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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팔복 (마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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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언(5:1-2) 5:1-20은 산상설교 전체의 요약이고 (Introduction)에 해당한 다. 그 이하의 내용은 5:1-20의 내용을 구체화 시키고 세분화 시킨 것 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5:1-20의 내용은 서언(5:1-2) 그리스도인의 특성(5:3-12) 그리스도인의 사명(5:13-16) 주제의 제시(5:20)로 나눌 수 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모세가 십계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때는 광풍과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셨으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얼굴을 마주 보고 앉으셔서 말씀하고 계신다.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고 가르치는 사이에 침묵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5:3-12은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표시하고 있다. 5:3-6은 자 신을 위한 특성이고, 5:7-12은 타인과 관계되는 특성이다. 5:3-12을 칠복, 팔복, 구복등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아니다.

 2. 그리스도인의 특성(5:3-12)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러나 그 복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자는 적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천 년 전에 복의 개념을 정확하게 알려 주셨 고 본을 보여 주셨는데도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도 크 게 예외는 아니어서 세상적인 복을 추구한다.

1) 오복 (오복) 우리 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오복을 복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즉 수, 부, 강녕, 유호덕, 고종명이다. 수는 오래 사는 것이다. 부는 재 물이 많음이고, 강녕은 평안하고 건강하고 화목함을 말한다. 유호덕은 덕을 가까이 하고 좋아함을, 고종명은 삶의 마지막을 고통 없이 마치 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이빨을 오복 중의 하나라고 하는 것은 이가 튼튼하여야 음식을 잘 먹을 수 있고 그래야 오래 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복중에도 윤리적인 면이 있음을 우리는 유호덕에서 볼 수 있다. 덕이 없는 부나 수는 때로 오히려 저주나 화 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 다섯 가지 복을 받고 누리 기를 원하신다.

 2) 구약성서의 복 구약성서에 나오는 복의 뜻을 정리하여 보자. 우선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자에게 복을 내리신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 자체가 복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계약의 백성이었다. 출19:5-6에 너희가 내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 가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고 말씀하셨다. 신명 기 28장에는 이 말씀이 더욱 자세하고 극명하게 나타난다. 말씀의 순 종 여하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그들에게 임할 것을 하나님은 모세의 입을 통하여 선포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땅의 생산물 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 라(신28:2-6)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며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 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 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 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 라.......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신28:15-22중)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가 그 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밤낮 으로 묵상하는 자라고 시편 일 편은 노래하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 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이렇게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 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그 행사가 다 형통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나무의 뿌리와 가지라면 행사의 형통은 그 열매이다. 때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고 실천함으로 고난 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또 악인이 일시적으로 번창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종래에는 의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된다고 시편 일 편은 노래하고 있다.

