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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난과 핍박의 예고 (요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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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4-16장까지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된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신자가 이 요14-16장의 내용을 놓치게 된다면 기독교의 핵심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서도 엄청난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요16:2절을 보십시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 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예라고 여겼던 대표적인 인물 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 하며 하나님의 편을 드는 행동인줄 알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완벽하다 할 정도로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더 이상 높을 수 없는 지위인 바리새인의 위치에 있었던 자였습니다.

이같은 자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할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스스로 는 하나님을 대단히 위하고 열심을 낸다고 한 그것이 하나님을 찌른 격이 되고 말았 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곧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 문제에 있어서 신앙 의 핵심을 놓쳤을 때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그렇게 하나님을 오해하고 신앙을 혼동하는 이유를 요16:3절에 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이 과연 무엇을 놓고서 씨름을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은 바로 이런 점을 중심으로 추적해 보고자합니다.

 세상의 일반 종교들과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일반 세상 종교가 이 땅에서 옳고 그른 것을 심판하는 것이 전부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지 금 옳고 그른 것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심판합니다. 기독교는 이 땅 에서 잘못된 길로 가는 자들을 옳게 만들려는 종교라는 점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 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옳고 그른 것, 선하고 악한 것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핵 심으로 삼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 구분은 맨 나중에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 이 땅에서 모든 선하고 악한 구분이 이루어지고 그 심판과 응분의 댓가도 남김 없이 치루어진다고 보면 그것은 기독교의 신앙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고 일단 보셔야 합니 다. 현재 하나님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문제 투성이 인간들을 불러서 올바로 바꾸어 온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게서 이 땅에 내려오셨으며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하나님의 의중과 그 뜻은 아랑곳 하지 않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기독 교를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요 능력있는 분이시므로 하나님께서 이 일 을 굽어 살피신다면 나를 이렇게 원통한 일을 당하게 그냥 놔두실 리 없다!'고 생각 하느라고 다른 일을 더 이상 못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우 리의 신앙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인생 에 있어서 누가 더 옳으며, 누가 더 나으냐를 이 순간에 심판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아직도 완전치 못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 버리고, 하나님을 모욕되게 한 죄인들을 부르시고 찾으셔서 고쳐서 그들을 아름답게 완성시키시려고 하시는 것 이 목적이십니다.

그런데, 이같은 하나님의 뜻과 중심을 모르고 누가 더 옳고 그르냐 하는 문제로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너무도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 아버지 와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인생들의 그와같이 어리석은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말 해 내가 분명히 옳은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고생을 해야 되는가 그리고 저들이 저렇게 악한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저렇게 잘먹고 잘 사느냐 하는 의문이 커다란 주 제가 되어 고민하곤 합니다. 그 좋은 한 예가 시73:1-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 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 만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 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신자가 보니 악한 불신자가 잘 살고 잘 먹고 죽을 때도 잘 죽습니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건강합니다. 고난도 없고 재앙도 없습니다. 사기만 치고 나쁜 짓만 했는 데도 애들은 다 공부 잘하고 사는 땅마다 값이 오르고 그 사람이 탈세했을 때에는 안 걸리고 그 사람이 하는 공사는 부실 공사를 해도 사고가 안 납니다. 그래서 그들 은 기고만장하여 재고 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시73:6-9절을 다시보시면: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 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이들은 기고만장하여 우리를 보고 `야,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믿느니 차 라리 내 주먹이나 믿어라!'고 하면서 그 혀가 땅을 두루 다닙니다. 이런데도 하나님 께서는 벼락도 안 내립니다. 오히려 안 떨어져야 할 곳에 벼락이 떨어져서 당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일하시는가 하나 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는 혼동 속으로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이 와같은 문제 하나만 주제로 하여 성경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하박국 선지자입 니다. 합1:2-4절을 보십시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 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 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 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면서 어찌하여 의로운 자들이 불의한 자들 에게 공격을 받으며 해를 받으며 핍박과 환난 속을 걸어야 합니까 하는 것이 이 하 박국서의 주제입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로 씨름한 책이 하박국서입니다. 오늘 우리 가 살펴보는 요16:1-4절의 본문에서도 이와같은 문제를 다루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께서는 이같은 문제에 대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환난과 핍박을 받으리라 그래서 미리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못을 박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 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신자들의 환난과 핍박을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은 없고 다만 그런 고난이 있을 것을 예고하실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고난을 면하는 것이 목 적이 아닌 것입니다. 고난을 당해야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정 당하고 잘 못한 것이 없으면 고난을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시험에 걸리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 믿어서 편안하게 된다는 것은 아니 라, 예수를 믿어도 사람들 앞에서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과 핍박을 피하고 면하려는 노력 보다도 이 핍박과 환난이 왜 내게 필요한가 하는 방향으로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에는 어떤 의문과 질문들을 갖고 있는지를 솔직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려운 시험과 환난 앞에서 `이 환난과 시련이 왜 내게 필요한가'를 질문하였습니까 아니면 `왜 내가 이같은 어려움을 당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이 시련을 면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까 한번 자 신에게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신자들이 당하는 가장 큰 유혹이 있다면 환난과 핍박이 왔을 때, 거기서 생명과 진 리를 찾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을 면할 수 있을까하는 것을 더 중요시 하는 데 있습니다.

