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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의 친구 (눅 05: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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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하나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로 함께 하심을 믿는다.
'레위'는 주님의 제자 마태의 이름이다. 그러나 마태가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오해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마태는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세관에 앉아 있던 사람이다. 마태라는 이름은 은사 곧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 있다. 어떤 학자는 '마태'라는 이름이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 받았을 때 예수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한다.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주신 예수님이 레위에게도 마태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태는 그의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하나님에게서 많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다. 마태에 대한 개인적인 자료들은 많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마태는 복음서의 첫권인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요 대부분이 어부 출신인 다른 제자들에 비하여 마태는 유일한 관리 출신이다. 막 2:14에 기록된 말씀을 보자.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누가는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고 기록하였다. (눅 5:27-28)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길래 마치 쇳덩이가 지남철에 달라 붙듯이 '나를 좇으라'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갔을까

1. 마태는 세리였다.
세리란 말하자면 공무원이다. 특히 공금을 취급하는 자이다. 유대나라 뿐 아니라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세리는 미움을 받았다. 당시 유대나라의 세리는 두 종류의 세리가 있었다. 1) 정기적인 세금을 거두는 사람이다. 2) 세관에서 받아들이는 세리이다. 정기적으로 세금을 받는 사람을 가리켜 Cabai 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정규적인 세금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지금처럼 정기적으로 고지서가 발급이 되고 그 세금을 받아들임으로 비교적 부정의 소지가 적은 사람들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내는 정기적인 세금이라면 곡식 수확의 1/10, 포도주와 과실과 기름의 1/5, 기타 개인 수입의 1% 소득세와 모든 사람이 내는 인두세가 있었다. 인두세는 14세-65 세까지의 남자와 12-65 세까지의 여자가 내야하는 것으로 1년에 1 데나리온이다. 1 데나리온은 당시 건강한 장년의 하루 품삯이다. 세관에서 돈을 받는 세리는 Mokhes 라고 부른다. 이들은 모든 수입품과 수출품의 가격에서

2.5-1

2.5% 까지 세금을 징수하였다. 이 수입은 로마 정부의 주요한 재원이 되었다.

이 밖에도 모든 물건을 사고 파는데 세금이 있고, 강과 다리를 건너면 도강세, 길을 건너는데 통행세, 항구에 들어가도 세금, 시장과 도시에 들어가도 세금, 수레를 끄는 동물세, 배를 타면 승선세, 부두를 사용해도 세금, 이러 저러한 명목으로 세금들을 징수해 나갔다. 그러므로 이 세리는 막대한 부정이득을 걷어 들였고 또 그들에게는 어디에서나 누구든지 수색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이들의 횡포와 부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연히 사람들은 이러한 세리들을 멀리 하였다. 당시의 유다는 로마의 식민지로 지내고 있었는데 세금을 거두어서는 로마 정부에 가져다 주는 것이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엄격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바친다고 하면 하나님께만 바칠 것이지 다른 대상에게 바치는 것이 좋게 생각될 리 없었다. 때문에 신실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세리가 마치 도적떼와 강도처럼 인식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리들은 재판관이나 증인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던 요한은 세리들에게 정한 세 외에는 더 받아들이지 말라고 일갈하였다. 또 눅 18 장에 기록된 내용을 보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할 뿐이었다. 세리가 이처럼 미움을 받는 것은 성전에서만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부정과 탐욕과 악질적인 행위는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당시 로마가 여러 식민지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들이는데에는 필연적으로 권력이 남용되었다. 말하자면 일반 기업에서 하청제도를 적용하여 짭잘한 수입을 얻는 것처럼 당시 로마는 세금에도 하청을 주어 대신 세금을 걷어 들이게 한 것이다.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산 사람은 이미 자신이 지급한 액수보다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함으로 자신의 배를 채웠던 것이다. 여기에서 누가 만일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할 때 로마의 권력이 대신 형벌을 가한 것은 분명하다. 이런 결과로 지방민의 생활은 빈핍할대로 빈핍하게 되었다. 백성들의 불만은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눈치챈 로마 관리가 직접 징수하는 방법을 택하였으나 세리에 대한 미움은 여전히 백성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세리라고 하면 자기 나라 백성들을 원수에게 팔아먹는 매국노요, 자기 민족의 이익을 빼았는 압제자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를 사단의 세력인 로마 정부에 바치는 자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들 세리들을 죄인으로 여겼다.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로 이방인과 죄인처럼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세리 가운데 레위라 하는 마태를 예수님이 보셨다. 마침 그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바리새인들처럼 경건하고 깨끗한 사람만을 부르지 아니하시고 세리와 죄인들도 부르신 것을 감사한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곳에 오신 것은 여러분이 좋은 직장이나 어떤 선행이 있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자비하심이 여러분을 구원하신 줄 믿는가

