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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화에로의 부름 ④-순종 (요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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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어떻게 그 생애를 사셨는가 하는 점이 잘 나타나 있다. 본 것을 한다는 것은 흉내낸다는 개념이 아니라 시킨 일이 아닌 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었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그를 보내신 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의 요구와 계획과 명령 하에서만 움직이시는 삶을 사신 것이다. 동일하게 우리도 예수님과 똑같이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을 해야 될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부분에 대하여는 ‘나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해야 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런 부분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는 보여 주셨는데 왜 나에게는 안보여 주시는가’ 이런 자존심이 동원되어 싸우는 것이다. 뜻밖에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도 이런 종류의 싸움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성령의 은사는 신앙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러한 문제에 걸려 신앙이 손해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진정한 봉사는 나를 보내신 그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를 보내소서!’라는 열심이 있을지라도 그분에게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보내시느냐를 구체적으로 명령받지 않고는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런 구체적인 보냄이 있기 전에는 일반적으로 그가 성품적으로 좋아하는 전도, 기도, 사랑, 구제 등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부름이 없다면 우리는 일반적인 그의 기뻐하시는 일의 수준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일반적인 일 외에 대하여 우리의 과욕에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임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으로 봉사를 오용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봉사, 헌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명령과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며 대기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생애 중에 대부분을 대기로 보낼른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는 보통 준비하는 때가 있고, 준비한 것을 사용할 때가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왜’ 필요하느냐가 제시되지 않으면 지루해한다. 그래서 정작 써야 될 때는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6장에 예수님게서 감람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시며 그의 소원을 아뢴 내용이 나온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 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 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그는 인간적인 소원을 말씀하시면서 결국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끝을 맺는다. 우리도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뢸 수는 있다. 그러나 마지막 결정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사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하여 너무 무지하다. 우리가 결정을 해놓고 주를 위하여 일을 했다고 한 것들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을 했을 때 나타나는 차이점은 무엇인가 내가 스스로 결정을 하고 주를 위해서 일을 했을 때는 내가 일을 했다는 것이 증명되지만 그 일로 하나님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증명이 되는데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열매가 없다는 말이다. 혹 일에 실패하고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락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실패할 때나 위기 때에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찾는다. 그래서 위기 때에는 더욱 하나님이 잘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간혹 우리로 어려움을 당하게도 하신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거나, 그 말씀의 내용과 논리나 방법까지도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싸움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통하여 자신의 잘남을 자주 증명하려 한다.하나님도 나타내고 자기도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세상이 알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이 알았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언제나 행위에 있어서나 방법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심지어 말씀에 있어서까지 언제나 자신은 숨으시고 보내신 그분을 앞세우셨다는 것을 확인하면 할수록 나는 그를 위하여 크게 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삶 속에서 나는 죽고 그분만이 살아계셔야 한다. 이제는 생각마저도 내 것이 아니다. 대화하고 전해야 될 내용도 물론 내 것이 아니다. 신자들의 삶에서 가장 큰 싸움은 자기도 증명하고 하나님도 증명하려는 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혹 오해되는 부분은 그렇게 화가 나지 않는데 내가 오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못 참는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 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 12:49-5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 라(고후 5:20)” ‘사신’은 ‘대사’라는 말이다. 대사는 자의로 일을 결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실존적 위치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렵다. 우리가 다 신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된 이후로 모든 인간은 각자가 다 신이고 타인에게 신하가 되라고 말한다. 이러한 품성을 지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다. 이제 봉사에 있어 하나님의 법칙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 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1-12)”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부족하면 하나님을 제한하게 되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구원 문제가 아닌 성화 단계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을 필요로 하신다. 우리가 자신을 비우지 않는 한 어쨌든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채우시려고 하는 것을 채우지 못한다. 우리가 ‘보내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는 한 우리를 보내실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들을 병정들을 무찌르고 꺼냈지만 가나안에 들여 보내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그들이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니 방법이 없다. 광야라고 하는 곳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장소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는데 그들이 거부하자 신자의 삶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광야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왜 나를 이런 곳에 보냈느냐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자기가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 아래 서 있지 않아서 자업자득으로 택한 곳이다. 거기서는 가나안에 대한 추억이 없으니까 기껏 비교하는 곳이 애굽이다. 애굽은 먹을 것이 있다는 측면에서는 광야보다 나았다. 그러나 광야에는 만나밖에 없었다. 그들이 광야에서 열매로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이 그들을 광야로 보내신 것이 아니고 거기에 있도록 시키지도 않았다. 죽지 않을 양식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이지만 곡식을 심을 장소도 없고, 심은 것도 없었다. 하늘로부터 양식이 내리고 인도하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있었지만 열매는 없었다.

신자들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같이 하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의복이 헤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그러나 열매는 없다. 그런데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겠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싫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한하는 이유는 그의 약속을 믿지 않고, 믿음이 부족해서이다. 그럴 때 그가 우리에게 간섭하시며, 명령하시며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못 하시게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손해가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하실 일도 못 하시게 하는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시킴으로써 나를 크게 할 뿐만 아니라 나에게 일을 시키는 동안 어떤 열매들을 맺게 하셔서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먹이시고, 부르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일을 하실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이 영적으로 왕성한 상태에 있으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도 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부수적인 열매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광야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 님께 드리라(롬 6:13)” 우리의 몸은 병기이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맡겨져야 주께서 우리를 붙잡아 의의 싸움을 하실 것이다. 그 싸움을 우리 몸을 기구로 삼아 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 앞에 나를 바쳐야 한다. 고린도전서 10:11,12의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의 사례들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로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다. 선 줄로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는 쪽이 아니라 주의 손에 맡겨진 자로 존재하여야 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 전 5:23)” 우리를 부르신 이가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헌신된 우리 자신들을 통해서 의를 누리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큰 소망인 것이다. 우리를 온전히 거룩히 하시고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는 이 모든 것이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쓰임받으면서 누려야 할 현실적인 축복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항복된 성화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순종하고, 명령에 굴복하고, 억지로 끌려가는 일로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쁜 체험을, 만족할 만한 찬송과 영광이 어우러진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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