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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부흥과 신앙의 본질 (말 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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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하나님의 부흥과 신앙의 본질과의 관계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시되 주권적으로 임하셔서 우리가 보기에는 갑자기 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실 때에는 그 전에 반드시 물밑 작업이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그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물밑 작업이 있습니다. 부흥의 길이 예비되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이 와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말라기 4장 5절 말씀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하나님의 임하심은 곧 그것이 예수님의 초림이던지 재림이던지 혹은 성령으로 임하시는 것이던지 반드시 그 길은 예비되게 되어있습니다. 준비단계가 있습니다. 물밑 작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준비 단계에서 되어지는 일 중의 하나가 준비하는 자들에게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는 일입니다. 반드시 그 일이 먼저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흥과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는 일은 나눌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쓴 ‘부흥’이란 책을 많이 인용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 책을 평하기를 “이 시대에 이 책만큼 부흥을 설득력있게 또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책이 없다” 라고 말하면서 추천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는 것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17쪽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지기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체험 자체가 아닙니다. 그분을 체험하고 그분을 아는 문제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그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를 인식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린 류의 삶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다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에서조차 그 개념조차가 다 사라진 것같습니다. 오늘날은. 그렇게 된 것은 우리가 거짓된 체험을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체험을 다 쫓아버린 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아래서 자라나야 합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 푯대를 향하여 과거를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뛰어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던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우리에게 있어 문제 거리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통제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데에는 어떠합니까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임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 그것이 참된 기독교인입니다. 부흥시에 언제나 하나님께 사용되었던 사람들은 바로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예수님 자신을. 여러분은 그것을 위해서 제 말을 들을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언제나 부흥의 예비 단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크게 사용되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라오디게아 사람들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얼마나 벌거벗었는가 하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에게 나아가 그분을 찾았습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을 향한 슬픔, 하나님을 향한 영광이 다시 나타나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우리 마음을 주장합니까 부흥의 시대에 언제나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이익을 보지 못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과 그 영광을 아는 단계입니다. 그것이 부흥 이전에 사람들이 갖는 예비적인 일차적인 관심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부흥하는 데에 관심이 일차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몰려오는데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교회들이 라오디게아의 사람들처럼 벌거벗은 자요 눈 먼 자인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분 자신을 아는데에 온갖 관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또 이어 말하기를,
부흥에 이르는 불가피하고 부단한 예비적인 단계는 ....... 부흥의 필연적인 예비단계였습니다.

보십시오. 여러 곳에서 계속적으로 말하는 바가 뭔가 하면 부흥에는 반드시 예비단계가 있게 되어 있는데 거기에 나타나는 일 중의 하나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체되신 그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전존재로 사랑하고 그분이 목적이 되어져서 그분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그들은 갈급하고 그들은 애타고 그들은 슬퍼하고 그들은 부르짖으며 그들은 목말라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흥과 신앙의 본질은 아주 밀점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흥의 길을 예비하는 길은 한편으로는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들은 은사를 우선적으로 구하지 않았습니다. 아까 예언 사역 가운데 나온 내용입니다.

모든 영들을 다 믿지 말라 분별하여 보라 그리스도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 안에 계시다

여러분 이런 말을 들으면 이해가 되시나요 예언은 잘 분별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언 사역 시간에 나온 이 말이 무슨 말인 것같으시나요 지금 말씀드린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특별한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속는 겁니다. 무슨 은사를 위해서 여기저기를 다니십니까 속는 겁니다. 여기 오셔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한 기름부음이나 은사를 위한 목적으로 여기 오셨다면 스스로 속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와야 하나요

예수님은 여러분 속에 계십니다. 부흥을 예비하는 자들은 신앙의 본질이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예수님을, 그 영광의 주님을 알기를 애타하며 갈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보기를 위하여 몸부림치는 자들입니다. 또 그분을 성령의 조명으로 개인적으로 아는 지식이 없음을 인하여 눈멀고 벌거벗은 자신을 깨닫고 애통하는 자들입니다. 이와같이 외부적인 은사나 혹은 목회적인 성공이나 사역의 확장이 아니라 무엇보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부흥에 있어서 필수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 그분을 알기를 열망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인데 아까 있었던 예언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참석하셔도 그러한 자세로 나오셔야 합니다.

아까 이런 예언도 나왔습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계시의 은사가 부어지고 있다”

사실 화요모임 나오시는 분들 가운데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다 듣고요, 예언 다하시구요, 각양 은사가 수없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사를 좇아가면 막다른 골목에 이를 것입니다. 속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일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의 부흥을 예비하는 필수적인 예비단계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쓴 책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도 하나님의 부흥을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영국분이시고,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미국분이십니다. 이렇게 두 분의 배경이 다른대도 말씀하는 바는 정확하게 하나입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가르켜 “혈액형이 같다”라고 합니다. 두 분 다 똑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말씀해 오신 바도 똑같습니다.

