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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 백성의 본성 (마 0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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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에서 듣는 사람

사람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떠나서 사탄의 가르침을 받고 선악과를 먹은 결과 사탄 왕국의 복음이 복음이 온 인류에게 선포 되었으며 그 복음은 모든 사람을 병들게 하였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풀어 가르쳤고 그의 왕국의 복음을 전파했으며 모든 병든 것을 고치셨다. 이로 인하여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좇았다.
이 허다한 무리는 사탄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혼란 되었으며 그의 왕국에 의하여 억압 받았고 그 결과 병과 귀신들에 침해 당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 같았고 뱀처럼 기어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먹을만한 양식을 먹지 못해 굶주렸고 노략질하는 이리들에게 쫓기고 먹히는 사람들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계명은 날로 가중되었고 율법의 멍에는 무거워 갔다. 여호와의 날에 대한 소망은 무산 되었고 보상이 없는 종교적 요구는 날로 증가되었다. 규례들과 전통과 율법의 의식은 날이 갈수록 강화 되었지만 삶의 근본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세상을 상징하는 바닷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낮은 곳에 살고 있었다. 낮은 곳에서는 낮은 곳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법이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산으로 이끌었다. 산은 높은 곳이다. 낮은 곳에는 낮은 곳의 문제가 있다. 늪지에는 늪지의 문제가 있고 바다에는 바다의 문제가 있다. 이 사람들은 산으로 이끌려야 한다. 규례와 전통과 유전과 율법의 의식들은 낮은 곳에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있겠는가. 종교적인 습관과 관행들로써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바닷가에서는 어부들의 삶은 항상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그물을 던지고 요행을 기다리는 삶이다. 바다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는가. 그곳은 귀신의 거처로 묘사된 깊음의 곳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늪에서, 혹은 깊은 바다에서 요행을 기대하고 알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 헤맨다. 어떤 사람들은 절을 찾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예배당을 찾아간다. 그리고 어떤 정성을 드리면서 물 위에 그물을 던지고 있다. 정성을 많이 드리면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기도를 하고 불공을 드린다. 또 어떤 사람들은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똥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꾸짖으면서 정의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을 실천한다고 떠든다. 이래서 세상은 파도 처럼 안정이 없고 폭풍처럼 시끄럽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수호한다고 눈을 부라리고 있다. 교리를 성경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성경을 예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무엇엔가 열심이고 분주하다. 그러나 어는 누구에게도 천국은 없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에게 천국이 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보았고 다녀 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꿈을 꾸었고 환상을 본 것이지 천국을 본 것이 아니다. 꿈이나 환상이 아닌 실제의 천국을 본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는 실재의 천국이 필요하다.
이 사람들이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이다(마4:25).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간 것이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道로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니라.(사2:2-3)고 한대로 예수께서는 여호와의 산으로 무리를 이끈 것이다.
예수는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산 위에서 가르치셨다.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바다에서 하늘로 이끄시는 것이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 오라. 귀신이 사는 바다에서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로 올라 오라. 생각으로 만들어낸 종교적 모든 의식과 관행들에서 나와 생명의 사귐 안으로 들어 오라.
소유가 많으면 만족할 줄로 여기지 말라. 지성을 드리면 들으실 줄로 생각지 말라. 큰 소리로 부르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 생각지 말라. 전부터 행해 오던 것이니 참된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생각은 영과 실재가 아니다. 생각은 두뇌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바다 속에서 기도하지 말고 산 위로 올라오라. 진흙탕에서 예배를 드리지 말고 여호와의 산으로 와서 그의 말씀을 들으라. 주님은 산에 올라 앉으셨다.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구하지 말자.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을 따르지 말자. 배로 기어다니는 뱀을 따르지 말자. 예수님은 산 위에서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 속에 있는 것을 내어 주려고 입을 열었다. 우리가 비록 바다에서 부름 받았을지라도 산으로 올라 가야 한다. 바다에서는 산에서 선포된 말씀을 들을 수 없다.
바다에서 바다의 말이 있고 산에는 산의 말이 있다. 예수를 믿고 겨우 천당에나 갈 줄로 알아서는 안된다. 그가 산에 앉으면 우리도 산에 앉고 그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면 우리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을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우리를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하여 부르신 분이다.

