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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일과 일상 생활 (골 03: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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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종과 주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히 종들이 주인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요점을 알기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복하라. 그리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라.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을 섬기라. 노예로서 무슨 일을 하던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님으로부터 받을 줄 우리가 아니니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기 때문이니라”

이 본문과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엡6:5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라”라고 말씀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을 증거하기 전에 먼저 본문에서 등장하는 ‘종’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종’은 헬라어로 ‘둘로스’라고 합니다. ‘둘로스’는 푼꾼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이 아니라 어떤 집으로 팔려가면 일생동안 기약없이 종살이를 해야 하는 사람을 가지고 ‘둘로스’라고 합니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둘로스’는 노예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핏 생각해 보면 바울은 노예제도를 정당화 시켜서 말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볼 때 노예제도는 폐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바울은 노예들을 향하여 “상전들에게 순종하라”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바울은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고 옹호하여 그렇게 권면했을까요

그 당시의 노예들은 보통 부유한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보다 더 비참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노예제도를 비난하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노예들에게 주인을 올바르게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놀랄만한 사건은 당시 노예제도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붕괴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해 놓은 구절이 없는데 노예제도는 그리도인들에 의하여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도 노예해방을 위해 힘쓰라고 직접 분부하신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시 노예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누구보다도 낮고 비천한 자들을 사랑하셨고 항상 그들의 친구가 되셨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눅4:18에 보면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노예해방을 위하여 힘쓰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그러나 주님은 노예해방을 위하여 인간에게 가장 완전한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노예제도를 근본적으로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주님은 죄악으로 응어리진 인간의 심령을 치유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가 노예제도를 폐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울이 종들을 향해 “상전들에게 순종하라”라고 가르치고 있는 말씀은 노예제도를 정당화 시키는 말씀으로 받아 드려서는 않됩니다. 그럼 기독교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근본 사상은 무엇일까요

첫째 인간은 생명의 시작에서부터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흙으로 창조하셨읍니다. 부유하고 권세 있는 종들의 주인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물질로 특별한 형상으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 속에서 살펴본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즉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습니다.

따라서 피부색이 좀 다르고 생활 환경에 따라 신체 조건이 좀 달라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므로 평등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구조악을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빈부귀천으로 나뉘어 사람을 차별하고 적대하는 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과 노예들은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받은 모든 인간은 평등합니다. 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속박자나 남자나 여자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평등한 존재인 것입니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경은 최고의 사랑과 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당시 계급주의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빌레몬서를 읽어보면 오네시모라는 노예 이름이 등장합니다. 노예 오네시모는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서 물건을 훔쳐 달아났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인을 떠나 멀리 도망친 다음, 로마 감옥에 갇혔있던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바울과 함께 거하는 동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마음의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바울이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쓴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인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놀라운 중재의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의 법률에 따르면 오네시모는 사형을 면할 수 없는 중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빌레몬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지 몬1:16-17절 말씀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으로 다루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맞이해 줄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 빌레몬은 바울의 요청대로 새사람으로 돌아온 오네시모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맞이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인간의 영혼만 구원하는 진리가 아니라 몸도 함께 구원하는 완전한 진리인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백인들이 흑인들을 법에 의하여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생겨진 이야기입니다. 흑인 교회인 성 시온 교회에서 수난일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이 예배 때 특별한 행사를 계회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정신을 본받아 누구든지 자기가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의 발을 씻는 예식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예배에 백인 판사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존경을 받는 판사로서 대법원장에 내정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올리버 판사입니다. 시온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세족 예식의 광고를 듣고 그는 그 교회에 다니는 자기 집의 흑인 여종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었을 뿐만 아니라 그 검은 발에 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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