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소명과 섬김 (엡 01:1)

첨부 1


사도 바울이 쓴 성경은 총 13권입니다. 신약성경중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가 사도 바울이 쓴 성경입니다. 그 중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흔히 옥중서신이라 부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여러 교회를 위해 썼던 서신이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 에베소서는 서기 60년 경에 기록된 서신으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지위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으로 유명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에 의해 개척된 교회입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시 에베소 지역을 여행하다가 개척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에베소교회가 개척될 당시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에베소교회가 세워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손수건만 병자에게 얹어도 치유가 나타나고, 앞치마를 덮어도 귀신들이 쫓겨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입니다.

①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②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③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④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⑤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⑥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⑦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⑧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⑨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⑩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⑪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⑫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⑬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⑭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⑮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 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당시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의 주요 도시를 꼽자면 로마, 고린도, 에베소, 알렉산드리아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에베소가 그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즉 세계적인 도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바울이 세운 교회들은 주로 큰 도시를 중심하고 있었습니다.

전하는 바로, 당시 고린도교회의 수가 약 3만에서 5만이었다고 하니까 에베소교회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매우 규모가 컸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도 잘 성장했을꺼라고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장과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를 꾸짖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베소교회가 활동면에서는 매우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야단을 맞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약 에베소교회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절부터 5절입니다.

①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②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③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④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에는 통상 서신을 보낼 때, 서신의 첫머리에 보낸 사람의 이름을 쓰게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주로 서신의 맨 마지막에 보낸 사람의 이름을 서명합니다. 로마시대의 서신 양식은 서신의 첫 머리에 보낸 사람의 이름과 받는 사람의 이름을 썼습니다. 바울 역시 당시의 서신양식을 따라 편지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본문에서 세 가지 내용을 얻고자 합니다.

1
소명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정확히 아는 일이 중요하다는 교훈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바울은 자신이 사도인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는 여러 직분이 있습니다. 흔히 「5중 사역」이라고 하는 내용이 에베소서 4장에 나옵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교사, 목사가 그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과 12절입니다. 여기서 사도란 교회의 한 직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⑪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⑫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사도 중에서도 이방인을 위한 사도임을 알았습니다.

다같은 사도라도 소명이 달랐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 중에서도 교회를 처음으로 세우는 즉 교회 개척의 사명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를 개척하되 교회가 전혀 없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소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을 만난 이후, 그 일을 평생했습니다.

다같은 사도라 할지라도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였고,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 중에서도 아볼로같은 사도가 물을 주는 사도라면, 바울 자신은 씨를 뿌리는 사도였습니다. 또한, 씨를 뿌리되 교회가 전혀 없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그곳에 교회를 세우는 소명을 가진 사도가 바울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기에게 맡겨진 소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대목을 주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소명대로 행할 때 기름부음이 강하게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소명을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름부음이 뒷받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에는 한계(limit)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범위 가운데 행할 때에 하나님의 뒷받침하시는 역사인 기름부으심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범위를 벗어나서 행하면 하나님의 뒷받침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하기를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내게 보여주셔서 내가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부분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분별하여 깨닫는 것이 필수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함께하시는 기름부음의 역사가 뒷받침될 것입니다.

소명을 깨달아야 하는 중요성은 사도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즉, 모든 성도는 자기와 함께 하는 기름부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제가 내적치유를 설교하면 별로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적치유는 저에게 맡겨진 주된 부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적 치유를 설교하면 십자가의 복음을 설교할 때와 비교하여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뒷받침하시지 않으십니다. 다같은 설교인데도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자신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운행하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행하심이 어디로 행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일이 필수입니다. 우리도 그 가운데 행할 때 하나님의 뒷받침하시는 역사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7절과 18절에서 이것의 중요성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2
사도의 직무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교회의 터가 되는 것과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란 문자 그대로하면 「보냄을 받은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 구절에 의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사도 중의 사도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이 구절의 뒷부분을 영어로 읽으면 “너희들의 생각을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로 고정하라”입니다. 영어로 읽어보겠습니다.