천국 백성의 본성
(2) 영이 가난한 사람

생명은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영원히 가난하도록 창조되었다. 이 가난은 생명을 필요로 하고 생명은 다시 가난해져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다. 생명은 그 자체가 가난하기 때문에 음식생명을 필요로 한다. 먹은 음식이 소화가 되어 생명을 키우게 되고 그 키워진 생명은 다시 가난해져서 그 가난함이 다시 생명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반 컵의 우유를 필요로 하던 아이는 그 반컵을 먹음으로써 생명이 자라 나서 한 컵의 우유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한 컵의 우유를 먹은 아이는 또 그만큼 자라나 두 컵의 우유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문제는 영원한 세계까지 연결된다(계22:2,17).
영이 가난한 사람은 생명나무가 필요한 사람이다. 원래 사람은 생명나무가 필요하도록 창조되었다. 흙에는 호흡이 필요하고 아담에게는 생명나무가 필요하다. 아담은 얼마나 가난하게 창조 되었는가! 아담은 참으로 가난한 존재다. 호흡이 필요한 존재를 보라. 한 번의 호흡으로써 영원히 채워질 수 있는 아담이 있는가! 호흡도 영원히 공급되어야 한다. 생명나무를 필요로 하는 아담을 보라. 한 번 생명을 먹은 것으로써 영원히 충족 되어지는가 생명은 영원한 공급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영이 가난한 사람은 호흡으로서의 하나님이 필요하고 생명으로서의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이다. 누구도 한 번 태어났기 때문에 더 이상 먹고 마심이 필요치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완전하게 태어났지만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지어진 참으로 가난한 존재다. 뱃속이 늘 비어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배는 이미 채워져 있는 배다. 그는 더이상 먹을 필요가 없게 되었고 더 이상 가난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생명은 먹을수록 자라기 때문에 더 생명을 필요로 한지만 선악을 아는 지식은 먹어도 자라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이다. 해야할 일만 남게 되는 것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생명을 자라게 하지 않고 생명을 굳어지게 하고 죽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체질에 녹지 않으며 소화되지 않는다. 음식은 먹은 대로 소화되기 때문에 배는 늘 비게 마련이다. 그러나 돌가루를 먹는 다면 그것은 차곡차곡 쌓여서 결국은 더 이상 먹을 필요가 없는 배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사람은 영이 부유해서 더이상 호흡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고 생명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모든 사람은 부유해 있었다. 나라는 식민지가 되었고 육신은 배고팠지만 그들의 영은 너무 부유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께 버렸던 것은 국가의 회복과 육신의 만족뿐이었다. 그 영들은 오히려 세상을 비웃고 로마를 경멸할 정도로 부유했던 것이다. 가난한 영을 회복하러 왔던 예수는 그들에게 도무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있었고 애굽에서 해방시킨 모세의 율법이 있었으며 선지자들의 유산과 기적의 경험이 있었으며 경건한 사람들의 유전과 종교적 의식과 전통이 있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고 생활고는 심했지만 그들의 종교생활로 인한 영은 부유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된 것이다.
아담은 그의 빈 영 안에 선악을 아는 지식을 채웠고 천사의 어떠함을 흠모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이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천사를 흠모하는 영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을 상대로 한 종교심과 거기서 나온 모든 것들은 사실은 천사를 상대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천사와 사탄 즉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참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롬3:11,12). 그것은 예수를 거부했고 그를 버렸던 사실로 입증되었다. 성전에는 많은 사람이 모였고 거룩한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으며 회당에는 성경을 강론하고 배우고 있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일생을 드리고 있었으며 모든 거룩한 종교적 관행들이 완벽하게 실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만나고 있었던 십자가 근처에는 그를 찾고 따르며 경배하고 섬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소화되지 못할 것들로 배가 차 있었다.
오늘날도 사정은 동일하다. 이방인들은 선과 악 사이에서 방황하고 종교인들은 선한 천사영와 악한 천사영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사람들의 촛점은 빗나가 있었다. 이방인은 선을 구하고 종교인은 천사영을 구한다.
영이 가난한 사람은 호흡이 필요한 흙이며, 생명이 필요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필요한 고아이며, 남편이 필요한 과부일뿐, 선해지려는 사람이 아니며 천사와 같이 되려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될 수가 없는 사람이다. 세상은 선의 경쟁장이고 종교는 천사영의 경쟁장이다.서로 선해지려고 하며 서로 천사영와 같이 되려고 한다. 누가 더 선하며 누가 더 천사영와 같은가 이것이 세상과 종교의 촛점이다. 영이 가난한 사람은 무엇을 더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없는 사람이다. 호흡이 없는 흙인 사람이다.
사마리아 여자는 자기를 알 사람을 찾았고 간음 중에 잡힌 여자는 자기를 살려줄 자를 찾았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옥합을 받을 자를 찾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구성할 천국성분을 가진 사람들이다. 영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주성분이다.
천국 백성의 본성