 3) 신약성서의 복 (팔 복) 신약성서의 복은 팔복으로 대표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복 의 차원을 뛰어 넘는 놀라운 차원의 복이 팔복이다. 전통적인 오복에 예수님의 삶을 비추어 보면 예수님은 복이 없는 자이다. 오래 살지 못 하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부자가 아니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 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었다. 평안한 죽음 이 아닌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누 가 복 없는 자라고 하겠는가 팔복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연결되어 있다. 마치 하나의 사물을 여덟 장소의 각기 다른 방향에서 본 것과 같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경치가 달라 보이는 팔각정과 같다. 또한 여덟 개의 면을 가지 고 있는 한 개의 다이아몬드와도 같다.(A.M. Hunter) 팔복은 예수님께 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깊은 관계가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 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 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 심이라.(눅4:18-19)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팔복은 산상설교 전체의 축약이고 에 해당 한다고 보아도 지 나친 말이 아니다. 팔복 중에서 첫째인 심령이 가난한자...... 이는 또 팔복의 이고 축약으로 볼 수 있다. 눅6:20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고 그냥 가난한 자로 되어있다. 누가 복음에는 너희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다로 되어 있어 그 대상이 이 인칭 복수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그 대상이 삼인칭 복수로 되어 있다. 당시 예수님의 말 씀을 듣는 사람들은 이미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었음을 볼 때 마태와 누가의 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본다. 가난 자체는 천국 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나 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가난에도 유익과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난은 궁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가난이 아닌 다음에는 모든 가난은 죄의 소산이다. 가난한 사람 자신의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은 그 자신의 죄 의 소산이고 의와 선을 추구하다가 당하는 경우의 가난은 그에게 그런 이유로 가난을 강요하는 그 공동체와 체제의 죄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가난은 죄의 소산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풍요롭게 살기 를 원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의지하는 자를 말한다. 자신감과 자기 의에 넘치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 니다. 자기가 세운 생활 철학과 윤리에 만족해 하며, 자랑하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자가 아니다. 자신의 경력이나, 재산이나, 학식이나. 미 모를 자랑하며, 뽐내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남을 비웃고 무 시하는 자들의 성품은 심령이 가난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심령의 가 난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느끼는 무력감과 무한한 의뢰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고기를 잡았을 때 초라한 자 신을 보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 백하고 있다. 그러던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 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 지 않겠나이다. 라고 큰 소리 쳤을 때는 오히려 주를 세 번씩이나 부 인하고 말았다. 닭이 울었고 그는 통곡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가 말리엘 문하생이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나면서 부터 가진 자였다. 자기 의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참여하였고 예수 믿 는 자를 잡으려고 백 리나 되는 길도 달려가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바울이 되었다.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이다. 그 는 가난한 심령의 사람이 되었다.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 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의 모든 기득권을 분토, 즉 똥가루처럼 버렸 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했던 사도 바울은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였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 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감옥 속에서도 잔잔한 기쁨을 맛보는 자였 다.(고후6:8-10) 하나님 앞에 서면 자기 죄가 너무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의 죄가 보 이지 않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감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세리의 기도가 자신의 의를 나열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낫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천 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 원하신다. 우리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우리가 천국을 맛 보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빈 그릇의 소유자이고 그 그릇을 늘 하나님을 향하여 열어 놓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 그릇 에 천국을 채우신다. 질그릇이라도 좋다. 깨끗하고 하나님을 향해 비 워져 있고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으면 된다. 그 그릇이 비어 있지 않 고 나의 욕심, 나의 명예, 나의 의로움으로 차 있으면 하나님은 그 그릇에 천국을 채워주시지 않고 기다리신다. 가끔씩은 그 그릇을 흔들 어 깨닫게 하시기도 하시지만 강제로 그릇을 깨뜨리거나 쏟아 붓는 일 은 거의 없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우는 자이다. 슬퍼하는 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 은 이별이나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인한 슬픔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서 심령의 가난을 고백하는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이다. 눅 18장에 세리 가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고 있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 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애통은 나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나의 죄 때 문에 주께서 고난당하심을 고통스럽게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 과 애통에 떠는 것이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찬송 136장은 애통하는 감정이라기 보다는 고통스러운 참회이다.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하는 나 자신에 대 한 고통이다. 애통이다. 그 것은 차라리 절규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 져 내리요 (롬7:24) 그러나 이렇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런 애통은 하나님이 아 니고는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 속의 은혜로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 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 이다.(시57:17) 돈이 많은 부자 중에도 애통하는 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중에도 자 기의 의와 교만이 있어서 애통하지 않는 자도 있다. 애통은 언제 오는 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온다. 찬란한 태양빛 아래서는 허물이 잘 드러 나듯 그리스도께 나아갈수록 자신의 죄와 허물이 커 보인다. 그래서 애통할 수 밖에 없다. 날마다 그리스도께 나아감으로 영적인 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 땅의 위로는 받 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생각하다가 울어버린 경험이 있다. 버릇 없는 자식을 둔 아버지 하나님이 불쌍해서 나는 울었다. 병신의 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불쌍해서 나는 또 울었다.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 도이면 그 몸은 당연히 교회이다. 그런데 머리와 몸이 따로 놀면 그 가 바로 병신이다.