 이제 이 문제를 좀 더 넓혀서 생각해 보십시다. 요14-16장 사이에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몇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즉 평안을 약속했으며, 기쁨을 약속했습니다. 요 14:27절에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 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 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또한 요15:11절에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 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기뻐서 행복해지며,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것이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를 믿고 얼마나 평안해 보셨습니까 솔직히 이야기 해서 예수를 믿으면 외적인 환경에 `불화'부터 찾아 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며, 아비와 아들이 싸우는 일들이 실제로 생깁니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가정이 아직도 우리 교인들 중에는 있습니다.

`네가 예수를 믿어 우리 집안에 이렇게 지지리도 안된다'는 이야기는 신자들이 불신 가족들로부터 자주 듣는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기쁨과 평안을 이야기 하실 때 이런 단서를 붙인 것을 유의해 보셔야 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즉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이란 내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15:11절에 기 쁨을 이야기할 때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 려함이니라 분명히 보통 말하는 기쁨이 아니라, 내 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서 약속하시는 평안과 기쁨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 평안과 기쁨은 환난과 핍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놀랍게 유지되는 기쁨과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말하는 평안과 기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이것은 세 상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은혜입니다.

세상의 평안과 기쁨은 문제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평안이요, 어려움에서 보호받고 받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기쁨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그 정도의 평안과 기쁨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 한 보편적인 평안과 기쁨으로 만족할지 모르나 신자들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우선, 도대체 신자에게 환난과 핍박이 왜 필요한가 하는 점을 살펴 보십시다. 마 태복음 13장에 보면, 환난과 핍박이 우리 성도에게 왜 필요한지 가장 큰 이유가 여 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환난과 핍박은 진리와 생명이 되는 천국이 그 영광을 가리우고 이 땅에 나타났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 객 관적으로 절대 옳으며 복받는 것입니다만, 이같은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세 상 사람들 앞에서 세상적인 부귀나 권세등으로 증명해 주시지 않기 때문에 환난과 핍박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신앙이 옳다는 것은 이 땅에서 증명될 일이 아니라, 장차 이 세상을 떠나서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같은 사실들이 마태복 음 13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 내용들입니다.

