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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을 대항하는 생활 (골 03: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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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우리들의 생각을 가시적인 것으로부터 옮긴 후 우리들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진 하나님의 존전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들을 지상 위에 더 굳건히 세워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땅에 발을 딛고 현실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투가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곳도 이 세상에서 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인 생명이 지니는 불완전성과 그리스도가 영광으로 나타나실 때에 드러나게 될 그 동일한 생명의 완전성 사이에 긴장이 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인식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현재와 미래 사이에는 하나의 긴장 이상의 내용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 의와 죄, 그리스도와 연합에서 피어 나는 새 생명과 타락된 인간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옛 생명 사이에는 치열한 전면전(全面戰)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은 이 세상 속의 분망함을 떠나서 죄의 유혹이나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가리워진 채 그윽하고 평화로운 영역에서 편안히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이 새 생명은 우리 주님 자신이 극복해야 했던 이 지상의 싸움터에서 삽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우리들은 광명한 산정에 오른 후 다가올 영광의 전경을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극렬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계곡으로 내려와 있습니다. 이곳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이 살아야 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너희가 죽었고’(3:3)란 말씀은 전쟁이 끝났다는 신호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져 나오는 말씀은 무기를 손에 잡으라는 출전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3:5)

원수

원수는 죄입니다. 그런데 여러 형태입니다. 바울은 막여하게 죄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어떻다는 것을 잘압니다. 그는 인간이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해서, 언어의 모호성을 이용하여 자기에게 가장 부담이 적은 의미를 입히려는 경향이 있음을 숙지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의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죄들을 지명하여 노출시켰습니다. 그 죄들은 사실상 각 시대마다 편만한 것들입니다. 바울은 이것들을 옛 본성에 속하는 옛 사람의 여러 다른 ‘부분들(지체들)’로 빗대어 은유적으로 묘사합니다.‘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이로써 바울은 싸움터의 현장을 분명히 정의해 줍니다. 즉, 죄는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 세상을 죄의 근원이라고 정죄하고 외부로 드러나는 모든 악한 현상들을 공격하기는 쉽습니다. 그렇지만 죄는 무엇보다도 내 속에 있는 죄입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몸과 그 구성 부분들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죄의 내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이 원수는 우리속에 있습니다. 이 세상을 죄와 근원이라고 정죄하고 외부로 드러나는 모든 악한 현상들을 공격하기는 쉽습니다. 그렇지만 죄는 무엇보다도 내 속에 있는 적입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몸과 그 구성 부분들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죄의 내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이 원수는 우리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의 구석구석에 밀착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을 치지 않고서는 이 내적 원수를 타격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들을 정죄하지 않고서는 그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죽지 않고서는 이 적을 죽이지 못합니다. 이 죄의 원수는 우리들의 존재 속에 깊이 침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대단히 미묘하고 어려우며 맹렬합니다. 죄를 대항하는 싸움은 우리 자신들을 대항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 무서운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들은 바울이 앞서 언급했던 도덕 규범이나 금욕적 실천들이 왜 그토록 무력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 것들은 진실되고 양심적인 사람으로 하여금 끝에 가서 패배를 자인케함으로써 절망시키거나, 혹은 몇 번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구실로 인간을 추켜 올리는 역활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따져 보면 전쟁에서는 패전한 것입니다.
그럼 이제 원수의 정체가 노출되었으므로 구체적인 투쟁의 성격을 살피기 위해 갖가지 죄들을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생각해 봅시다.
우선 첫째,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서 당사자 본인에 관한 죄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죄는 자기 몸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3:5).
바울은 이 목록을 가장 조악하고 분명한 죄(부정,不淨)에서 시작하여 가장 음성적인 죄(탐욕)로 끝냅니다. 이런 죄들은 교회 내에서 설 자리가 없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같은 행위들은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는 과거지사가 되어야 한다고 적시합니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3:7)
3:5절에서 열거된 처음 네 가지 죄들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너무도 배치되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탐심은 음성적이기 때문에 숙고를 해 보아야 합니다. 탐심과 연계되어 나오는 무서운 말을 유의하십시오. ‘우상숭배’는 신중,절제, 근검과 같은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정체를 밝히기가 어려운 때가 종종 있습니다.. 프란시스 감독(Francis of Sales, 1567-1622)은 수 많은 고해자들의 고백을 들은 자였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을 탐욕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죄는 다른 죄들 못지 않게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킵니다. 이 첫 번째 범주에 들어가는 원수들은 한 때 우리들의 가까운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더한층 위험합니다.
두 번째 그룹의 죄들은 신자들 사이의 관계와 주로 관련된 것들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3:8).
이런 죄들은 통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수롭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결코 첫 번째 그룹의 죄들 보다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죄들이 교회 속에서 터를 잡고 있으면서 엄청난 해를 끼칩니다. 이런 죄들은 점차 심성을 악하게 만들어 사람의 정신 상태를 거의 영구적으로 비뚤어지게 만듭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이 첨언하는 죄는 거짓말입니다.
‘서로 거짓말을 말라’(3:9).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입으로 하는 거짓말 뿐만 아니고 특히 기만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유감스럽게도 신자들 중에는 교회에서 자기들의 실제 모습이 아닌 것을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즉 죄악된 옛 본성이 회심을 한 이후에도 계속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고 자기들에게는 유혹도, 의심도, 두려움도, 실패도, 악한 생각도 없는듯이 아주 영적인척합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적지 않기 때문에 경건한 듯한 그들의 겉 모양만 보고 용기를 잃는 교인들이 있어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솔직하게 자신들의 허약성을 인정한다면 다른 양심적인 교인들의 낙오감을 덜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승리의 길