어리석은 인간을 내려다 보시며 흘리시는 하나님의 눈물에 내 눈물 이 씻겨 나갔다. 인간을 애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 넘게도 하나님 을 애통해 하다니...... 이렇게 애통하는 자도 복이 있을까 아서라 그런 애통 자체가 이미 복인 것을. 하나님을 애통해 하는 자는 화가 있으리니 저희가 더욱 애통할 것이라고 해도 그 화가 무서워 애통하지 않으랴 하늘이 꺼져라 통곡해도 모자랄 통곡을 하고 싶다.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 요.

 온유는 겸손과 관용이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다.

(마11:29) 온유는 과격하고, 성미가 급하고, 불끈 불끈 화를 내고, 큰 소리치고, 거만하고 위압적인 태도와 반대되는 성품이다. 온유는 귀 기울여 상대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자기의 주장만 소리 높혀 외치는 것은 온유가 아니다. 온유는 그렇다고 타협이나 나약은 아니다. 온유 는 차라리 조용히 흐르는 눈물이다. 성경에 모세를 온유하다고 한 것 은 하나님 앞에서 모세가 겸손하고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 가 그렇게 온유하기까지 는 80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나보다 강 한 권세나 많은 돈 앞에서 비굴에 지기 쉽다. 또 불의한 권세와 더러 운 돈 앞에서 좌절하거나 과격해지기 쉽다. 또 우리는 나보다 약한 자 에게 교만하거나 냉담하기 쉽다. 또 나보다 약한 자를 무시하기도 쉽 다. 온유는 이 모두가 아니다. 온유는 고자세도 저자세도 아닌 정자세 이다. 불의를 겸손히 지적할 수 있고 약한 자를 관용으로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과 겸손은 때로 인간 앞에 서의 교만과 항거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과 는 타협하지 않으시고 독사의 자식들아, 화있을진저를 연발하셨다. 유 대인들은 온유한 메시야를 원하지 않았다. 힘과 전쟁으로 다윗의 땅을 되찾아 줄 강력하고 무장된 메시야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땅을 기업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곧 온유한 사람이고 해석해서 는 안 된다. 세상은 무기로 땅을 지키고 무기로 땅을 차지하고 있다.

온유가 아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시민은, 하늘나라는 무기와 힘으 로 땅을 얻거나 빼앗는 것이 아니고 온유한 자가 땅을 받게 되어 있다 는 복음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힘과 무기로 땅을 차지하는 것 이, 또 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 복음적이고 반 복음적 인 것을 인류는 모르고 있거나 알면서도 하나님을 속이고 있다. 얼마 나 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나서야 인류는 폭력으로 땅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행동으로 깨달을까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해 하는 자는 온유하고 겸손할 수 밖에 없 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온유의 본을 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 데 거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온유를 배운다. 그리고 그 온유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 우리는 온유의 승리를 믿는 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 부를 것임이 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기의 의가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 에 내세울만한 자기의 의가 없는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사람 의 노력과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의를 말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반대는 의에 배 부르고 그래서 의를 토하는 자이다. 돈이 많으면 자기가 의인인줄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가난하면 자신이 의인인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권력이 강하면 자기가 의인인양 착각하는 경우 가 있다. 청렴하거나 구제를 많이 하면, 성경지식이 많으면, 주일 출 석을 잘 하고 헌금을 잘 내면 의인인줄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수준급이지. 나 만큼만 모두가 믿으면 좋을텐데. 이런 사람은 자기의 의에 배부른 사람이다.

자기의 의에 배부른 사람은 그 의를 소화하지 못하고 토하는 수가 많 다. 자기가 의롭다는 착각에서 더 나아가 그 잘못된 의로 이웃을 판 단하고 손가락질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의에 배부른 사람 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 의가 좀 대단하고 커 보일지도 모르나 하나 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오직 예 수님의 대속을 믿는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한 후에도 우리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수 밖에 없다.

