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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할수 없는 고난이라면 (요 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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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북쪽의 북해에서는 청어가 많이 잡힌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해 에서 잡힌 청어를 산 채로 영국시장까지 가져오기란 불가능했는데 유독 한 선장만큼은 청어를 영국까지 산채로 가져와 큰 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그 래서 다른 배의 선장들이 그 비결이 있는 줄 알고 알아 보았더니 그 비결이 란 청어가 담긴 탱크에 메기를 한 마리 집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메기는 청 어의 천적입니다. 그런데 청어들이 메기때문에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는 중 에 영국에 도착 할 때까지 살아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중에는 우리를 괴롭게만 하는 고난도 있으나, 이처럼 우리를 살리는 고난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서 붙들리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으면서도 피하 지 않으시고 순순히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유익을 아셨고, 이 십자가의 고난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믿으셨기 때 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 같이, 우리에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믿 음으로 새 삶을 살려할 때, 거듭나는 과정의 아픔과 주위로 부터 오는 핍박 과 멸시를 각오해야 합니다. 교회가 정말 교회다운 교회로 바뀌어 지는 과 정도 그렇습니다. 희생과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정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녀가 서로가 먼저 죽고 변화되기 를 힘써야만 됩니다. 우리가 정말 물질면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한다 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던 것처럼 우리의 모든 소유가 결국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하며, 10원 하나도 하나님의 뜻대로 쓸 수 있는 신앙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구원의 역사와 부활의 승리를 앞두고 십자가의 고난이 있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려고 하고 정말 복된 삶을 살려고 할 때 먼저 고난도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고 난을 피하겠습니까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 듯이 우리에게도 피해서는 안되는 고난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믿음 으로 살려 할 때, 다가오는 고난을 어떻게 이겨 나가야 하는 지에 대해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십자가가 피할 수 없는 고난인 줄 아시고 고난을 향 하여 담대히 나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 사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간적인 고뇌가 깊었음을 다른 복음서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는 과정부터 이 세상 모든 죄인을 대신해서 하나 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죄인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 의 죄가 만천하에 공개되고, 그 죄에 대해서 무서운 추궁을 받아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너 이런 죄를 지었지!' 하는 정죄를 받아 보셨습니까 죄인 이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지나가던 여학생을 성폭행했던 한 청년이 경찰서에서 조사받기 위해 기다리던 중, 격분한 그 여학생의 아버지에게서 닥치는 대로 두들겨 맞앗습 니다. 주위 사람들이 말리지 않았으면 죽이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 청년 은 많이 다쳤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정상참작으로 무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인이 당하는 수모입니다. 또 한때는 존경을 받던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은밀한 죄가 드러나서 옥에 갇히게 될 때, 누가 이 가증스러운 사람 을 동정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죄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 지시는 것입 니다. 자기가 자기자신의 죄값을 지는 것도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르 는데, 온 인류가 당할 모든 죄값을 다 지셔야 하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만큼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최종 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 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로 인하여 멸망할 전 인류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셨을 때, 담대하게 일어나셨 습니다. 그리고는 똑바로서서 자신을 잡으러 다가오는 무리들을 만나셨습니 다. 병정들이 누가 나사렛 예수인지를 물을 때 내로라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와같이 고난 앞에서 담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담대함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 도들이 여기서 흔들리고 맙니다. 고난 그 자체보다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두려합니다. 자꾸 남과 나를 비교하고, 뒤를 돌아 보고, 땅만 내 려다 보고 한숨과 걱정입니다. 억지로 겨우겨우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 로 여기에 신앙의 실패와 좌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담대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기도입니다. 예수님에 게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유명한 피땀을 흘리는 기도가 있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죽게 되었으니 나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하 라고 까지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그친 후 예수님은 담대하셨 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시련의 세상은 우리를 위축시키지만, 올바른 기도와 깊고 간절한 기도는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평소의 기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님은 항상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겟세마네도 그가 늘 기도하셨던 곳의 하나 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지는 이 어려움 앞에서 기도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응답과 기도의 역사에 대해서 믿지 못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부분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만 기 도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같으나 좌절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 갔을 때를, 다윗의 고백을 생 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그 담대함과 확신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것은 그가 소년 목동으로서 들판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을 때, 늘 하 나님의 도움을 생생하게 체험했던 것 때문이었습니다. 갑자기 기도하려니까 잘 안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매일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우리를 고난 앞에서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기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본문:7-8에서 예수님은 붙들리시면서 제자들은 다 놓아 주라고 병사 들에게 말합니다.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스런 배려이기도 하 지만 십자가는 예수님 혼자 질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입 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죄없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바로 이 정신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고난 앞에 설 때, 우리는 사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문제임에도, 할수 있는 대로 피할 생각부터 먼저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문제와 어려움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어떤 성도의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새벽기도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평소에는 새벽기도 나가는 것 반 대하다가 어려운일이 생기니까 모른 척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은근히 새 벽기도해서 해결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기대를 가졌습니다. 