아까 예언 중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경청하는 자세로 들으라. 그러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라는 말씀이 주어질 것이라

이 축복이 여러분에게 주어지시길 바랍니다. 시몬이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했죠. 마태복음 16장 16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한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바요나 시몬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여주신 것처럼 신앙의 본질을 보게하시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에 관한 설교를 수없이 들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수십번 이 설교를 들었어도 여전히 보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보게해 주셔야만 보게되더군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은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본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리는 헌신을 포함한 고백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본질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보여주시면 부흥을 예비하는 자들처럼 되어집니다. 내가 벌거벗을 것을 깨닫게 되고,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격체되신 그 주님을 알기를 구하게 됩니다. 주님 알기를 위하여 목마르며 애타며 애통하며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왜 보이니까. 그러나 수십번 들어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깨닫지 아니하면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번 집회에 오신 것은 잘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오신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마음의 자세가 더욱 중요합니다. 또 여러번 오시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여러분을 확 붙잡아 주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까 제 아내가 저보고 “너무 웃지 말라” 고 하였습니다. 까닭은 이렇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지 않으니까 애통해 하는데 너무 웃으면 되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일곱단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단계는 “하나님은 잃어버린 세상을 구속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통해 일을 성취하신다”.

2단계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임재와 목적 그리고 그의 길을 대신할 대체물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3단계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신다”

4단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도움을 청한다”

5단계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여기서 4단계와 5단계는 갈림길인데요, 4단계는 옳은 길이고 5단계는 그른 길입니다.

4단계에서 회개한면 6단계는 “하나님은 회개하는 그의 백성들을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 주심으로 부흥시키신다”. 여기서 부흥이란 “다시 살리신다” 라는 뜻입니다.

7단계는 하나님께서 부흥시키신 백성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 가운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며 그를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잃어버린 영혼들, 곧 안믿는 세상을 이끄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일곱단계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만 가지고는 잘 이해를 못합니다. 지금부터 이것을 부흥과 신앙의 본질에 관련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1단계에 대한 이해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세상을 구속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신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잃어버린 세상을 구원하시되 누구를 통해서 하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십니다. 오늘날 이 부분이 너무나 혼돈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 세상을 구속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하십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다 알아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역중심적이라구요. 목회, 교회, 전도, 봉사. 하나님이 그것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도 전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하나님의 일을 그의 백성들을 통해 성취하시는데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백성들을 부르신 또 그들로부터 원하는 가장 주된 소망은 우리가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게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가장 주된 소망은 우리가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흥의 사례를 하나 읽어드리겠습니다. 115쪽입니다.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시니까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도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뭐냐하면 우리의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실 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영원히 남을 열매를 맺게 된다" 라고 언급합니다. 여러분, 사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전존재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보이시고 우리가 순종하면 그분이 그분의 일를 해 가십니다. 우리는 오늘날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는가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계획을 알아요.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실 것도 알아요.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핵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것을 빼놓고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사역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인간적인 방법과 인간적인 수단들입니다. 더 나아가 자기 욕심이 나옵니다.

아까 예언 중에 이런 예언이 있었습니다.
“너희 사랑이 하나님께로 나왔는가 점검해 보라”

이 말이 무슨 말인것같습니까 목회자나 일반 성도에게 다 해당되는 말입니다. 목회자나 중직자들, 구역장들이 성도들을 사랑할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냐구요 제 개인적으로도 부끄러운 얘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뿐만 아니라 내 생명까지도 나눠주기를 기꺼히 했노나” 고 했는데 정말 사랑으로 하는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는 것과 인간적인 사랑으로 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 차이는 이렇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들을 사랑했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님께 중매하듯 하였습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저들이 주님 안에서 세워지고 주님을 더 사랑하면 되었습니다.

