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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쟁터에서의 시험 (삼상 11:1-12:25)

첨부 1


하나님의 영이 권능으로 사울에게 임했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사울은 한 마리의 제비가 여름을 몰고 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에 의해 왕으로 선언되었지만, 자신의 권한으로 그들에게 충성을 요구해야 했습니다. 실제적인 왕이 되기 위해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백성들이 왕에게 갖는 실제적인 기대를 충족시켜야 했습니다.(8:6,20). 갑작스럽게 국가적인 인물로 부상한 젊은이가 그 후에도 계속 겸손한 태도를 취한 것은 그의 정치적인 성숙도를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사울은 현명하게도 왕이라고 뻐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전처럼 농부로 살았습니다(10:26:11:5). 그리고 자기를 비난하고 불평하는 자들 앞에서도 조심스럽게 침묵을 지켰습니다.
사울은 비록 왕이었으나 사사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았으며, 칭호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그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사사였던 것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사울이 과도기의 인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바라는 변화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임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울의 정책은 백성의 자발적인 지지를 얻기 위한 단순한 전략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가 추구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그를 백성의 통치자로 선택하셨으므로 그가 정부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행동 지침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부 수립과 사사 시대의 종말을 고할 기회가 오기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전쟁터에서의 시험(11:1-11)
암몬족은 롯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둘째딸과 동침하여 낳은 아들의 후손인 트랜스 요르단 백성이었습니다.(창19:30-38). 이 백성의 혈통이 이처럼 더러웠던 만큼 이 민족의 역사도 죄악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예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히브리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려는‘ 히틀러의 악마적인 정책을 그 때 이미 사용했던 것 같으며, 이스라엘을 요단강 동편으로부터 몰아내기 위해 그들을 학살하고 암몬 왕국을 확장시켰습니다(참조, 암1:13-15).

1. 야베스 길르앗의 승리(11:1-5)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과 얍복강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이스라엘의 갓과 므낫세 지파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적의 국경과 맞닿아 있어 공격당하기 쉬운 돌출부였습니다. 암몬족은 수년 동안 그곳에 눈독을 들여왔으며 입다 시대에는 그 지역을 병합했었습니다.(삿11:4-33). 암몬 왕 나하스는 다시금 그 지역의 중심 도시인 야베스 길르앗을 공격했습니다.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없던 주민들은 암몬 왕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할 터이니 조약을 맺자고 제안했습니다(11:1-2). 그러나 피에 굶주린 이 독재자는 인간적인 정복자가 되려는 생각은 추호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약의 조건으로서 모든 주민의 오른쪽 눈을 파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곳 주민이 애꾸 된 채 노예 신세가 된다면, 그것은 그들을 구해 주지 못한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수치가 될 것입니다.
야베스 장로들은 7일간 말미를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기간에 그들은 이스라엘에 도움을 요청할 심산이었습니다. 그 기간 내에 구원병이 오지 않으면 그들은 항복하고 나하스에게 모든 것을 맡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도시를 습격하기 위해서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것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11:3). 사자들이 사울이 있는 기브아로 파송되어 야베스 길르앗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신출내기 왕에게 전달했습니다(11:4-5).

2. 이스라엘의 소집(11:6-8)
사울은 그 이전의 사사들, 즉, 웃니엘, 기드온, 입다, 삼손과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삿3:10, 6:34, 11:29, 14:19). (삼상11:6)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 그러고 나서 사사기 19:29절에 기록된 살해당한 여인을 토막친 일을 상기시키는 상징적인 행위로 암몬족에 대한 선전 포고로서 이스라엘 전역에 토막낸 소의 부위를 보냈습니다 여기에 사무엘의 이름도 나옵니다. 그 결과
(삼상11:7) “한 겨리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두루 보내어 가로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같이 나온 지라 ”
“여호와의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사울의 활기찬 호소에서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그들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만든 여호와의 권능을 식별하였습니다. 삼십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군사들이 야베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섹에 집결했습니다. 사울은 권능을 가지고 행동했습니다. 그는 백성의 통일된 행동을 확보했으며, 새로이 부여받은 임무의 첫 번째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3. 야베스 길르앗의 구조(11:9-11)
야베스 주민들은 곧 구조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신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암몬 사람들에게 내일 항복하겠다는 전언을 의기양양하게 보냈습니다. 물론 이 거짓 보고를 받고서 “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던”이 적들은 안심했을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즉 마지막 야경을 돌 때(오전2-6시). 사울은 군사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암몬 진영으로 침투시켜 원수를 진압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울은 단한 번에 군인으로서의 재능을 입증했으며 비방 자들을 침묵시켰습니다.
왕위 재천명(11:12-15)
사람들은 사울을 왕으로 임명한 것을 비방하던 자들을 기억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대체로 안하무인이듯이 이들 사이에서도 그런 자들을 죽여야 한다는 항의가 터져나왔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다.”는 이유로 이 엄청난 복수 극을 금지했습니다. 이것은 수년 후 그의 신하들이 아들을 죽이려고 한 그를 만류한 것과 똑같은 근거입니다(11:12-1