2. 마태는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는 예수를 위한 잔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위신을 자랑하고자 잔치를 베푼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고 호텔에서 잔치를 여는가 하면 호화별장에서 여흥을 즐긴다. 얼마전 어느 목사님이 기독공보에 쓴 글을 보니까 요즘에는 교인들이 기도원에 잘 안온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신년벽두가 되면 열심으로 기도원에 올라오던 사람들이 요즘에는 바로 건너 산 스키장으로 몰려가는 것 같다는 푸념이었다. 하기야 그동안은 축복을 받기 위하여 기도원을 찾았으나 이제는 축복을 받았으니 스키장에 가는 것 아니겠냐고 …

마태가 자기 집에 잔치를 베푼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눈총을 받는 입장에서 무슨 잔치를 베풀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마태는 태어난 이후 오늘 같은 기쁨이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자기를 향하여 예수님 만이 '나를 따르라!' 고 부탁하셨기 때문이다. 레위는 잔치를 베풀면서 예수님 만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사람들 곧 여러 세리들을 초청하였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초청하였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자기를 불러 주신 예수를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우리들 인생은 어쩌면 먹고 마시는 것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 첫머리는 인류의 시작에 먹는 것 때문에 시험을 당한 여인을 소개하고 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로 인하여 하와가 넘어지고 아담이 실족하였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는 잔치때에 헤롯의 마음을 사로잡아 세례 요한의 목을 사냥하였다. 때로 잔치가 의인의 생명을 단촉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세도가들도 잔치자리에서 유명을 달리하는 일들이 비일 비재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먹는 것 때문에 정복을 당하는지 모른다. 모르드개를 미워한 하만도 에스더가 마련한 잔치에 자기만 초대받은 것을 크게 기뻐하였지만 그것이 자기의 생명을 마감하는 마지막 만찬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와같이 어떤 잔치는 그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여기 또 하나의 잔치가 있다. 그것은 천국의 잔치이다. 이 잔치는 구원의 잔치이다. 대개 잔치집은 떠들썩 하다. 음식점도 되는 집을 보면 사람들이 북적대고 시끄럽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 실수하는 것을 보면 식당예절이라고한다. 목소리가 크다. 그릇 소리가 요란하다. 칼과 포크를 흔들면서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국의 예이다. 국제화시대를 살아 가면서 고쳐야 할 예의이기는 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잔치 집은 손님이 많아야 한다. 손님이 없는 잔치집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잔치집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눅14:)

어떤 사람이 잔치를 크게 베풀고 특별히 손님들을 모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정한 날 시간이 되었어도 사람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주인이 얼마나 민망하였을까 급히 사람들을 보내서 알아 보니 다 이유가 있었다. 1) 밭을 사서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기 때문이니 용서하라는 것이다.
2)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라.
3)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주인이 몹시 화 났다. 주인은 종들을 시내 거리와 골목으로 사람을 보내서 사람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주인이 특별히 지목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과 저는 자들이다. 그래도 자리가 남았다고 보고하니 그 주인이 종에게 말하기를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명하였다. 그러나 전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이 비유 속에는 큰 비밀이 담겨져 있다.

하늘 나라에 먼저 청함 받은 사람들이 초청을 거부함으로 그 영광이 다른 사람들 곧 가난하고 병들고 소경과 저는 자들로 채워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모습은 세리처럼 멸시받으며 천대받는 사람들처럼 가난하고 병들고 저는 자들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나을 뿐이다. 도토리 키재기일 뿐이다. 조금 나은 것 가지고 다른 사람을 멸시해서는 안된다.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불러주신 이 은혜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잔치집과 같아야 한다. 음식점에 손님들이 들어 오듯 북적대는 열기가 있어야 한다. 예배 분위기나 그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즐거워야 한다. 이 움직임은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열심에서 나오는 움직임이다. 세속적인 즐거움과는 구별된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일념 뿐이다. 불러도 불러도 오지 않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하였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15)

3.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이시다.
예수님은 잔치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의사는 건강한 자들을 위하여 있는 것 아니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게 질문을 던졌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지만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마태가 마련한 잔치도 그렇지만 당신의 제자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먹고 마시는 일에 열중이냐 하는 비난이다. 마태의 생각은 잔치를 통하여 많은 친구들에게 예수를 알리려 함에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예수를 알리는 것이다. 마태의 열정은 잔치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주님의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복음서를 기록한 제자이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교훈을 많이 수록하여 놓았다.

멸시받던 제자 천대받던 마태였으나 주님은 그를 제자로 만들었고 그를 주님의 동역자로 삼으셨다. 가치없는 존재를 가장 가치있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이다. 세리 마태의 친구이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친구이시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만 하면 우리들도 친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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