fix your thoughts on Jesus, the apostle and high priest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입니다. 사도 역시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들입니다. 즉 사도는 그리스도에 의해 특별히 임명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권세를 주셔서 보내신 우리 주님의 대변인들입니다. 대표적인 사도는 예수님의 12제자를 일컫습니다. 마가복음 3장 14절과 15절, 6장 30절과 31절입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사도의 요건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는 사도의 요건이 나옵니다.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뽑을 때, 사도의 요건으로 몇 가지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조건에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목격한 바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자로서, 예수님이 직접 뽑으시고, 권세도 주셔서 예수님의 대변인으로 권능을 행하게 한 사람들이 사도입니다. 역시 가장 주된 요건은 주님과 동행했으며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12제자 외에 보다 더 광범위한 차원에서 사도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 외에도 바나바 등이 그들입니다. 사도행전 14장 14절입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성경은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보다 더 넓은 의미의 사도들입니다.

사도에게는 직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에게는 임무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직무는 무엇이었을까요 에베소서 2장 20절과 고린도전서 3장 10절과 11절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이 구절들은 분명 교회에 대해 말씀하시는 구절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모퉁이 돌이시며, 사도는 그 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에도 교회의 터가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상합니다. 성경마다 교회의 터가 왜 다른 걸까요 에베소서는 사도로, 고린도전서는 그리스도로 말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상할 것 없습니다. 둘 다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참된 터는 그리스도뿐입니다.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처럼 예수님은 메시야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안에서 그 실체를 보았습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게 아닙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님을 발견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반석“이란 「성령의 조명으로 발견한 예수님」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성령님의 조명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의 주된 임무는 예수의 비밀을 드러내는 겁니다

사도들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계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밀을 알아 전하는 것이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계시, 예수님의 비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은 창조 때부터 수립되었지만 감추어져 있다가 십자가와 부활을 거치면서 사도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이 비밀 중의 하나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하여 새이스라엘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 뜻은 고넬료 사건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사도행전 11장과 12장, 15장에 나와있는 그대로입니다. 사도들의 주된 임무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사명이 왜 가장 중요한 임무인가하면 그래야만 이 터위에 교회가 세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비밀의 결정체인 예수님을 드러냄으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임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터”,“예수님이 모퉁이 돌”이라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핵심이자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자신들과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의 조명으로 알게된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게되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그 가운데, 사도와 예수님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인격체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비춰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지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님이 사도들에 의해 증거됩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이 전해지며 사도들이 발견한 것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동일하게 발견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교회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직무이자 「사도가 터」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와같은 이유로 사도들이 교회 안에서 필수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요즈음 신문에서나 방송을 통해 ‘사도들의 5중 사역의 회복’이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사도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일부에서 말하기를 “무슨 말이냐 사도와 선지자는 초대교회로 끝났다. 남아있는 직분은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뿐이다”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인식이 우리 가운데 팽배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도나 선지자가 초대교회로 끝났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유추해본다면 사도들로 인해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에, 초대교회때에는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단계라 사도가 필요했고, 지금은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는 상황이라 더 이상 사도가 필요없게 되었다 라고 주장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절은 찾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사도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부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문이나 광고등에서 말하는 「사도의 5중 사역」이란 에베소서 4장 11절이하의 말씀에서 근거를 찾습니다.

⑪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⑫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즉, 교회가 세워지는 일인 성도의 온전함과 봉사의 일, 하나되는 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하는 일을 위해 사도를 비롯한 직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오늘날도 사도들의 사역은 매우 중요하다고 인정됩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은사로서의 직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은사로서의 직분 중 어느 은사는 초대교회로 끝났고, 나머지는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다 라고 주장할 내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의적 해석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도는 중요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도직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그 타당성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지나쳐 어떤 특정한 집회에 참석하면 마치 사도가 되는 것처럼 광고하거나 설교하는 일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명함에다 「이 시대의 사도 ○○○」라고 써가지고 다닙니다. 사도 남용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의 직분이란 그리스도의 비밀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계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그 계시를 드러냄으로 교회가 교외 유일한 터인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게 하는 일군입니다.