3. 참조, 14,15) 왕이 된지 얼마 안되어서부터 사울은 “적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친구로 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늘 그렇게 고결했던 것은 아닙니다(22:6-23).
이와 같이 승리를 거두고 난 후, 사무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 재 천명하는 예식을 거행하기 위해 백성을 길갈로 소집했습니다. 길갈은 사울에게 있어서 운명적인 곳이었습니다. 그 날 그 곳에서 확증된 것이 후일 여호와에 의해 엄숙하게 철회되었기 때문입니다(13:7-15, 15:12-33). 그러나 적어도 이 때에는 기쁨과 새로운 시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에게 거는 귀한 희망이 있고, 그에게서 이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실현되었다는 확증이 있었습니다.
(삼상11:15)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 하니라 ”
사울왕은 이렇게 왕권을 확립했습니다.
히브리 공화국의 고별사(12:1-25)

이제 한 시대의 마지막이 임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어느 누구보다도 선지자 사무엘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사사였으며, 과거와 미래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수년간 그 지역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중추적인 인물이었으나, 과거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백성에게 과거를 상기시키고 미래를 지시하면서 그들의 역사 노정에 대한 해석적 이정표가 되는 말을 그의 마음에 새겨 주었습니다. 사무엘의 연설은 담화 체였습니다. 그는 백성과 상호 대화를 하면서 때때로 청중의 반응을 요구했습니다. 동시에 이 연설에는 언약의 요소들도 나옵니다.
우선, 이 연설에는 전문이 나옵니다. 이 전문에서 사무엘은 자신이 여호와의 대변인임을 밝힙니다(12:6-12).
둘째로, 역사를 개관하는 서문이 나옵니다. 이 서문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개관합니다(12:6-12).
셋째로,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제시하는 도덕적 약정이 나옵니다(12:14).
넷째로, 불순종의 결과를 개관하는 경고(12:15)가 나오고,
끝으로, 비록 순서 상으로는 세 번째의 위치에 들어갈 수 없지만, 미래의 언약을 위한 준비를 지시해 주는 계속적인 준비가 나옵니다(12:13). 물론 이렇게 분석한 사람은 사무엘이 아니라 오히려 인습적인 현대 학자들일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이 사무엘 연설의 핵심 사항입니다. 이 경우에 공식적인 언약 갱신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 전체의 사건은 언약의 목적을 지닙니다. 이스라엘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연설의 강조 점은 이스라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의 고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사무엘의 고별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마침내 사울의 뒤를 이을 왕의 재목으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그것은 사사 이대에 대한 사무엘의 고별사였습니다. 그는 히브리 공화국에 종말을 고했으며, 새 왕국이 복을 받기 위한 조건들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가 버린 시대에 대한 그의 고별사였습니다. 시대는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변화되었습니다. 영원히!

1. 하나님의 선지자의 정직성(12:1-5)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사로서의 자신의 정직함을 선언함으로써 위대한 고별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매우 간단하게 그의 공적인 삶을 개관했습니다.
첫째, 그는 백성이 요구할 때 권력을 왕에게 이양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주의 백성의 충실한 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사로서의 지위에 사사로이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 백성을 위해 봉사했습니다(12:1-2).
둘째, 그는 매우 정직하게 이스라엘을 재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의 것이든 강탈한 적이 있는지, 사람을 기만하거나 억압한 것이 있는지 “여호와 앞에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가 일찍이 뇌물을 받고 불의를 저지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12:3).
백성들은 그가 불의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대답하고 자신들의 행동이 나빴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사무엘은 “너희가 내 손에서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음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증거하시며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도 오늘날 증거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12:4-5). 이 말은 사무엘의 통치에 대해 불만을 가질 만한 실제적인 이유가 없었으며, 따라서 왕을 요구할 적절한 근거도 없었음을 암시합니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관계하신 역사(12:6-12)