우리도 사랑하기는 해요. 그런데 무얼 하기 위해 사랑하느냐 내 사람 만들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우리 교회 붙잡아 놓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우리나라는 전도사 때에는 열심히 안합니다. 내 사역 아니니까. 어느 기도원 원장이 불평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원장은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어려울 때 기도원에 올라오면 그렇게 도와줬는데 문제가 해결되면 돌아보지도 않는다” 여러분 이 한마디 한 마디 말들을 들어 보십시오. 말로는 다 사랑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전혀 사랑이 아닌 것을 보여줍니다. 왜 그런줄 아시나요 신앙의 본질이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부분이 회복이 안되면 절대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부흥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없구요, 교회적으로도 없습니다. 아시겠지요 우리는 다 압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일을 우리를 통해서 하신다는 것도 다 압니다. 그런데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곧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보다 우리가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소홀히 여깁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우리의 욕심만 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한 내용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당연히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이론적인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 적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서 전국에서 몰려왔습니다. 며칠씩 함께 다니기도 하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능력으로 치유함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본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하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보게 되면 자기의 모든 것을 거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지식인들은 성경을 많이 읽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어디가서 대화에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베스트 셀러 중의 베스트 셀러가 성경이니까요. 어떤 이는 성도들보다도 성경을 더 많이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성도들 남편 중에는 성경을 아내보다 더 많이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그 속에 있는 내용들을 다 알게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을 통해 내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이 하나님, 예수님을 알게되면 그분 앞에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랑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바로 그 예수님 안에서 자기 죄를 위해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발견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 보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이렇게 인격체되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사실들은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오늘날로 치면 신학박사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예수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그 기적들을 보았고 실제로 그 능력을 경험했으며, 그 치유를 체험했고, 말씀을 듣고 감격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사흘 나흘 주님을 따라 산으로 바다로 좇아다녔는데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못보았던 것처럼 바리새인들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박사들 이었을런지는 모르지만 인격체이신 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신 그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면 베드로가 예수님 안에서 메시야요 그리스도를 발견했던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되며 우리는 우리의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며 유일한 주님이며 생명되신 그분과의 교제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 예수님을 구세주요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 얘기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님이요 하나님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여러분 이사할 때 날짜 보십니까 그 얘기가 뭐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유일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과 귀신을 동시에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말하시나요 집회다니다 보면 여관하는 장로님들도 계십니다. 그분에게는 절대로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실제는 돈이 하나님입니다.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하나님이요 능력의 하나님이요 천지를 창조한 분이시오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방면에 박사들이었습니다.

제 얘기는 다시 말씀드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그 기적들을 보았고 실제로 그 능력을 경험했으며, 그 치유를 체험했고, 말씀을 듣고 감격을 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만 본게 아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중에는 제자들만 남게 된 것을 아시나요 다들 떠날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가려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라고 답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 안에서 생명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투자해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많이 알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면 하나님께 “예”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불이익이 생길 것 같으면 “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적당히 넘어갑니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90%의 사랑을 가지고는 안됩니다. 여러분 부부사이를 보십시오. 한 달에 아무리 29일 동안 아내를 사랑하고 단 하루만 다른 여인을 사랑하면 그것은 아내를 사랑하는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을 우리의 전존재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은 이 뜻입니다. 다른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한 달에 천만원, 이천만원의 소득이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을 근심시키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다면 천만원 d니라 한 달 수입이 수억이 된다고 하지라도 “하나님, 저는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만이 필요합니다”라며 그것을 버리는게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을 때 쉽습니다. 사역할 때, “여러분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기 원하는 분 나오십시오” 하면 다 나올 수 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네 집 장롱 속에 있는 500만원 헌금해라” 하면 벌벌 떨 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랑하다고 했는데 500만원은 그 모든 것의 일부도 안될텐데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가 되어야 하는데 500만원 즉 모든 것의 극히 일부분밖에 안되는 것으로도 우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설교를 듣기는 쉽지만 실제로 사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그렇다면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알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이 고백 속에 전적인 헌신이 들어 있듯이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발견하면 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그토록 갈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안에서 생명의 말씀을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돈이 많아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아시겠어요 이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이며 이것이 우리와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며 유일한 주님이요 그분이 우리의 생명되시는 인격체되신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가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이게 사역입니다. 이게 안되면 사역이 아닌 우리의 일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우리의 일은 많으나 진짜 사역은 드뭅니다. 진짜 드물어요.

여기 계신 분들은 안그럴줄 알지만 많은 분들이 세미나에 참석해서 기름부음 받을려고 합니다. 왜 기름부음 받아서 돌아가 하면 될 것같으니까. 이것 속는겁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렇게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자세에서는 하나님의 부흥이 절대 임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영혼이 부흥되지 않습니다. 사역은 바라는대로 확장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부흥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민감했습니다. 그분은 사역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목적이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행할 따름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일은 자기의 일이 아니고 아버지의 일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행하는 그 일은 믿으라 그리하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되리라” 예수님은 아버지가 목적이었고 그의 전존재로 아버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의 자신이 들리면 자기가 전존재로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것을 온 세상이 알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행하심을 보고 그것만 동참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 많은 경우에 능력을 받으면 바로 사역을 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앞에 내 모든 야망을 내려놓고,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때 내가 그분께 순종하면 그분이 나를 통해서 그분의 일을 해 가시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만 드러나시며 나아가 그분을 알기 위해서 고민하고 그분을 알기 위해서 애타하고 갈망하고 사모하고 몸부림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내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행하심을 보고 그분을 신뢰하면서 그분이 행하시는 것을 보기 위해서 기다리고 그분을 의지하고 수단과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 알기를 원하여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면 보게될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갈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옛날로 돌아 갈 것입니다.