사도와 종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사도의 직임과 관련하여 또 하나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입니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②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③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④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⑥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1절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표현한 구절입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고 부름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바울은 복음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직분을 이해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맨 앞에다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종이란 노예를 가리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주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이 주인을 위해 사는 것처럼 자기 인생의 목적이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와 ‘종’이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봅니다. 즉 사도가 섬김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봅니다.

예수님은 좋은 본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이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 중의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종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나님의 성령이 하늘로부터 임하셨습니다. 그 때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였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장면에 대해 언급하기를 이것은 시편 2편과 이사야 42장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합쳐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즉. “내 사랑하는 아들”은 시편 2편의 왕과 연관이 있고, “내 기뻐하는 자”는 이사야 42장의 종과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42장 1절입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의 윗 구절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1절과 2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이와같이 예수님에 관한 여러 예언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이 왕으로서 또한 종으로서 오실 것이 예언되어 있는데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심으로 그 모든 예언들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니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왕으로 보내실 뿐만 아니라 종으로 보내셨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 오셨지만 종으로도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권세와 섬김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직무 중 중요한 한 가지는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권세와 섬김의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바울의 경우에서도 이 점을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인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직무가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비밀을 선명히 밝히려고 하였습니다. 사도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을 종이라고 묘사합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사도사역 운운하면서 결국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얻고자 했던 바를 성취하려고 하지는 않는지요. 사도란 직임을 사역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는 않는지요. 특정한 집회를 참석하면 마치 사도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함으로 사도란 직임을 남용하지는 않는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사도의 직무에는 종의 개념이 포함되어야 온전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종 말입니다. 예수님의 비밀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섬기는 종의 모습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만약, 오늘날에도 사도가 있다고 한다면 사도의 두 측면이 모두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섬김과 권세는 함께 합니다

새물결선교회의 예언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예언의 말씀이 에베소서 6장 7절입니다. 이 예언이 나올 때마다 “너희가 아직 읽지 않았느냐”,“아직도 그 의미를 모르느냐”하시면서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계십니다.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 구절은 섬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에베소서 6장 7절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Serve wholeheartedly, as if you were serving the Lord, not men,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Serve 섬겨라, wholeheartedly 전 마음을 다해서, as if you were serving the Lord 마치 주님을 섬기듯이, not men 사람에게가 아닌. 이 구절은 우리 모두가 유념하고, 깨달아야 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이런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 스토리를 가지고 말씀을 계속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2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여러분, 가상해 봅시다. 예수님이 만일 이 땅에 오셨는데 갈 곳이 없으셔서 이 시간 서울역 광장에서 벌벌 떨고 계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우리나라의 부자들은 모두 비싼 자가용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줄을 설 것입니다. 자기 집에 모시고 갈려고 말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가난한 사람마저도 빚을 내어서 예수님을 위해 옷과 먹을 것을 싸가지고 찾아 갈 것입니다. 아니, 보통 사랑도 아닌 예수님이 배가 고파 어쩔 줄 몰라 하시는데 우리라고 가만 있겠습니까 제 생각입니다마는 아마 서울 시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맛있는 음식을 싸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갈 것입니다. 예수님이 배고파 쓰러지셨다는 소문을 듣고 가만있을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 예수님이 평생 드셔도 못먹을 음식이 공급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만일 여러분의 집에 방문하셨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아마 집안 청소를 하더라도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고 칠을 할 것입니다. 아마도 대단할 것입니다. 단마음으로 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에게 하듯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가 사람을 기도사역을 섬기던, 봉사로 섬기던 무슨 모양으로 섬기던 예수님에게 하듯이 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사도의 직임을 감당하기위해
무엇보다 종이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사도로서 사도의 직임을 하기 위해서 ‘종’이 되는 법을 배웠다는 점입니다. 즉 섬김의 도를 따르려고 했습니다. 이 점은 예수님에게서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사도 중의 사도였음에도 섬기는 분으로 사셨습니다. 그는 메시야이셨음에도 이 땅에 종으로 오셨습니다. 이처럼 섬김은 사도의 덕목 가운데 매우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6:7은 이 섬김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무슨 일을 하던지 주님께 하듯 기쁨으로 섬기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의 직무와 관련하여 두 가지 면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교훈을 더 살펴보기 원합니다.