성경에서 비유가 제일 많이 나오는 장이 마태복음 13장입니다. 마13장은 천국비유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천국 비유가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난 후 제자들이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해 줍니다. 마13:18-23절 을 보십시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 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 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 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지금 천국을 씨 뿌리는 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밭의 비유가 아니라 씨 뿌 리는 비유입니다. 지금 좋은 밭이 되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씨를 뿌렸는데 길가에 뿌리워졌으면 씨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싹을 내지 못합니다. 죽는 것이 당연합니 다. 이것은 일상 생활에서 늘 보는 일입니다. 천국이 길가에 뿌리워질 수 있다 그럽 니다. 천국 말씀인데도 그것을 받는 자가 길가 같은 사람이라면 그걸 받아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가 그걸 빼앗아 갈수 있다고 그럽니다. 이것 핵심입니다.

지금 천국은 그의 영광과 권위와 권세를 감추고서 우리를 초대하러 왔기 때문에 그 것을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으며 누가 와서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것이 비밀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차라리 하나님께서 `그 말씀의 씨앗을 거부할 수 없도록 권세있 게 와서 사람들을 보기좋게 항복시키시면 좋지 않을까요'하면서 반문할 수도 있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인격적인 결단과 선택과 상관없이 그냥 붙잡아 가는 식으로 말씀을 주시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 말씀을 보이시고 나타내셨을 때 우리가 자원하여 항복하 며 예! 하고 주님을 붙잡는 인격적인 결단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의 영광이 악한 세력에 의하여 모욕을 당하시기도 하고 방해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부드러운 말씀으로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 말씀이 천국과 생명 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권세와 영광을 가리우고 감추고 나타 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이 그 귀중함과 영광을 겉으로 보아서는 제 대로 찾아 볼 수 없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천국의 비밀이라고 11절 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밀이라는 것은 신비라는 뜻입니다. 즉 수수게끼 같은 모습으로 와 있다는 것입니 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수수께끼요, 감추어져 있는 보화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처음에는 꼭 한 번씩 이 좋은 예수를 잘만 말하고 설명하면 다 믿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그때 나에게 얘기해 주었던 사 람이 설명을 잘못해서 못 알아 들었었는데, 이제 믿고 보니까 이렇게 말하면 될 것 같아요!'하면서 친구들을 다 불러 모은 다음에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하면서 부지런히 설명해 보지만 그래서 그들이 믿었습니까 아무도 안 믿습니다. 믿을 만도 한데 놀랍게도 아무도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믿은 것도 신기한 일이고 다 른 사람이 믿는 것도 신기한 일인 것입니다.

바로 이 신기한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씨를 뿌리도록 허락하고 계시는 것 입니다. 길가에 뿌려지고 가시떨기에 뿌려지는 한이 있어도 아직도 남아 있는 옥토 들을 찾아 씨를 뿌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구원의 문을 열어 놓기 위하 여 당신의 권세와 영광을 가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악한 세력이 감히 우리 에게 환난을 주기도 하고 핍박을 하기도 하고 방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 나님께서 100년 전 쯤에 이 구원의 문을 닫고 그 권세와 영광을 나타내어 버리셨다 면 어떡할 뻔 했습니까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심판을 보 류하고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요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지금 환난이 있고 핍박이 있지만 이와같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에 감동 해서 기쁨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 식으로 고백을 한다면 ` 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려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있는 것같이 내가 지금 당하는 환난과 고통으로 인하여 아직도 구원의 문이 연장되고 있다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문에 초대되는 죽은 영혼들을 향하여 나도 한 증인으로 서게 되는 이 특권을 한없이 기쁘 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구원의 기쁨은 아랑곳 없이 예수를 믿었더니 내가 하는 사업마다 잘 되고 쳐다보는 것마다 모두 내 것이 되었다는 식으로 신앙이 되어 간다면 그것으로 어떻게 천국 가는 사람들로 꽉 차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예수 믿고 천국가는 길 이 그렇게 세상 일로 형통해 지는 것이라면 천국에는 스탈린이나 김일성이 같이 독 한 사람들이 먼저 자리잡고 앉아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어찌 천국 가는 길이겠습 니까 마태복음 13:31-32절에 이 문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겨자라는 나무가 자라면 커서 새가 깃들어 집을 지을 만큼 큰 나무가 되지만 씨일 때는 먼지처럼 작습니다. 천국이란 이와같다는 뜻입니다. 즉 그 엄청난 천국이 지 금은 마치 표시도 안 나는 아주 적은 씨앗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흙 속에 심기워지 면 엄청난 변화를 마침내 나타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이란 손바닥에 놓고 보면 보잘 것 없이 작아 보이지만 그것이 밭에다 심기워 워져질 때 천국의 그 장엄함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씨앗이 밭의 흙 속에 파붙혀 심기워져야만 됩니다. 즉 사람의 마음의 밭에 심기워져야 하는 것입 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의 밭에 기워졌기 때문에 이미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있 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디 하나님이 있으면 한 번 보여 봐라!', `야! 넌 그렇게 열심히 예수를 믿었는데 왜 밤낮 그 모양이냐 그 정성으로 부처를 섬겼어도 뭐 하나쯤 되었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천국을 손바 닥에 들고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 밭에 심기 워져야만 알 수 있습니다. 심기워졌기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는 분별할 성질이 못되 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육신의 눈으로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무식한 요구를 무엇으로 말립니까 무식하니까 저들은 더 용감하여 날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마태복음 13: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 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부익부 빈익빈입니다.