(3) 애통하는 사람

병은 무엇을 채우려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속이 비어 있다. 무엇을 위하여 비어있는 것이 가난한 것이다. 영이 가난하다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다. 사람이 가난하게 창조 되지 않았다면 가난해질 방법이 없다. 사실은 가난한 자인데 속아서 부유해진 것이다.
숨이 없는 흙은 가난한 것이다. 비록 숨이 흙에 들어 왔다 하더라도 숨이 흙 자체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흙은 여전히 가난한 것이다. 씨가 없는 밭은 가난하다. 씨가 떨어지면 부유해지지만 밭의 본질은 여전히 가난한 것이다. 하나님은 흙을 가난하게 만들어졌고 밭을 가난하게 조성하셨다. 그 이유는 이 가난을 통하여 영원한 부를 생산하기 위해서이다. 흙이 부유하고 밭이 풍부하다면 하늘의 영원한 부를 생산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가난하도록 창조 되었다. 그 가난이 참 가난일 때 하늘의 부가 생산된다. 흙은 가난을 싫어하고 밭은 가난을 싫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가난하게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유해질 수 없다. 부해질 수 있다는 모든 방법은 모두 속임수이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여전히 가난한 것이다. 병이 아무리 많은 물을 담고 있어도 병 자신은 가난하고 조금도 자기 자신의 본질에 변경이 없는 것이다. 밭에서 아무리 많은 곡식이 열린다 해도 밭 자체는 여전히 가난하다. 당신이 어떤 것이라도 스스로를 부유케 하려고 소유해 보라. 그렇다고 당신 자신이 부유해지는가, 당신 자신에게는 아무 변경이 없는 것이다. 지식이나 재물이나 명예나 그 어떤 것들도 사람을 부유케 할 수 없다. 가난은 인생의 본질이다. 이것은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애통하는 사람이란 자신이 가난함을 아는 사람이다. 가난하지만 가난을 모르는 사람은 애통해하지 않는다. 가난을 아는 사람이 애통해 한다. 사람은 무엇을 잃었을 때, 자식을 잃었을 때, 명예를 잃었을 때..... 그러나 그 사람은 원래 가난했던 것이며 아무런 본질적 변화는 없는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가난한 자기 자신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잃어 버리고 애통해 하는 사람은 참 가난을 모르는 사람이다. 잃은 것이 없어도 가난함을 아는 사람이 참 애통하는 사람이며, 그 사람이 참 위로를 받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가난하게 지으신 것은 엄청난 위로를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 위로는 가난하지만 하늘의 부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부유하려고 하면 가난해지고 가난한 것을 애통해하면 부유해지는 것이다. 영원한 가난은 영원한 부를 생산한다. 가난한 만큼 더 부를 생산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유하게 지어 놓았더라면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할 것이다. 천사는 부유하게 지어졌다(겔28:1-19). 그러기 때문에 그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단지 기계적인 능력을 가졌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난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그의 생산력은 아브라함 이후 예수까지 그리고 예수 이후 우리까지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그 질은 날로 더 높아지고 있다.
나는 예전에 비해서 더 많은 것을 생산하며 더 좋은 것을 생산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가난함을 애통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완전하고도 참 좋은 위로를 주시려고 나를 가난하게 지으신 것이다. 나는 예전에 나의 가난을 탈피하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결굴 속임을 당할 뿐이었다. 그 때는 모든 것이 유혹이었으며 유혹자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생산한 것은 모두 가짜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참 가난을 알고 난 후에는 나는 더 이상 부유해 질 수도 없고 더 이하로 가난해 질 수도 없었다. 나는 거저 가난한 존재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소유한 어떤 것도 나를 부유하게 할 수 없었고 내가 잃어버린 어떤 것도 나를 가난하게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가난한 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 가난은 참 위로를 이끌어 왔다. 하나님은 자기의 위로를 이끌어 낼 가난을 나에게 두신 것이다. 하나님은 나무의 본질을 가난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나무는 척박한 땅에서도 수분과 영양분을 끌어 들인다. 그는 스스로 그런 의지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 체질이 의지가 되어 쉴 새 없이 수분과 영양분을 이끌어 낸다. 하나님은 자신의 깊은 위로를 이끌어 내게 하기 위하여 사람을 가난하게 창조하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지혜인지!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로는 부유한 자가 가져갈 수 없다. 그 위로가 부유한 자에게 주어진다면 부한 자는 그 위로를 멸시하고 짓밟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 외에는 그의 위로를 가져갈 수 없다. 룻이 부유한 땅을 차지한 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창13:14-18). 그는 많은 자녀를 생산할 것이며 그 자녀들이 그 땅에서 번성할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가난하다. 그러나 이 가난이라는 체질이 무한한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은 나의 가난함 속에서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것을 생산한다해도 내 것이 아니며 나는 늘 가난하다. 그러나 나는 이 가난을 인한 생산력에 놀라고 있으며 그 생산품이 내것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하나님의 위로로 충만하다. 물이 흐르고 있는 수도관은 마를 새가 없으며 곡식을 생산하는 밭은 배고플 시간이 없다. 할렐루야!
천국 백성의 본성