3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사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면 사도가 아닙니다. ‘사도’라는 말 자체가 ‘보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들에게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봅니다. 물론 이 말은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소명을 주신자들입니다.

만일 오늘날에도 사도가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소명을 주셔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집회에 가서 기도받았다고 사도가 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유명한 분에게 안수받는다고해서 사도가 되는 게 아닙니다. 사도는 기도받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오셔서 소명을 주셔야 사도가 됩니다. 이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야만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오셔서 소명을 주셔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사도는 사람의 뜻으로 되어지는 게 아닙니다. 바울도 서신 첫 머리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은사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사도가 되기를 사모한다고해서 모두 사도가 되는 게 아닙니다. 갈라디아 1장 1절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여기서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를 한 영어 성경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Paul, an apostle--sent not from men nor by man, but by Jesus Christ and God the Father, who raised him from the dead--

앞 부분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사도인 바울, 사람으로부터 보내진 것도 아니요, 사람에 의해 보내진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보내진 자....”라고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람으로부터도 아니고, 사람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내진 사도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사도는 예수님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난 사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소명은 주님께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사실, 사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리기를 “우리 모두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기름부음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여주시되 어느 방향으로 보여주시는가를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들에게 부어주시는 기름부음을 발견하는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하나님의 부르심은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하심을 보여주시는 것과 하나님의 부르심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기름부음이 함께 하시면 큰 힘을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이 하나님의 역사로 성취할 수 있습니다. 기름부음이 있으면 마음의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렇게해서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소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받을 때마다 “너는 사도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결론내리기를 “아, 나는 사도인가 보다. 그래, 이제부터 나는 사도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물론, 선지자들의 도움에 의해 사도가 세워지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 우리는 바울이 사도로 세워질 때 아나니아의 도움이 있었던 것을 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통해서 바울에게 도움을 준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과 16절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위 구절에는 ‘사도’하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장차 이방인에게 보내질 것과 임금들에게 보내질 것,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22장입니다.

⑭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⑮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위 구절은 훗 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했을 때 천부장 앞에서 한 간증입니다. 바울은 간증을 하면서 오래전 아나니아가 자기에게 안수하면서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통해서 바울에게 소명을 확인시켜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두 구절만 보면 바울은 아나니아의 말을 듣고 사도가 된 것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6장입니다.

⑮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위 구절은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한 간증입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단순히 아나니아의 말만 듣고 사도가 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보내어”라는 단어와 “사환”,“증인”이라는 단어들은 매우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언급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바울은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그의 소명이 무엇인지을 들었습니다.

소명은 소명을 감당해 갈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더 나아가 소명은 소명을 감당해 가는 가운데 더욱 분명히 인지합니다. 갈라디아 1장에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바울은 소명과 복음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노라고 쓰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사도의 가장 주된 임무는 예수님의 비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임무는 사람에게서 아닌 주님께로부터 직접 보내심을 받아야 하는 임무입니다. 단순히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사도입니다”라고 말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이 당사자에게 나타나셔야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시던지, 나타나셔서 보내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로서의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 부분을 살펴보는 이유는 사도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소명가운데 부르심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확인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각자가 하나님에게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행하게 될 때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놀라운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뒷받침하시는 역사가 따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 종으로서 섬길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이 세대 가운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실 때 쓰임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기를 소개하는 부분을 통해 부르심의 소망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며, ”택하신 그릇“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기름부음과 하나님의 뒷받침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부디 에베소서 6장 7절처럼 단마음으로 주님께하듯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