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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통증의 은혜 (삼하 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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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이란 몸이나 마음에 일어나는 아픈 증세를 말합니다. 오늘은 주로 마음의 통증에 대해 말씀드릴려고 합니다.부모가 되어 자식 하나 키울려 해도 마음 아픈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지요. 결혼하여 남편 얼굴 하나 맞대 고 사는데에도 가슴아픈일이 적지 않습니다.몇명 되지 않는 순원들 맡아 가지고 돌보는데도 어찌 그리 속을 아프게 하는 일이 많은지요.

착하고 열심 있던 젊은 성도들이 졸지에 죽어 우리 곁을 떠날 때에 우린 깊은 통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방비의 노인과 어린 소녀의 살려달라는 애절한 절규를 외면한채 산채로 땅 속에 뭍어버리는 범인들의 뻔뻔스러운 얼굴과 그 가족들의 통곡하는 모 습을 바라보면서 예리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더욱이 내가 비판하고 정죄하는세상의 죄악들을 바로 나 자신이 사모하고 어떨 때에는 그들 못지 않게 그것들을 행하고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아파옵니다.

 이런 저런 통증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살아간다는 것이 힘에 겹게 합 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통증 없이 산다면 행복하겠다. 늙지 않을 것 같다. 통증 없이 산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웃으며 살 것 같다.

아니 통증이 있어도 그리 아프지 않게 쬐금식만 느껴진다고만 해도 훨씬 살만하겠다. 뭐 아파도 이정도까지 아플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책을 우연히 읽고서는 그런 생각을 싹 치워버렸습니다.

그 책에선 통증 없는 세상을 지옥이라고 단정 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증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 이라고 표현해놓았 습니다. 그 책의 저자 필립 얀시는 고통 없는 지옥이란 제목으로 문등병 자들이모여 사는 수용소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문등병의 비참함을 여기서 다시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줄로 압니다. 그 문등병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통증을 못느낀다는 것입니다. 몸에 어떤 자극이 가해지거나 병균이 침투하면 몸전체에 거대하고도 치밀한 조직체계를 갖고 있는 통증신경비상망이 작동됩니다. 그 때 뇌에 전달되는 통증은 뇌로 하여금 온몸에 비상 명령을 내리게 합니다. 몸을 움추리게 한다든지,피하게 한다든지, 눈을 깜박이게 한다든지 병균을 포위하는 항체를 보낸다든지 합니다.

그러나 문등병은 이런 통증체계가 마비되거나 상실 된 병입니다. 그 결과 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이고 처참한 것입니다.

저도 어릴 적에 한 미친사람,여자인지 남자인지 잘 기억이 안납니다, 워낙 분장을 잘해서 ,그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가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아 더 이상 깊이 생각해보 지 않았습니다,그리고 당신 미친 사람이냐고 물어본적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 손가락을 연탄 불에 구어먹고 있었습니다.통증을 못느끼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그래서 미쳤다고 생각했지요.

 우리가 순간순간 느끼면서 살아가는 수많은 통증들은 사실 우리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통증을 상실한 사람들이 어더ㅎ게 파괴되가는지를 알고부터는 통증만세! 통증 예찬론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제 통증이란 안경을 쓰고 성군이라고 불려지는 위대한 왕 다윗 이 어처구니 없이 저질렀던 범죄를 살펴보면서 통증이 다윗의 범죄와 또 그 회복에 어떤 역활을 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다윗의 범죄가 통증의 상실과 절대적 관계가 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한두가지 됩니다.

하나는 그가 범죄하고 자기와 남을 파괴하는 위헙으로 부터 자기를 못 지켰 다는 결과론적 증거로 보아 죄악의 유혹으로 부터 그를 지켜줘야 했을 통증경고씨스템이 고장나 있었다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그가 그 사건이후 지어 노래했던 시편 51편을 보아 그렇게 확신하는 것입니다. 51편 17절에 보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 리이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회복시키신 것은 바로 상한 심령,통회할 줄 아는 마음 이었습니다.

 이제 두대지로 나누어 을 말씀드리겠습니다.첫째는 탐욕과 통증, 둘째는 말씀과 통증입니다.

 1.탐욕과 통증.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통증경고,비상연락망을 마비시키는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무엇이 다윗의 통증을 마비시켰는가 하는 것 입니다. 그것은 탐욕이었습니다.