의는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과 동거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사업이나 출장으로 몇 년 동안 떨어져 있다면 그들은 같이 있기를 얼마나 주리고 목말라 하겠는가 이와 같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의를 사모 하는 자는 복이 있다. 무엇이 내게 이익이 되느냐에 따라 행동하기 보 다는 무엇이 의로운가를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많은 공동체는 복이 있 는 공동체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내 속에 의가 거하지 않음을 깨닫는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에서 시작된다. 내게는 의가 없사오니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의에 주리 고 목마른 자에게 하나님은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배부르게 하여 주신 다. 우리들의 헛된 욕망과 바람들이 주님의 은혜로 태양에 안개 걷히 듯 걷히우고 오직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찬양하며 기뻐할 날이 우리 에게 올 것을 나는 믿는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채워질 것을 나는 믿는다.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닌 주님을 믿는 믿음의 은혜로 채워 질 것을 나는 믿는다.

 (5)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자, 애통하는 자, 마음이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가 자신을 위한 그리스도인이 특성이라면 팔복의 나머지 부분 은 타인을 위한 특성이다. 긍휼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여 잔치를 베푸는 용서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분노를 일삼는 이 방신과는 다른 분이다. 긍휼은 자기의 재산을 창녀와 함께 먹어 버린 후에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베푸 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긍휼은 광포와 강퍅이 아니다. 긍휼은 자비와 용서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용서하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맥없는 것은 아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이웃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비굴하게 구는 것이 아니다. 긍휼은 온유이다. 긍휼은 너 그렇게 해 봐라. 그러다가 큰 코 다칠 것이다라 는 저주의 마음이 아니다. 언제 한번 걸리기만 해봐라. 그냥 두지 않 는다는 벼르는 마음이 아니다. 긍휼은 복수의 마음이 아니다.

자신의 의가 없는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애통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다. 이런 사람은 타 인을 긍휼히 여길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 위해 남을 긍 휼히 여기라는 해석은 적합하지 않다.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길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 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지 우리가 남을 긍휼 이 여기고 선한 행동을 하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기특하게 여기시 고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은 아니다. 너희가 남에게 긍휼을 입기 위하 여 너희도 남을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남에게 긍휼 을 베풀 수 있으며 긍휼을 받은 그들도 너희를 긍휼히 여길 것이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 하였을 때 용서함을 받는다. 나는 죽을 수 밖 에 없는 죄인이었으나 주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한 사람이 이웃의 작은 잘못과 허물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 자연스럽다. 만약 우리가 주님으로 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고도 타인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그 것의 육십만 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 일백 데나리온의 돈을 자기에게 빚진 사람을 옥에 가둔 것과 같이 파렴치하고 어리석은 사람 이 될 것이다. 또 종래에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그 주인의 분노 앞에서 난처한 입장이 된 사람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난처하게 될 지도 모른다.(마 18:23이하) 우리가 주께 받은 은혜가 얼마인가 죄 용서를 받은 것이 얼마인 가 긍휼을 입은 것이 얼마인가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대로 베푸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이미 세상 의 빛이고 소금이다. 산 위의 동네가 우리를 숨기우지 못할 것이다.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 요. (5:8)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라는 말이 있다.

옳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옳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수신을 해도, 가죽이 벗겨져 피가 나오도록 닦아도 죄인이다. 마음이 아무리 청결하여도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 이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셔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만물 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렘17:9) 그 마음 속에는 불의, 탐욕, 시기, 악독, 음란, 포악이 꽉 차있다. 이것을 씻 을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다.

5:8은 다음과 같이 다시 해석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마음이 깨끗하여 복이 있나니 저희에게는 하나 님이 자신을 보여 주실 터이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자신을 보여주신다. 권력이나 많은 돈이나 명성을 갖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깨끗한 마음을 더럽힌 대가로 얻 어진 것이라면 천금을 주고 쓰레기를 산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 가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 에서 남이라고 잠언은 기록하고 있다.(잠4:23)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노력으로 어느 정도는 깨끗하게 할 수 있고 예 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온전히 깨끗해진다.

