주장합니다.
이른바 공덕축적설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한 구원은 선행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2) 세례(영세)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3) 만인구원설입니다.
그래서 연옥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은 구원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만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엡 2:8)이라고 하였습니다(Sola Gratia).
선행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세례(영세)는 믿음으로 받은 구원의 고백에 대한 확증(인침)의 수단일 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믿기로 작정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것입니다(고전 1:18).

2. 잘못된 신관(神觀)에 대한 개혁이었습니다.
1) 천주교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믿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절대 창조주요, 통치주요, 섭리주요, 구원의 주입니다. 천주교가 말하는 ‘하느님’은 ‘하늘님’ 사상에서 나온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범신론적인 신을 말합니다.
2) 마리아 여신 숭배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신격화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리아를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다섯 교리, 이른바 ① 마리아 종신 처녀설 ②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마리아 모성) ③ 마리아 무죄 잉태설 ④ 마리아 평생 무죄설 ⑤ 마리아 부활 승천설을 교리화 하였습니다.
그리고 ① 마리아는 은총의 중보자이다. ② 마리아는 기도의 중보자이다. ③ 마리아는 구원의 어머니이다라는 내용을 교리화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 말하는 마리아 사상은 저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이 죽은 후 그의 부인 세미라미스(Semiramis)가 자기와 자기 아들 탐무스(Tammus)를 신격화시킨(태양신-바알) 모자 숭배 사상이 기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이교(異敎) 세계에서 유행하는 모자 숭배 신앙으로 퍼져 갔고,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되었을 때 수많은 이교도들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가 타협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주후 3-4세기). 바로 이것이 마리아 숭배 사상의 기원이 되고, 모자 숭배 사상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결코 성경에는 마리아 숭배 사상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3) 성인, 성녀 숭배 사상입니다.
로마 천주교에서는 하늘의 하나님과 중간 매개물이 없이 직접 관계하는 모든 천사, 특별히 영웅적인 덕행을 실천한 사람들을 복자(福者), 혹은 복녀(福女)라고 하는 칭호를 교황이 직접 주어서 공경(숭배)하게 합니다. 1984년 5월 교황 바오로 2세가 한국에 와서 103위의 성인 시성식을 행한 일은 그 일례가 됩니다.
이 사람들은 성인(聖人)으로, 죽은 후에도 교회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 성인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성인, 성녀 숭배 사상은 예외가 없이 저 바벨론 종교에서 5,000명이 넘는 남신과 여신들을 숭배하는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고, 만들고, 섬기고, 거기에 예배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섬기고, 마리아와 성인, 성녀라고 하는 여러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3. 잘못된 예수의 속죄론에 대한 개혁입니다.
1) 로마 카톨릭에서는 ‘미사’라고 하는 예식과 ‘희생제사설’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속죄의 의미를 사실상 짓밟고 있습니다.
결코 ‘미사’를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개념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드리는 ‘미사’는 성찬의 요소인 떡과 포도주를 사제(신부)가 봉헌 기도를 통하여 예수의 살과 피로 변화시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예식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린 십자가 제사의 재연으로 흠숭(예배)과 감사, 보속(죄의 대가를 치름)과 구원으로 무한한 효과를 가져온다고 가르칩니다. 이른바 화체설(化體說)이요, 그것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친다는 희생 제사설입니다. 저들은 이것을 갈보리 제사의 재현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천주교는 범신론적입니다. 더욱이 십자가에서 단번 속죄로 이루어진 예수의 속죄 효과를 짓밟고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욕보이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꼭 한 번의 제사(죽음)를 통하여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습니다(히 9:12, 14, 26, 10:10-18).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히 10:26-29).
2) 또한 성체 숭배입니다.
저들은 성찬식의 떡이 바로 예수의 몸으로서 그것이 성체(聖體)요, 포도주는 성혈(聖血)이라고 믿고 이 떡과 잔에 예배하고 절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입니다. 틀림없는 우상숭배입니다.