부흥이 오는 단계에서 ‘태가 막히는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되니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 단계가 지나야 하나님이 뒷받침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단계를 거치지 않을려고 합니다. 우리는 빠른 소득을 원합니다. 우리는 손에 잡히는 성장을 원하고 있습니다. 확장을 꿈꿉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보게되어 우리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신앙의 본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분께 고백하며 애통해야 할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만 전했지 나 스스로도 하나님을 전혀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마냥 부르짖으며 막힘을 애통해야 할 것입니다. 부흥의 길을 에비했던 자들에게는 이 점이 공통점으로 있었습니다.

태가 막히는 기간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때가 되어 그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 그렇게 세워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스스로 세운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빚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주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빠른 결과를 원해요. 결국 기다리다 안되니까 우리 방법과 수단을 통해 일을 해버립니다. 결국 빚어지는 시간이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만날 기간이 없어요. 우리는 여전히 과거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몰라요.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행하시는 것을 보고 순종하여 그분이 역사하시는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서고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부흥은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이 자세로서는 부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절대로 준비되지 않습니다. 성공한 목회자로서 국민일보에 나올 수는 있습니다. 숫자적으로 성공할 수는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이 임하셔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부흥에는 못들어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맺으실 수 있는 열매가 그곳에는 없어요. 1단계가 “하나님은 잃어버린 세상을 구속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통해 일을 성취하신다” 가 바로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2단계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임재와 목적 그리고 그의 길을 대신할 대체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을 잘 보면 우리가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아주 미세한 마음의 변동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은 활동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급진적으로 이동하는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라고 덧붙입니다. 이 부분을 설명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엄청난 체험과 경험을 하고 난 후에도 그는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는 아리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듯이 이렇게 바울도 예수님 그분만을 아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절대로 그에게는 사역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라고 합니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언젠가 기도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실망 중에 있었는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내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얼마나 눈물를 많이 흘렸던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날 위해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 재벌이나 대통령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돈이 주님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만이라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한다면 베드로가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님 안에서 메시야를 본 것같이 발견한다면 여러분의 모든 것을 그 분 앞에 내려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사랑은 박살날 것입니다. 세상사랑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것도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귀하여 사도 바울은 예수님만을 알기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했고 그리고 자신의 전존재로 그분만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지속적인 열망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만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에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은 마음속에서부터의 열망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떠난 것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 속의 열망이 인격체되신 그분만이 나의 유일한 목표에서 떠나있고, 내 모든 것으로 그분을 알기를 원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에서 내 마음이 떠나있으면 나는 주님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할 수 있습니다. 헌금도 기도도 일등 집사로 소문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중심에 인격체되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가장 소중한 분이 아니며, 바울처럼 주님만을 알기를 원하고 주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떠나있는 것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하나님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하실 때에는 이미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겁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단계는 징계인데 징계가 겉으로 나타날 때쯤이면 우리는 하나님을 삼천리나 떠나 있는겁니다.

목회자나 성도나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회개하고 돌아서면 신앙의 모든 부분이 회복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이 되지 않으면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기도를 많이 받는다고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징계와 신앙의 본질과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부터 31절입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영어성경에는 28절 앞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 아는 지식을 얻는 것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하나님 대접하지 아니하고 그 앞에 경외함으로 엎드려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으로 인해 나에게 손해가 오던지 상관없이 말씀을 따라 순종하려고 하는 자세로 납작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겸손하고 경외하는 자세를 갖지 아니했다는 의미입니다.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 라는 의미는 죄짓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여 죄를 범하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떠나면 다음 구절에 나오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벌어집니다. 곧 우리 가운데 만일 시기하는 것, 살인하는 것, 분쟁하는 것, 사기하는 것, 악독이 가득한 것, 수군수군하는 것 비방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뭘 의미합니까 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두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걷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이런 일들이 가득하는 것은 또 성도들의 삶 속에 이런 일들이 가득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우선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떠났다는 것을 의미하구요 나아가 이런 일들이 나타날 정도면 우리가 하나님을 오래 전에 떠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악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정도면 하나님을 떠난 지 오래된 겁니다. 이런 죄악이 더 계속되면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징계가 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진행되면 심판이 옵니다.

우리는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떠났으면서도 여전히 봉사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설교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전존재로 그 분을 알기 원하고 인격체되신 그 분의 진실로 사랑하기 원하고 열망하는 마음이 내 중심에서부터 사라지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떠난 겁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자리에다 어떤 것을 대체하려는 대체물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 대체물이 형식적인 예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형식적인 예배란 무엇인가요 성도들의 삶 속에 주님을 알고 사랑함이 유일한 열망이 아니라 주일 날 하는 의식으로서의 예배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리에 예배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게 형식적인 예배입니다. 형식적인 예배가 하나님을 대신한다면 그 형식적인 예배는 우상입니다. 왜냐하면 대체물은 모두 다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터진 샘물입니다. 물을 가두지 못하는 터진 샘물일뿐입니다.

