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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외모를 보지 말라 (약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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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은 처음에 시작한 열심과 결심과 깨우침들로 인해서 그 다음에는 공부를 게을리 하게 되는 점이 아니가 싶다. 그러나 예전에 잘한 것으로는 오늘을 때울 수 없다. 그것은 어제 일이고 오늘은 오늘 일이 또 있는 법이다. 신앙생활의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된 자리까지 우리를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동안 아무리 잘한 것이 있어도 그 잘한 것을 꺼내 놓고 서로 비교하며 오늘은 게을러도 좋다는 식으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과정을 마쳐 갈수록 다음 단계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다 이루기까지 우리는 뒤에 것을 돌아 볼 틈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뒤에 것을 잊어버리고 부름 받은 대로 상급을 향해, 푯대를 향해, 오늘의 싸움은 계속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자들이 생각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생활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약속들과 복들이 너무나 대단한 것이라는 뜻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고단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너무나 크고 엄청나기에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을 자랑하고 있을 틈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본문 야고보서 2장에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다. 나중에 보면 ‘부자라고 해서 대접하지 말고 가난하다고 해서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것은 세상 도덕과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요구가 아니다. 성경이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 명하시는 이유는 ‘사람은 세상의 것으로 힘을 내거나 그것으로 목적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신자들만은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는 하나님의 상징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성경이 이런 말을 한다.‘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니라’ 왜 돈이라는 말씀을 꺼내시는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돈에 욕심을 낸다. 의식주, 권세 같은 것들은 돈으로 얻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사랑하고 목표로 하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게 되고 이런 것들을 욕심내는 자들이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는 자는 죄악 속에 파묻혀 있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가 되어서 구축하는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목표하고 우리가 욕심내는 것은 신령한 것들이요 영원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고 권세를 가진 것과 돈을 가진 것에 대하여 아첨하거나 부러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복의 전부이거나, 첫번째 두번째 가는 복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것도 기쁘게 주신다. 다만 그것은 복의 유일한 증표도 아니고 뽑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가진 자가 자랑하거나 없는 자가 좌절할 문제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허름하게 입고 왔다고 해서 괄세하지 않는다. 잘 입고 왔다고 해서 머리 숙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있는 사람보고 겸양하라는 것은 혹은 그것으로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봐 절제하라는 것이고, 없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깊으신 뜻과 능력으로 하시는 일이기에 우리가 불평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심에 있어 어떤 사람들을 들어 쓰시는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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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
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
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
26-29)”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용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도리들은 우리의 산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것, 세상이 만들어 낸 것을 목표로 하거나 내용으로 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 치장한 것에 대하여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는 이유이다. 이 말씀이 야고보서로 넘어간다. 야고보서는 ‘행함 없는 믿음’에 관한 싸움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
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왜 행함이 없는가 그가 믿는다고 하는 도리는 이 세상의 것으로 내용을 삼거나 이 세상의 것으로 목적을 삼는 것이 아닌데 사람의 신앙이 세상의 것에 미혹을 받기 때문이다. 돈이 해 줄 수 있는 것에 내 시선이 가면 돈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믿음이 실천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에서는 믿음이 행세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우리만의 싸움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이미 해온 싸움 중의 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2
-4)”
이것은 하박국 선지자의 하나님을 향한 일종의 반문이다.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1장 5-11절까지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
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
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
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
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합 1:5-11)”
‘불의한 자를 왜 그대로 놔 두십니까’ 하는 하박국의 질문에 하나님은 ‘네가 지금까지 본 것은 별 것 아니다. 앞으로 더 사나운 백성이 일어 나는데, 그들은 더 강포를 행하고 더 패역하고 더 악질같이 놀 것이다’ 대답하셨다. 12절 이하는 다시 하박국의 질문이다.
“선지자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
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
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
를 세우셨나이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
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
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
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
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
케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합

-31-
1:12-17)”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공의로 행하지 아니하시고 왜 이렇게 하십니까’ 재차 묻는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
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세상은 점점 더 악하여 간다. 그러면 의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환경과 조건의 개선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리라’ 하나님의 답변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우리 신앙 중에 가장 넘어서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왜 예수를 믿고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사는데 점점 삶이 더 힘들어지느냐’는 항변이 신자들에게 있다. 왜 그럴까 의인은 믿음으로 살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 아주 큰 비밀이 있다. 우리가 지금 쌓아가려고 하는 것, 우리가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는 세상의 것으로는 도무지 도움을 받지 못하고, 권세를 자기고 이익을 보지 못한다. 세상의 안일과 평안과 자랑이 이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의 자랑을 위하여 돈을 좇지 말고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좇지 말아야 한다.
신자가 제일 많이 노력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것’이다. 신령한 영력을 기르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며, 구하며, 말씀을 상고하고, 거기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과 사귀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찾아 오신 것 같이 십자가를 지는 자리까지 가야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 비판하고 자르는 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영향력을 받도록 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신령한 사람이 되자.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와 거룩과 영광, 영혼을 냄새 맡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요구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들이 다만 율법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요구 자체는 우리가 죄를 지었느냐 안지었느냐를 따지는 문제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 사람으로 변해 있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있는 요구들인 것이다. 그것은 율법 이상이다.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지킨 것에 끝나지 않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 것이 법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서 나 스스로 영광된 자리에 도달되는 것이다.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하는 것이 명령이고 그것을 지켜야 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기도를 하므로써 내가 기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되고 거룩함과 영광의 자리에 진일보 하는 신령한 사람으로의 성숙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복인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 그것은 그것 자체로 우리에게 복된 약속이 되는 것이다. 신령한 일을 사모하여 경건을 연습하라. 이것이 우리의 책임이요, 명령이요, 숙제일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복된 은혜인 것이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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