이것은 그들과 그들의 조상을 위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의로운 행동에 관한 증거를 개관함으로써 분명해졌습니다(12:6-11). 하나님은 이 백성이 회개하고 새로운 믿음을 가지고 부르짖을 때마다(12:10-11) 그들을 죄의 결과들로부터 구원해 주시곤 했습니다(12:9). 게다가 나하스가 야베스 길르앗을 침공한 최근의 위기와 관련하여, 비록 여호와께서 이미 그들의 왕이신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을 인도할 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나하스가 길르앗을 침공하기 이전부터 왕을 요구해 왔었으나, 사무엘은 이 사건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우기로 그들이 결정했다는 증거였기 때문에 그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3. 왕의 통치 아래 장차 축복 받을 방법(12:13-15).

그들에게는 사울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 왕의 도움을 받아 암몬족으로부터 구원을 얻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면,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살 것입니다.

4. 이 선지자의 말의 확실성(12:16-18)

곧이어 최후의 심판이 건조한 시기에도 “우뢰의 비”를 내릴 것이라는 말로 고지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겨울에 비가 오면 봄에 “늦은 비”가 내리고, 그 후 밀 수확기인 5-6월까지 건조한 날씨가 계속됩니다. 그런데도 건조한 시기에 비가 내리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기적적인 상징으로서, 미래에 받을 하나님의 복에 관한 선지자의 충고인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화가 나서 못 본 척하시는 전능하신 분의 목소리입니다.

5. 죄의 고백과 마지막 권면(12:19-25)

백성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거룩하심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중재해 달라고 사무엘에게 요구했습니다.(12:19). 이에 대해 사무엘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을 간절히 당부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두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약속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2:22). 사무엘은 자신이 그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그들에게 “선하고 의로운 도”를 가르치겠다고 말했습니다.(12:23). 끝으로 그는 그들에게 악을 저지르게 되면 왕과 백성이 모두 멸망하리라고 경고했습니다(12:25).

하나님의 주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도사리고 있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이기적인 이유에서 원하는 것과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포함한 온 삶의 진정한 축복과 우리 구세주의 명예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소망해야 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을 식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실상 우리의 동기들은 혼합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사악한 이기심이 경건한 말과 이기적인 합리화로 그럴듯하게 꾸며지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심이 분명할 때에도 이런저런 일들을 요구하곤 합니다.

일반적인 심리학의 언어를 빌어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그들의 요구가 하나님이 세운 사사들에 의해서는 충족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요구했던’것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밝혀진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정이 그들의 집단적 안전과 행복에 필요불가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필요가 모든 것을 지배했습니다. ‘필요’가 사악한 욕망을 정당화시킨 것입니다. ‘필요’가 하나님을 능가하는 명령이 되었습니다. ‘필요’가 우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들은 자기 죄를 응징하는 행위를 볼 때, 마치 9살 난 어린아이 같습니다. 우리를 노예로 만들었던 것이 우리의 필요가 된 것입니다. 무감각해진 양심에게 필요는 자기 파멸적인 속박보다 더 낫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거부하는 자의 기본적인 품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왕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신17:14-20). 우리는 왕을 세워달라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평가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왕을 임명하실 시기를 결정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시기를 앞당기려고’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룰 시기를 늦추는 것은 잘못이며, 지금 그 약속을 이루어 달라는 자기들의 요구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물론 전적으로 실용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실제적일 수밖에 없다, 왕이 있어야만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경제도 나아질 것이고 생활 수준도 전반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타민족의 조언을 존중할 것이며, 누구든지 시민임을 자부할 수 있는 국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면 장차 세상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더 주의 깊게 들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주장을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민족으로서 그들의 문제가 하나님이 주신 정부 체계의 결함보다는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부족함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암암리에 하나님을 비난하면서 해결 방안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주장보다 더 낫다고 공공연히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뇌우와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성령의 바람이 그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죄를 시인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변화 시기와 죄인들의 변덕에도 불구하고 불변적인 하나님은 그를 믿는 영혼의 닻을 안전하게 튼튼히 매어두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요구에 대한 응답은 정치적인 이론과 정부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습니다. 말씀과 말씀의 하나님만이 행복과 번영의 길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값없는 은혜가 회개하는 모든 죄인에게 임하고, 메뚜기 떼가 집어삼킨 햇수를 보상해 줄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 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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