여러분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줄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유일한 구세주요 유일한 생명으로서 그 분과의 살아있는 교제 가운데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 때에만 여러분에게 생명과 은혜가 넘칩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떠나 겉으로는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수고할지는 몰라도 소위 주님을 위해 산다고 할지 몰라도 전통적인 예배나 신앙이 하나님 자리를 대신한다면 그것은 우상을 숭배할 뿐입니다. 때로는 사역이 대체물이 되어 하나님을 대신할 수도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전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들뿐입니다. 대체물은 우상입니다.

저는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가장 큰 우상은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성장. 물론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으면 이것은 한낱 우상입니다. 우리는 목회자이기 이전에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안수하였던 아나니아를 보십시오. 대 사도를 안수했던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뭘하고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바울이라는 자에게 가서 안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가서 “네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 예수가 내게 나타나셔서 너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라고 하며 기도했더니 바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며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우리의 목적이 된 마음이 우리에게서 떠나면 아무리 주를 위한 사역이라할지라도 그것은 대체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겁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 나중에는 돈을 사랑하게 되고 타락합니다. 머지않아 쾌락, 명예, 세상을 따라 갑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러 말씀을 하시더군요. 예배가 마친 후에 성도들끼리 대화하는 내용을 들었더니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이번에 우리 얘가 서울대학교에 들어갔어”. 이 말을 듣던 다른 성도는 기가 죽어서 있더랍니다. 제가 언젠가 기도원 집회를 갔더니 누군가가 와서 이런 말을 해요. “우리 남편이 5천만원 연봉을 받았거든 그런데 이제 그만두고 어떤 사업을..........”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또 어떤 이는 “우리 집이 서울에도 집이 있고 여기에도 집이 있는데 또 별장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별장가서 있을거예요”. 저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아니, 뭘 알아 달라고 하는건가 집이 몇 채가 있고 별장도 있는 것을 알아들라고 하는건가” 여러분 왜 그런 자랑을 하는지 보이시나요 주님을 떠나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을 떠나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들은 터진 샘물을 좇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생수를 몰라요.

신앙의 본질을 아시겠습니까 이렇게 신앙의 본질을 떠나면 심판이 온다는 겁니다. 그 중 첫 번째가 하나님의 임재가 끊어지는 겁니다. 임재가 끊어지면서 세상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죄가 뒤따라 들어옵니다. 돌이키지 않아 하나님이 그대로 내어버려 두시면 그렇게 됩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이 죄들이 지금 교회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다는 겁니다. 교회 규모에 관계없이 말입니다.

신앙의 본질과 관계하여 하나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찬양 중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주님 난 알기 원해요 더욱 깊고 깊은 사랑을 왕의 침소로 날 들이소서 성숙케 하소서 내 사랑”

왕의 침소란 아가서에서 따온 내용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과 사랑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침소로 드시라고 하면서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성소 즉 하나님의 품 안, 하나님의 깊은 곳으로 들여 달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속삭임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과 나와 깊은 사랑의 교제를 갖게 해달라는 내용입니다. 그 관계를 허락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가사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내 맘이 주를 원해요 내게 있는 모든 것 주사랑 나에게 입 맞춰 주소서”

어떤 분이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나는 총각 시절 연애할 때 하루종일 여자 생각만 나더라구요”. 가사를 보십시오. 예,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인격체되신 예수님. 그 분이 나의 마음에 유일한 열망이며 내가 원하는 바가 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모든 것을 다해 그 분을 사랑하는 것. 그 분과 특별한 교제 가운데로 더욱 들어가기 원하는 열망. 주님, 주님의 임재로 날 채워주세요. 사랑의 속삭임을 내게 들려주세요. 주님의 임재의 향기를 맛보게 해 주세요. 나로 하여금 주님을 더 보게 해 주세요. 이렇게 된 사람만이 이 찬양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 것처럼 “주님 사랑해요. 내 생명보다도” 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게 신앙의 본질입니다. 지난 번 중보기도 때 이런 감동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모든 것 곧 신앙의 본질이라고 이해라도 하는 성도가 얼마나 있는가”.

신앙의 본질과 관련되어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날 성도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참 아프신가봐요. 교회를 개척하기 전, 여러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예배를 드리고 오면 마음이 많이 아팠던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가 너무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것 같아서 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다고 하면서도 전혀 마음은 하나님께 가 있지 않아요. 모든 예배가 순서에 따라서 자기들끼리 얘기하면서 인도를 하는거예요. 심지어 설교까지도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해도 손색이 없을정도로 ‘하나님’자 만 빼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배하고 돌아오면 30분 내지 1시간씩 회개를 해야만 마음이 괜찮아지곤 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오늘날 성도들이 모두 다 살아야 하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열망을 가지고 이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며 사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산앙의 모든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회가 얼마나 되는지 안타깝습니다. 인격체되신 그 분과의 교제 대신에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열심히 한다는 사고가 있습니다. 그 사고 뒤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야 복을 주시니까. 이렇게 해야 기도응답하시니까. 이렇게 하면 잘되게 하시니까. 목회자들도 이렇게 해야 자기 명예가 올라가니까. 남들에게 이렇게 하면 인정받으니까. 이렇게 해야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니까.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게 당연합니다. 이래 가지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죄악들이 교회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나요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셨으니까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나요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시지 않으시면 간섭하십니다.