4. 잘못된 인간 신격화에 대한 개혁입니다.

우리는 이미 로마 카톨릭의 교황이 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최고 통치자라는 교리 ② 교황은 절대 오류가 없다는 교황 무오설 ③ 교황은 죄에 대한 형벌까지 면제해 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이른바 교황 면죄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기의 많은 영혼들은 교황이 발행하는 ‘면죄부’에 전 소망을 걸었습니다. 사실상 이 교황(Pope, Papa)이란 이름의 유래가 이방 신주의 이름에서 유래된 사실은 흔한 역사적 증거입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신부들은 세 가지 기능, 즉 ① 중보자의 기능 ②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이른바 축성권 ③ 죄를 용서해 주는 사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황이나 신부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은 가증한 불법의 사람들이 아닌가(마 24;15)!

5. 우상 숭배와 미신 신앙으로부터의 개혁입니다.

로마 천주교는 그야말로 부지기수의 우상 숭배와 미신 신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중에,1) 성상 숭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나 마리아, 혹은 소위 성인들, 교황들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고 기도하는 행위입니다.
2) 유골 숭배가 있습니다.
저들이 말하는 소위 성인들의 유골(뼈)을 ‘성해’(聖骸)라고 칭하고, 저들의 쓰던 유품들을 숭배합니다. 저들은 가르치기를 ‘하나님께서 그 유물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은혜를 내리시므로 신자들은 그것을 공경해야 된다.’고 합니다.
3) 성체 숭배입니다.
성찬식 때 행하는 떡과 포도주가 바로 예수의 살과 피로 화한다는 화체설 숭배 사상입니다.
4) 천사 숭배입니다.
천사들은 성인의 일부이기 때문에 숭배합니다.
5) 십자가 고상(苦像) 숭배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양을 조각으로 만들어 가지고 가정이나 성단, 혹은 교인들이 경영하는 사업장이나 병원에 달아 놓고 거기에 절하거나 기도하는 행위입니다.
6) 성화(聖畵) 숭배입니다.
종교적 그림에 절하고 기도하는 행위입니다.
7) 십자성호(기도할 때 손으로 십자가를 긋는 행위), 성수(물을 뿌리는 행위), 묵주 기도 이른바 로사리오(Rosary),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성로선공, 성원 기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미신 신앙 행위들입니다.
사실상 이 모든 류의 우상 숭배들과 미신 사상들은 예외가 없이 옛 바벨론 종교, 애굽 등지의 이방 종교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 것입니다.6. 잘못된 성경관의 개혁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이러한 사탄적 이단성은 그 근본이 잘못된 성경관에 기인된 것입니다. 저들은 66권의 성경 외에도 가경과 유전(전승, 성전)을 성경과 동일시하고 또 믿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상 성경 이상으로 믿고 있습니다.
저들은 성경의 완전 영감과 그 권위를 부인하고 가경들과 교회의 전승(교황의 칙령 등…)들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6세기의 종교개혁 운동은 신약 선교 도상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구속사적인 대 사건입니다. 그 중심은 사도적 신앙으로 돌아가자, 예수에게로만 돌아가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거룩한 영의 운동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 오직 만민제사장으로 돌아가자는 본질적 생명운동입니다.

오늘의 개신 교회가 만일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대로 그 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유일의 교회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독교라는 이단을 버리고 통회자복하는 마음으로 천주교회로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로마 카톨릭 교회나 기독교(개신교)가 똑같다고 한다면, 하나의 교회를 분열시킨 저 중세기의 모든 종교 개혁자들은 정죄되고 심판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가 반성경적 이단이라고 하면, 우리는 단호히 이 이단을 정죄하고 심판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 개혁 481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는 땅에서 올라오는 두 번째 짐승」의 정체를 재확인해야 할 것입니다(계 13:11-18). 그리고 하나님과 계명(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재무장해야 할 것입니다(계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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