다윗은 많은 아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왕이 되기 전에 헤브론에서 이미 6명의 부인을 두었고 예루살렘에서 정식 왕이 되었을 때 더 많은 아내를 두었다고삼하5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중 아들 압살롬에게 쫏겨 왕궁을 도망 갈 때에 궁에 남겨두고 가는 첩만 10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울왕의 아내들도 주셨다고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자인 그가 자기의 충성스런 부하인 우리아의 하나밖에 없는 아내를 빼앗은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아를 원수의 칼을 빌어 죽이고 말입 니다. 이것이 탐욕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의 그 탐욕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7절,8절.만일 그 것이 부족하였을 것이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하여 주었으리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야자수 나무 그늘과 할머니의 친절, 차오른 주머니에 욕심이 발동 돈받기 시작물이 줄까봐 밤낮 지킴,줄어 드는 것만 카ㅌ았는데 어느날 아침 보니까 야자수가잘라버림다죽음.

 탐욕이란 처음엔 행인으로 왔다가 조금 뒤엔 손님이 되고,결국 주인이 된다라고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탐욕으로 통증을 상실한 다윗의 상태를 살펴봅니다.

(1)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고 있었습니다:나단의 비유를 듣고 누가 잘못 했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엇습니다.(2)악한 일에 대해 분노를 할 수 있었 습니다(크게 분노하여)/그러나 이처럼 이성이 있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분노할 수있다는 것과 마음에 죄에 대한 통증이 있다는 것는 상관이 없 습니다. 통증 없이도 자잘못을 판단할 수있고 남의 잘못에 대해 핏대를 올릴 수있습니다. 죄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 죄의 유혹이 내게 가까이 할 때 통증을 느끼는 것과는 다릅니다. 형제가 불쌍할 것이라고 생각드는 것과 그 형제의 처지가 아프게 느껴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런 통증이 없이는 죄를 막지도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오래 믿었다는 신자들 중에서 이처럼 자잘못을 분명히 따질줄 알고, 잘못한 형제들을 향하여 판단하고 분노는 크게 하면서도 죄나 형제의 고통 에 대한 통증을 상실한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탐욕이 어디서 시작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까 야자수 할머니의 예에서 살핀 것처럼 다윗도하나님이 이것 저것 주시니까 없을 때엔 조그만 것으로도 감사하고 만족하더니,많아지니까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다. /돈 많은 사람이 돈에 더 욕심 이 많고 지식 많은 사람이 지식에 더 욕심이 많고,권력을 많이 쥔 사람이 그 것에 더 욕심이 많기 쉽다는 얘기입니다.그러니 하나님이 많이 주셨을 때 탐욕의 유혹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탐욕으로 통증을 상실한 다윗이 범한 죄는 극악하고 잔인한 것이 었고 그로 인해 그 자신과 나라가 파괴된 것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그 통증을 회복할 수있엇는가

2.말씀과 통증.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말씀하심으로 그의 상실되었던 통증을 회복시켜 줍니다.

 이 비유는 구약에 나온 가장 뛰어난 비유중 하나입니다. 쉽고 명쾌하고 분명합니다.여기서 하나님이 죄인들의 마음에 통증을 회복시키는 한가지 중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의 이야기처럼 하다가 그것이 바로 너 의 이야기라고 말씀하시는 방법입니다.

펄펄 뛰는 다윗이르되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통증을 상실한 사람들은 설교를 들어도,듣다가 휘 돌아 봅니다, 이것은 꼭 그놈의 이집사가 와서 들었어야 하는건데,다 남의 얘기로만 듣습니다.

말씀을 보십시요 대부분이 남의 이야기처럼 기록되어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생각을 그대로 놔두지 않습니다. 그 악인이 바로 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통증의 종교입니다.

어떤 사람이 왜 예수님은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몸인데도 그 손에 못자국을 남겨 두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손에난 못자국은 죄에 대해 하나님이 느끼시는 깊은 통증의 흔적입니다.

그 자국은 다윗처럼 통증을 상실한 자신의 백성들을 기어코 회복 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통증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의 병을 아신다는 증거 입니다. 내가 너희 병을 아노라 문등병처럼 통증을 상실하고 탐욕에 빠져 범죄하는 우리의 병을 지금도 아프게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거듭되는 죄악과 세상에 꽉찬 범죄와 형제의 아픔에 대해 깊은 통증을 느끼십니까 아니면 탐욕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회개합시다 우린 통증을 가슴에 안고 매일 아파하며 주님게께 도우심을 구하며 형제들을 동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여 깊은 통증을 주옵소서 하나님의 백성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다윗처럼 악한 죄인도 주님 찾아오셔서 기어코 말씀으로 치료하고 회복시켜 놓으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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