부인도 이번 기 회에 가정의 신앙문제를 해결의 기회가 되게 해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러 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더욱 어려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화 를 내고 부인더러 교회에도 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맏을 수 없 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하나님을 가소롭게 보는 것입 니까 기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가장인 것입니다. 가장인 자신은 가만히 있고 부인의 기도에 어떤 역사가 일어나나 구경만 하려고 할 때 하 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의 가정에서 가장들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모릅니다. 하 나님을 믿습니까 우리에게 기도의 특권도 있지만 책임도 있음을 아십니까 그런데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어려운 일이 계속 많고 기도할 제목도 많은 데도 걱정은 할 줄 알고 고민은 하면서도 왜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해야 할 책임은 지지 않는 것입니까 가장이 앞장서서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내위해 기도 하십니까 자녀위해 기도하십니까 열심히 회사 나가서 일해서 돈만 벌면 됩니까 이따금 가족들과 함께 외식이나 하면 가 장책임 다한 것입니까 그만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세상사람들로서는 훌륭한 가장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기도하지 않는 큰 죄를 짓 고잇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가정도 그런가 하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기 책임을 다하 고 있습니까 특히 교회의 임원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교회 임원은 아 무나 세우는 것도 아니고 무한정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 교우들을 대 신 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권사 한분은 적어도 15명의 교우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15명을 전도하거나 15명의 영적 책임을 질만한 능력이 있어야 권사로 세운다고 합니다. 명예직이 아닙니다. 그러 므로 본인이 책임을 다 하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교회를 해롭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요나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지 못함으로 함 께 배를 타고 가던 모든 사람들이 풍랑을 만나 다 죽게 되지 않았습니까 아간 한사람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고, 다윗왕도 하나님 앞에 범죄 할 때 그로인해 70,000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온역으로 죽지 않았습니 까 책임맡은 사람들은 이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에 게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요나가 회개하고 자기 가 책임을 지고 나설 때에 배에 탔던 모든 사람도 살고 요나 자신도 살았음 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도 자신의 죄를 책임지고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는 자 세를 가지고 나갈 때, 고난을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째, 성령충만으로 변화 받아야 합니다.

베 드로는 예수님이 병사들에게 붙잡히는 모습을 보고는 흥분하였습니 다.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지키고 고난에서 구출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그때 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검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을 돕는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에수님이 하시려는 일을 방해 만 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네 검을 집에 꽂으라는 것 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자기를 막으시는 지 알 수 없어서 몹시 답답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열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쓰임받 지 못했을까요 성령충만으로 변화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변화받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아 보려고 하거나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때, 그가 아무리 부자고 똑똑하고 재주가 많아도 하 나님은 쓰시지 않습니다.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오히려 방해를 놓고 문제만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다른 일은 다해도 십자가는 질 수 없습니다. 교회 헌신 봉사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다 잘하다가도 십자가를 져야 할 일이 생기면 도중에 슬그머니 빠져 버리는 사 람을 봅니다. 아직 자신의 인간적인 힘으로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기 때문 입니다.

 사실 이 일이 있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그렇게 기 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잠이 들었던 것 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마26:38)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 마음과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마26:33에서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그 마음이야 예수님을 기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가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실수와 좌절을 많이 겪을 것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충만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의하지 않은 우리의 재산 용기 능력이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모릅 니다.그래서 예수님은 예언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말씀입니까 이것이 성령충만으로 변화받자 못한 때 우리의 모습입니 다.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기는 본의 아니게 커녕 방해와 문제덩어리 역 할만 하게 되는 것마입니다. 제 말이 너무 과격합니까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화가 났는 지도 모릅니다. 오기가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다짐하기를 내가 주와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다른 제자들도 다 그렇게 하 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호언장담하고 죽로 각오했던 이 베드로와 제자들이 죽 음은 커녕 우습게도 졸음에 진것입니다. 졸음때문에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 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 받지 못한 자의 실제 모습입니다. 마음 으로는 다 할 것같습니다. 충성스러운 결심도 해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지 않습니다. 졸음조차 이기지 못하는 형편인줄 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 로는 혼자 흥분해서 날 뛰었지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 니다. 그는 고난이 닥쳤을 때 비참한 패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삶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는 그 이후 예수님 부 활 승천을 보고 약속하고 지시하시는 대로 마가 다락방에 모여 성령의 충만 을 사모하며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 이후 하루에 3 천명씩, 5천명씩 구원시키는 사도가 되었고 정말 순교로 그 사명을 마치는 대 역사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의 고난을 이기는 힘은 오직 성령충만에서 오는 것임을 명 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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