제 자신이나 제가 섬기는 포도나무교회를 볼 때에 어떨 때에는 고무되었다가 또 어떨 때에는 낙심되었다가 그럽니다. 낙심할 때도 있어요. 그러나 어떨 때에는 우리 가운데 죄가 돌아다니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죄악들이 돌아다니면 하나님께서 드러내십니다. 드러내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신다든가, 아니면 애통하는 마음을 부어주셔서 기도하게 하심으로 말씀하신다든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이신다든가, 이 성도 저 성도에게 동일하게 보이심으로 저에게 들어오게 함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그것을 들추신다든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본인을 직접 다루셔서 들춰내신다든가 하는 방법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루십니다. 죄가 활동하도록 가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신앙의 본질은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는 지금 어디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3단계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I.M.F가 하나님의 징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많으나 진실됨과 거룩함은 없이 거짓스럽고, 돈을 버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법도가 간 곳이 없고 돈의 법칙만 남는게 우리의 인식입니다. 이 인식이야말로 금송아지입니다. 우리가 이 때까지 금송아지를 섬겨왔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결과 우리가 뿌린 씨앗을 거두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더 큰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신앙의 본질로 교회들이 돌이키지 아니하면 심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4단계와 5단계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라오디게아 사람들처럼 눈멀고 벌거벗고 굶주린 상태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면 더 큰 불행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벌거벗고 눈먼 자신을 애통하기 보다는 이 방법 저 방법 찾아다니는게 현실입니다. 성도 한 사람을 가운데 두고 두 교회가 싸우는 현실에 까지 이르른 실정입니다. 전도사를 고용해서 머리당 사례비를 책정해서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고 교회 의자에 앉혀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방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면. 이처럼 우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6단계를 보십시오. 6단계는 신앙의 본질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곳도 그 곳이고, 돌아가는 길도 그 곳입니다. 돌아가면 교회는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두 단계로 옵니다. 먼저는 교회내에 오고 다음으로 불신세계에 옵니다. 안믿는 세상에 오기 전에 반드시 교회 내에 옵니다. 교회를 먼저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서 안믿는 세상을 만지십니다. 우리는 교회가 회복되기를 구하기보다 하나님의 임재도 없이, 생명도 없이 사람만 끌어 모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먼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물이 밖으로 넘치듯이 부흥의 물결이 세상으로 넘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안믿는 사람들이 수천명 수만명씩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영국의 웨일즈같은 곳에서는 약 6개월 동안에 10만명 이상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이것이 부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흥을 주시기 전에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교회를 회복시키십니다. 그런데 교회를 회복시키시는 길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똑같이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했으나, 똑같이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했으나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예수님 안에서 메시야 그리스도를 또 생명의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았사오니” 라든가 “생명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 때가 1991년도였습니다. 당시 교회에 암환자 있어서 기도해주는 가운데 호주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확신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게 제 중심이라 많은 자료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교회가 시험에 들게 되었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아주 꼼짝못하게 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도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금식을 못합니다. 강단에서 금식설교만 하면 죄책감이 들 정도입니다. 그 때 사흘간 금식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금식도 아니지만 제게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금식하며 하나님게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순간이 “보이시는 순간” 이었습니다.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만약 이 말씀을 그 전에 들었었더라면 이해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주 다녀오면서 사온 설교 테잎들을 들으면서 무릎꿇고 회개하면서 제가 그 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게하신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지금도 주변의 목회자들을 보면 참 부족한 면이 많지만 그 당시 목회를 엉망으로 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생홀과 한국목회에 적응하는데만 해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한국을 떠난 지 7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말귀는 알아듣는데 속 의도를 잘 몰라 애를 먹었습니다. 말은 저렇게 알아듣는 것같지만 도무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가 없어 속을 태우기도 하였습니다. 성도들에 말을 하면 “예” 하며 알아듣는데 나중에 알고보면 “아니오”입니다. 성도들이 “아니오”하면 제가 “아니오”라고 알아들으면 나중에 뒤통수 터집니다. 요즘에는 아아요. 상대방이 “아니오”라고 해도 이, 이 양반이 사양하고 있는거구나 하며 알아듣습니다. 이렇게 적응하는 과정에서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영등포지역에서 개척하는 과정도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오금동에 가서도 완전 지하에서 낮인지 밤인지도 모른채 아이들은 밤낮 형광등을 켜 놓으니까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고 살기도 하였습니다. 발에는 무좀이 걸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낮에는 신학교에 강의를 나가서 강사료를 받아 개척교회 월세를 내기도 하고 하면서 힘을 쏟아부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주님을 위해서 일하였습니다. 이 말은 전혀 거짓말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목회해서 떼돈 벌려고 한 것도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있는 돈은 헌금을 했고, 융자를 받은 것을 갚느라고 애를 썼습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모두 헌금을 했었기 때문에 제가 오금동교회를 사임하고 나올 때에는 단 한 푼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퇴직금 주는 것은 받아 왔습니다. 그외에는 숟가락 하나 가지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신앙의 본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목사로서 제가 인격체되신 하나님을 전하고 가르쳐 왔지만 정작 인격체되신 그 분을 알고 사랑하는 데에는 소홀히 했다는 말씀입니다.