청결한 마음은 두 가지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을 말한다. 세상과 하 나님을 겸하지 않은 마음을 말한다. 도덕적인 완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순종하는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 을 일컫는다.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째 원죄가 있 다. 아담 이후로 계속하여 내려오는 원죄이다. 이 죄는 예수 그리스도 를 믿음으로 깨끗해진다. 둘째 스스로 짓는 죄가 있다. 불의, 비양심, 냉혹, 시기, 비방, 도적질, 투기, 살인, 증오등의 것들이다. 이러한 죄는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입술과 혀로 회개한다고, 눈물 몇 방 울을 흘리고 흐느껴 운다고 그 죄값이 다 없어 지는 것은 아니다. 죄 는 회개로 용서를 받지마는 죄값은 치루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가 가 지고 있는 선과 의가 우리를 오히려 더럽히기도 한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선과 의는 하나님 앞에서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누 더기 같은 의와 선으로 형제를 판단하고 비방한다. 이런 마음은 가난 한 마음도, 애통하는 마음도, 온유한 마음도, 긍휼이 여기는 마음도 아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니라 의에 배 불러서 그 의를 토 하는 자이다. 이러한 누더기 같은 의와 선이 우리의 마음을 더럽힐 때 가 의외로 많다. 사도 바울은 얼마나 마음이 청결한 분인가 그 크고 위대한 일을 하신 후에도 그 분은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셨다.

자기 죄에 가려서 타인의 죄를 볼 수 없는 자는 복이 있다. 남에게 없 는 의와 선과 경건이 내게 있을 때는 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 음. 그러한 것들이 없는 이웃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은 깨끗한 마음이 다. 부자를 볼 때 말세에 재물을 모았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기만큼 어렵겠다. 참 안됐기도 하지만 고 소하다. 라는 마음은 깨끗한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 물을 맡겨 주신 것은 다 이유가 있겠지. 그 재물이 복 받아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씌어질 날이 올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기도하 는 마음은 깨끗한 마음이다.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을 위해 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거야. 저 사람도 언젠가는 믿음과 성령님의 감동으로 좋은 사람이 될 거야. 라고 믿고 소망 가운데 기 도하는 사람의 마음은 좋은 마음 깨끗한 마음이다.

참 큰 일이야. 저런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니. 한심하다니까. 라 는 마음 가짐은 그 말이 비록 사실일지라도 자기 마음이 먼저 얼룩진 다.

사탄을 종종 우리에게 작은 의와 선을 주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그것을 무기로 삼아 이웃을 판단하고 비방케하고 또 전쟁하고 싸우게 하여 더 큰 죄를 짓게 하여 우리의 마음을 더럽혀서 우리가 하나님을 뵙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사탄의 계략과 싸워 이기라. 주님께서 힘을 주시리라.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 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이다. 하나님 앞에서 심 령의 가난을 고백하고, 그로 인하여 애통해 하고, 온유한 마음이 되어 주님께 의지하지 않고는 결코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없다.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를 누리는 자가 아니고 평화를 위해 싸우는 자이다. 비 록 무기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진실로 화평케 하는 자는 항상 싸우는 자이다. 모두가 화평한 곳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가 필요 없다. 세상이 화평하기를 열망하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다.(롬10:15) 화평케 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그 리고 하나님 안에서 화평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탱크와 대포 핵폭탄으로 공포의 균형을 이루어 평화를 유지 하려고 한다. 그 러나 주님께서 이루시는 평화는 무기나 폭력으로 세워지거나, 그것들 로 무너뜨릴 수 있는 시시한 평화가 아니다. 화평케 하는 일이 모두의 환영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진정으로 화평케 하는 자는 오히려 박해 를 받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은 그 다음에 나오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와 매우 가깝다.

우리는 어떻게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는가 또 어떻게 화평을 위해 싸울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그 분의 십자가와 부 활 속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자연이 몸살을 앓고 있다. 더러워졌다. 인간들이 버린 찌꺼기가 자 연을 신음하게 하고 있다. 오존층이 파괴되어 기후가 이상해지고 물 이 더러워져서 마시기가 힘들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는 자연과 사람의 불화도 화평케 해야 할 좋은 일들이 주어졌다. 하 나님은 우리가 자연과 화평하게 지내기를 원하신다. 자연을 사랑하기 를 원하신다. 창1:28의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땅을 예배하거나 섬기 지 말라는 것이지 마구 부수고 더럽히라는 말씀은 결코 아니다. 참되 고 영원한 정복은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 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 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의를 행할 때 즐거움과 기쁨이 우리에게 있으며 존경과 격려가 있기를 원하신다. 어떤 사람이 의를 위하여 일하다가 핍박을 받았다.