알면 알수록 이익을 보고 모르면 모를수록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세 계에 불문률인 것입니다.

이것은 달리말하면 신앙의 문제가 한 번 헷갈리기 시작하면 그 뒤로는 다 틀려버리 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세계의 중요한 비밀입니다. 천국이 지금은 영광과 권세 를 보류하고 우리 가운데 들어와 있다는 이 비밀을 빨리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황금 보석으로 꾸민 집에서 영원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사람들 입니다만 아직은 아닙니다. 지금은 그 때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마13:44절 에서 중요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 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보화란 금은방에서 깨끗하게 진열해 있다든지 견고한 금고 속에 보관된 것이라야 그럴듯 한데, 지금 보화가 밭의 흙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보물 같 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비밀입니다. 왜 이렇게 천국 보 화가 비밀스럽고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까 예, 구원의 시기를 더 연장하기 위해서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구 원의 문을 열어 놓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심판권과 권세를 보류하고 계시기 때문 에 하나님께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시며 동시에 우리들도 환난과 핍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기간이 우리에게는 적극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복된 기간 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5:3-4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런데 우리는 이 환난 앞에서 판판이 깨어지고 지기가 일쑤입니다. 왜냐면 육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승산이 없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를 도우실 보혜사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롬8:26절에: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의 기도는 `늘 편하게 해 주십시오, 배부르게 해 주십시오, 등 따뜻하게 해 주 십시오, 환난 자체를 떠나게 해 주십시오!' 이정도 밖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지칠 때, 혹은 신앙 생활에 회의가 왔을 때 왜 나만 이런가 하고 생각하지 마시고 성령의 간섭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왜 이런 길을 가야 되는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되는지 성령 하나님 가르쳐 주옵소 서! 이런 일을 통하여 무엇이 훈련되어야 하며, 내가 아직도 무엇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 알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참 신앙입니 다.

 뜻밖에도 많은 신자들이 그의 신앙 생활을 가능한 한 멀리 도망 다니며 시간을 질 질 끌다가 끝내려 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면으로 승 부를 걸어야 합니다. 그 모든 어려운 과정들을 통과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 구하시는 그 수준에 드디어 기쁨과 지랑과 영광으로 서게 되기를 기대하시기를 바랍 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요구입니다.

`내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너희를 괄시하는 날이 온다. 너희가 고달 프리라. 그러나 그 길은 내가 정한 길이요 그 길을 통과해야만 이 영광스러운 자리 에 올수 있느니라!'고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제발 속지 마십시오 편한 길은 없습니다. 영혼이 꿈꾸듯이 편안하게 천국으로 실려 가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라 승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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