목사로서 하나님을 전한다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능력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미국생활한답시고 때가 얼마나 끼였던지 하나님께서는 저를 지하실에 가둬 놓으시고 얼마나 콱콱 밟으셨던지. 2년 반동안 밤낮으로 기도했더니 묵었던 때가 깨어지더군요. 영어성경공부도 했었습니다. 전단지를 아파트 내에 열심히 뿌렸습니다. 아파트 경비가 못들어가게 하면 담을 뛰어넘어 집집마다 넣기도 하였습니다. 소위 “예수 큰잔치” 열어서 연예인들을 부르고 7부로 예배를 드려보기도 하였습니다. 한 편의 설교를 하더라도 아무렇게나 전하지 않고 그 시점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받으려고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설교가 주어지지 않으면 머리를 책상 밑에 박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말씀이 떠오르지 않으면 자다가 일어나서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두를 내 힘으로 하려고 하지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 할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했습니다.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오고 그 지역이 복음화도기를 구했습니다. 참 모든 것이 그럴 듯 했습니다. 다 주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을렀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이 말은 제가 여러 가지 일을 안했다는게 아닙니다. 주를 위해 한답시고 이 방법도 동원해 보고, 저 방법도 동원해 보았습니다. 기도도 해보고 부르짖기도 하고 작정기도도 해보고 했습니다. 속된 말로 별 것 다했습니다.

그런데 제 얘기를 잘 들으십시오. 주님이 인격체이신데 그 분은 교리의 집합체가 아닌데 막연한 개념이 아닌데 인격체이신 그 분을 내가 먼저 알고 그 분을 나의 모든 것으로 사랑하는 것은 둘째로 놔두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일에만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했지만 그 뒤에는 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빨리 성장 안하면 낙심되었습니다. 왜요 제 명예가 걸려 있으니까. 남들이 “목사님 교회 몇 명 모이세요” 물으면 할 말이 없어요. 거기다가 “몇 년 됐어요” 물으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 때가 제게는 ‘계시의 순간’ 이었습니다. 그 시점이 바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눈을 여셔서 예수님 안에서 메시야를 보게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 전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모르는데 내가 저 분을 전한다고 하면서 저 분을 전혀 모르는데 저 분의 도움만을 구했구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그날부터 주님만을 알기를 구하였습니다. 기도하면서 구했고 성경을 읽으면서 구했습니다. 다른 신앙책자들을 통해서 알기를 구했습니다. 때로는 테잎을 통해서 알기를 구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라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더 알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집중적으로 주님을 찾으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약 2년동안 줄기차게 달렸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너무나도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신앙이 거의 모든 면에서 옆으로 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신앙의 본질에서부터 우리가 옆으로 가 있음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이해부터 시작해서 믿음의 정의,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 등등 모든 면에서 어긋나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신앙의 본질과 관련된 책자도 흔치 않았던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세미나 테잎을 들으면서, 성경을 읽는 가운데, 기도하면서 신앙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말들 하였습니다. 아마 그들은 누구보다도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하지 않는거야”. 그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요리를 하지 않음으로해서 안식일을 범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땅에 침을 뱉되 땅을 비비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알았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들이 본질에서 떠나있었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있어야할 자리를 전통적인 종교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있어야할 자리에 의식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전통적인 신앙에 대해 자부심이 가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매우 그럴 듯 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속에는 세상사랑, 돈 사랑, 시기, 질투가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흥을 일으키시기 전 앞서 살펴 본 것처럼 반드시 길을 예비하십니다. 반드시 부흥이 오는 길을 예비하는 자들이 준비될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구하며 애통하며 하나님 알기를 열망하며 부르짖으며 가슴을 찢으며 한탄하며 탄식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지시고 빚으실 것입니다. 그들을 뒷받침하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가오는 하나님의 부흥에 쓰임받기 위해 미리 준비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머지않아 하나님의 부흥이 올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젠지는 모릅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여러 차례 말씀해 오신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분명히 부흥이 올 것입니다. 그 때에 이렇게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어져서 그릇으로 예비되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본질이 회복되면 개인적인 부흥을 바로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또 본질이 회복되면 교회 성도들이 회복됩니다.