자신의 일부가 되어 있는 내적인 적들을 어떻게 쳐부술 수 있을까요 전군이, 아니 전 인구가 적으로부터 급료를 받고 있다면 어떻게 나라가 전쟁에 이길 수 있겠습니까 죄를 파괴시키는 것은 자신을 파괴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죄와 죄인을 구별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이론상으로는 쉽지만 실제는 어렵습니다. 우리들이 두려워하느 근본적인 방법인 하나님의 처방만이 유일한 논리적 해결책입니다. 즉,
‘너희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은 모두 고칠 수 없도록 감염되었으며 우리 존재의 세포마다 영구적으로 썩었습니다. 그래서 죽음만이 유일한 해답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우리들도 그분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죽음을 날마다 확인하고 이 실제적인 사실이 불가피한 투쟁의 순간 순간을 대항하는 실체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럼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2:12). 이 새 능력이 발휘됨으로써 정복당한 죄와 능력이 제재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들을 끌어내리려는 죄의 법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이 새 생명은 오로지 죽음만을 조장하는 오염되고 정제된 폐수를 쓸어내는 맑고 신선한 생수의 흐름처럼 옛 사람을 몰아냅니다.
죄가 과거에 우리들의 구석구석에 침투되어 우리의 모든 기능들을 지배했듯이 이제는 우리의 새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온전히 소유하십니다(롬6:19). 그리하여 생명이 죽음을 몰아냅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이 생명의 근원은 과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 자체는 우리들을 정화시키고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 안에서 태동되고 발휘됩니다. 이 생명은 숨겨 질 수 없습니다. 복음은 한갖 이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신조를 승인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죽음을 정복한 새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죄의 은밀한 구석들을 파헤치고 모든 오염들을 깨끗이 씻어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생명과 죽음 사이에 놓인 이 처절한 투쟁을 하면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죽음을 이기는, 확실하고 꾸준한 생명의 승리를 체험하는 자입니다. 옛 자아가 죽으면 ‘새 사람을 입’습니다.(3:10) 다르게 표현하면, 자연적인 자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항할 수 없는 생명의 지속적인 압력 때문에 퇴각하게 됩니다. 부활의 아침에 닫혔던 무덤을 열었던 이 생명은 현재 우리들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이 생명이 죄로 인해서 더렵혀지고, 비뚤어지고, 망해버린 인간 속에서 활동하며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3:10) 재창조의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최상의 참지식에 이르게 하고 생명이시며 영생이신 하나님과 밀착된 교제를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제시된 복음은 불가능을 요구하므로써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짓누르는 율법이 아니고, 인간을 정화시키고 새롭게 중생시키기 위해 인간 존재의 심층에까지 파고드는 생명력입니다. 이 생명의 힘에 의해 인간은 비로소 자기의 창조주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자신의 참된 소명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생명은 인간들로 하여금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합니다. 곧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해 우리들을 인도해 줍니다. 인류가 대망하는 이 새 사회는 수 많은 정치 조직들과 각종 종교들이 약속해 준 것이지만 지금까지 모두 유혈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새 생명이 창건하는 정의와 평화의 사회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3:11).
이 세 사회에서 인종, 종교, 문화 및 사회적 장벽이 없는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만민의 주(主)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온 창조계가 그러한 인류와 사회를 열망합니다. 그러나, 이 이상향은 인간들이 믿을 수 없는 옛 벗들과 우상들을 결별해야만 달성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현재 우상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각기 철과 나무와 돌과 금과 육욕의 신들을 붙잡으려고 아우성들입니다. 우리들은 불순한 탐심의 세계에서 삽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입은 불의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신들의 정욕에 묶에진 채 힘없이 죽음을 향해 끌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을 포기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사망을 지나셨습니다. 그가 주시는 새 생명은 죽음까지 삼킬 수 있는 삶의 용천(湧泉)입니다.
(솟아나는 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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