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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로 향한 회개 (마 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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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서 우리는 대강절 둘째 주일을 맞게 됩니다.대강절 둘째 주일의 주제는 회개입니다.어떤 의미에서 대강절은 전체가 주님이 오시는데 대한 참회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그래서 대강절을 겨울의 사순절이라고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반가운 손님이나 중요한 손님을 맞을 때 현재 집안의 생태로는 맞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손님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손님을 맞는 자신의 자세에도 걸맞지 않습니다. 손님이 오신다는 소식이 있으면 어지럽혀 있는 집안을 청소하고 새로운 단장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맞기 위한 회개를 청소와 새 단장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청소와 새 단장은 무질서했던 것을 질서있게 하고 더러워진 부분을 깨끗게 하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본몬에서 세례요한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알리고 거기에 합당한 준비를 하도록 선포하고 있습니다.세례요한이 요구하는 준비라는 것은 회개였습니다.

그런데 이 회개란 말을 우리 한국교인들이 들으면 금방 눈물, 콧물, 대성통곡, 찢어지는 가슴, 마루바닥을 구르는 것등과 같은 광경을 연상할 것입니다. 회개의 내용을 말하라면 흔히 자기가 지은 죄를 낱낱이 토해놓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교인들은 회개하면 실컷 울고 자기 죄를 다 털어놓으니까 속이 시원하다고 소위 카타르시스(Catharsis)와 같은 심리적인 해방을 연상하기도 합니다. 물론 회개란 그런 내용들과 현상들을 동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선포하는 회개는 상당히 이성적이고 목표지향적인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선 히브리어의 회개란 말인 슈브(Shub)란 뜻은 180%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180%를 돌아선다는 것은 바로 지금 현재 걷고 있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지금 현재 내가 취하고 있는 입장, 생각, 관점, 행동 일체에 대해 검토하고 그것이 잘못된 설정임을 깨닫고 180% 방향전환을 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180% 방향을 전환할 때 그 전환해야 할 방향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세례요한은 외칩니다.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말은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으니 그 방향으로 전환하라는 의미겠습니다.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흔히 천국 혹은 천당, 즉 죽은 후에 가는 좋은 세계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런 영생의 세계를 포함하겠지만 여기 단어를 그대로 이해하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란 뜻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 칼빈이 강조했던 사상중에 하나인 소위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사상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의 반대는 곧 사탄이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대조를 바로 창세기 서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3장에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다가 사탄의 꾀임에 빠져 사탄의 지배를 당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않도록 명령하셨는데 인간이 사탄의 말을 듣고 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사탄의 지배를 받는데서부터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로 돌아오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면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은 무엇인가 이것은 우선 세례요한이 회개를 촉구하는 대상과 그들의 죄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를 촉구하는 대상은 광범위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을 향해서 표호와 같은 일성(一聲)을 가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앞에서 언급한대로 세례요한이 지적하는 회개할 대상은 광범위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회개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하지 않을 때 그 때 마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닥아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예로 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신약성경에는 아주 악역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에게도 신랄한 비판을 받은 대상이므로 어쩌면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와 창녀에게는 연민의 마음을 가지시면서도 이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인들을 만나기만 하면 조금의 여유도 두시지 않고 비판한 것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 가장 합당치 않은 인간상의 대표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비록 세례요한과 예수님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상당히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정치지도자였고 종교지도자였고 그 시대에 모든 사람앞에서 백성을 지도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에게는 그토록 잘 못 보였겠습니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진 잘못은 위선과 교만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바래새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했고 위선자라고 질타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교만을 그렇게도 역겹게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이 9절에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항상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네 하고 뻐기고 교만하게 행동해 왔다는 사실을 세례요한이 잘 알기 때문에 이들의 이런 교만에 대해 질타를 한 것입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바래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시범케이스로 걸린 것이고 그들의 회개할 사항도 아주 시범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중적인 마음, 위선적인 자세가 실제 죄를 짓고 나, 죄지었다.고 고백하는 순박함보다는 더 역겨운 일을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한 것은 그들이 적으로 두 존재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속으로는 실제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한 것은 겉과 속이 같으라는 요구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마져도 이런 질타를 받는다면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숭배를 하고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하는 일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앞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개인적인 문제다. 이것은 집을 나간 탕자를 향해 돌아오라는 애절함도 있을 것이고 손님을 모실 때 무질서했던 집안을 질서있게 정돈하듯이 그동안의 우리의 마음이 헝클어져 있었다면 정결케 하고 질서있게 정돈하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져 있는지, 우리의 마음이 왜곡되어 있는지, 혹시 우리의 마음이 바리새인들처럼, 사두개인들처럼 겉으로는 의로우면서도 속으로는 자기 교만에 차있는지, 이런 부분들을 세밀하게 살피고 정리하는 그런 계기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삶
불의를 행하는 삶
소외된 자를 외면하는 삶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를 신뢰하는 삶

우리가 돌아서야 할 방향이 하나님의 나라일 것 같으면 현재 잘못된 방향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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