그는 복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 핍박을 준 개인이나 공동체는 얼마나 복이 없는가 의를 위하여 일하다가 핍박을 받는 그는 얼마나 억울한 가 아마도 그래서 팔복 중에서도 마지막으로 이 복이 나왔는지도 모 르겠다.

의는 불의를 싫어한다. 불의에 항거한다.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 는 의인이 핍박을 받는 경우란 거의 없다. 선한 사람에게도 핍박은 없 는 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핍박을 받을 것이다.(딤후3:12) 의인이 박해를 받는 이유는 의인의 삶 과 말이 박해하는 자들의 삶과 말을 결과적으로 정죄하고 그들의 이익 을 위협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 의로운 사람은 존경과 칭찬도 받 는다. 그러나 그 의가 핍박하는 사람의 이익과 부딪히며 그 의를 부르 짖는 사람이 자기보다 폭력이 약하거나 없을 때 그들은 의인을 핍박한 다. 의인의 의가 자기들의 이익을 보장하고 편들어 줄 때는 핍박할 이 유가 없다. 또 자기들의 이익과 관계가 없을 때에도 의인을 박해할 아 무 이유가 없다. 의인의 부르짖음이 자기의 이익을 위협하여도 그 의인이 자기보다 더 큰 힘을, 더 큰 폭력을 가지고 있을 때는 감히 핍 박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의인이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하여 힘으로 무장 하는 것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의인을 핍박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 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도 많이 있다. 무엇이 의로운가를 알기는 알지만 그것을 실천할 용기와 믿음이 없으며 의로움 보다는 이 로움을 더 사랑하기에 의인을 핍박하는 경우가 있다. 또 자기의 눈이 멀어서 의에 배부르고 교만해서 자기가 아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최종 적이라는 교만에 빠져서 의인을 악인이나 죄인으로 잘못 알고 핍박하 는 경우도 있다.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던 사람은 이 방인인 로마의 권력자 빌라도였고 모든 것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 가에 못박아 죽인데 공헌한 사람들은 당시의 경건하다고 하는 바리새 인이요, 사두개인이요, 제사장이었다. 사도 바울도 한 때는 그리스도 인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다.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시위병은 무지로 인하여 의를 핍박한 결과를 가져 왔을까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알았 지만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명령에 충실했을까 벧엘에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 아마샤로부터 추방령을 받은 아모스, 예루살렘 거리를 알몸으로 달리며 조국의 멸망을 외쳤던 예레미야, 그 의 삶은 끝까지 고난과 역경으로 채워졌다. 사자굴 속의 다니엘, 순교 자 스데반 집사, 누가 이들을 복 없는 자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누가 이들을 복 있는 시대에 살았다고 하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의를 위 하여 핍박을 받는 세상에서 복 있는 자가 되기 보다는 의가 핍박받지 않는 좋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그런 좋은 세상 을 위해서는 과감히 핍박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의를 위하여도 핍박이 없는 좋은 세상을 하나님 혼자서 다 만 드시고 그 곳에서 우리를 살게 하시기 보다는 그런 좋은 세상을 만드 는데 우리를 동참하게 하신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또 그런 우리에게 힘과 용기와 부활을 주신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아 선과 의를 행하다가 락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 하나 님께서 선과 의를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자와 함께하시고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 둘의 팽팽한 긴장 가운데서 우리는 다만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엎드릴 뿐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에도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다만 애통할 뿐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박해하는 자들을 저주하 거나 그들에 대한 우월감으로 기뻐할 일이 결코 아니다. 오직 하나님 을 위하여 기뻐하고 천국을 인하여 기뻐할 일이다. 오히려 핍박하는 그들을 위하여 애통할 일이다. 그들을 향하여 온유한 마음을 가질 일 이다. 그들을 긍휼이 여기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일이다. 이런 사람 이 바로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 다. 또 율법과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온전히 이룬 사람이다. 이러한 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는 의이다. 할렐루야! 아멘! 부활과 승리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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