마지막으로 한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2절부터 19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하나님의 부흥을 또 다른 면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흥 때마다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임하십니다. 아까 찬양과 경배 때처럼 하나님의 거룩함과 임재가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은 하나님의 부흥 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몇 십배로 강해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사람들은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고 자기들의 죄를 보고 통곡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견디지 못해 기절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땅에 구르면서 배를 움켜잡고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방문하시면 그렇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흥을 나타낼 또 하나의 말입니다. 이 부흥은 신앙의 본질을 토대로 올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은 그것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저희 교회를 보면 하나님께서 예언의 기름부음을 부으시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아직은 드러 낼 때가 아니라 말하지 않지만 많습니다. 또 여러 가지 은사들이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자매가 이번 집회를 앞두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다고 하면서 이 성경구절을 적어 왔습니다. 예, 당연한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부흥, 그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광채 앞에 사람들은 감당을 못하고 쓰러지고 엎드러질 것입니다. 불신자들까지도 하나님 앞에 경외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나타난 모세의 신앙은 신앙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본 장에서 모세는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구합니다. 다음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흥과 신앙의 본질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구절들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이 구절들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부흥이 이렇게 임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 장에서 나타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12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은총을 입고 있으면서도 모세는 계속 은총을 입혀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은총이란 “favor"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신임”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가운데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기도 중에 알 수 있는 것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세상에 어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더 소중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즉 하나님의 신임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다시 말합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가운데 처한다는 것은 모세에게는 죽는 것보다도 못했습니다. 차리리 죽는게 낫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 기도를 할 때에는 금송아지 사건이 있은 직후였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분을 내셨다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시는 과정에서 하신 말씀이 배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시면서 가나안 땅을 주겠지만 하나님의 임재는 함께 가지 않겠노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절부터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가지 않겠노라는 말씀을 듣자 모세의 반응을 보십시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여러분 시리얼(콘 후레이크 같은 아침식사 대용식품으로 우유와 함께 타먹는다.-편집자 주)을 아시나요 오늘부터 집에 가셔서 아무 것도 먹지 말고 일주일동안 시리얼만 드셔 보십시오. 아마 입에서 별냄새가 다 날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세 끼 만나만 먹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시리얼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고기를 달라고 외쳤던 것이 이해가 됩니다. 그들이 외치기를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 부추, 고기, 마늘도 먹어 기운이 왕성했는데 이 모양되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정력이 쇠하여졌노라고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다른 것을 주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지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앞서 가셔서 싸워주시겠다고까지 하십니다. 그곳에는 과일나무서부터 싱싱한 먹거리들이 넘치는 곳입니다. 고기와 부추, 마늘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곳입니다. 모세의 심정을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집에 가셔서 오늘 저녁부터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고 시리얼만 잡숴보십시오. 아마 일주일도 채 못되어 포기하실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의 자세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모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주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시려거든 차라리 이곳에 있게 해달라는 이 기도가 이해가 되나요 모세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만이 소중했습니다. 제가 신앙의 본질과 관련하여 이런 설교를 많이 합니다. 설교를 한참 들으시고는 돌아서서 하시는 말씀들이 있어요. “그래도, 교회가 성장해야지”. 그것은 전혀 못보신 것입니다. 전혀 못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얘기는 “젖과 꿀이 흐르는데 당연히 주셔야죠” 이 말과 같습니다. 모세에게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교회성장은 하나님이 더 원하십니다.

보십시오. 모세에게는 하나님 그 분만이 생명보다 더 소중했습니다. 그 분의 은총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안가시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도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지금 그 상태에서도 말입니다. 이게 신앙의 본질입니다. 부흥은 이 토대 위에서 옵니다. 꼬 기억하십시오.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름부음을 좇고, 은사를 좇아 여기저기 집회를 다니실지 모르지만 이 신앙의 본질로 돌아오지 않으면 회복은 없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으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그 분과 동행하는 삶도 없습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통해 주님의 일을 이루어가시는 그 회복도 없습니다. 은사가지고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목표한 사역은 이루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사람 앞에서 인정받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회복은 없습니다. 그리고 확신합니다. 그런 자세로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부흥에서는 절대로 서지 못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흔드실만한 모든 것은 다 흔드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이시나요 출애굽기 33장의 말씀을 주셨다고 자매가 가져왔을 때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본질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제가 바라기는 성령께서 깨달음의 순간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안에서 메세야를 보았던 그 순간이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보았지만 보지 못했어도 베드로는 보았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들을 도와주셔서 이것 즉 신앙의 본질이 우리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역대 하나님의 부흥 때 초청되었던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초청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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