(4) 온유한 자

온유한 사람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 같은 사람이다. 손해가 오고 괴로움이 오고 죽음이 와도 반항하지 않는 사람이며 놀림에 대해서나 핍박에 대해서나 무시함에 대해서도 대항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인가 받은 것이라도 도로 빼앗길 사람이며 가진 것이라도 유린 당할 사람인데 어떻게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땅을 주신다 해도 세상이 다 빼앗아 버릴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온유했기 때문에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할 수 밖에 없었고 이삭은 온유했음으로 불렛셋에서 우물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땅을 기업으로 받았고 이삭은 불레셋인들의 경외하는 자로서 그 땅을 받았다. 반대로 야곱은 온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자기가 얻은 모든 기업을 잃고 타국땅 애굽에 내려가서 4백년을 종살이했었다. 이 일은 참으로 기이하다. 세상에는 이런 일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아래서 된 것이지 인간의 역사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온유하면 결코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빼앗겼으나 다른 것을 얻었고 야곱이 빼앗았으나 다시 잃어버린 것은 깊은 비밀 안에서 되어진 것이지 결코 세상적 역사에서 되어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장차 올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를 열기 위한 사람들의 예이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일을 표면적으로 적용한다면 땅을 기업으로 얻기는 커녕 오히려 땅에서 살 곳을 잃을 것이다. 어느 세상의 역사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얻고 기업을 얻은 일이 있었던가. 하나님 나라 외에는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이다. 주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관념으로 이 말씀을 들어서는 안된다.
강포한 자는 세상을 기업으로 얻고 온유한 자는 천국을 기업으로 얻는다. 온유하면 세상을 얻을 줄로 알고 있는 사람은 어리석다. 세상을 얻고자 원하거든 강포를 훈련하고 연마하고 배우라. 온유한 자는 세상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온유한 자는 천국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세상에서의 땅은 소유이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땅은 소유가 아닌 사람이다. 성경에서 땅은 사람을 상징하고 사람은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사람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결국은 그리스도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땅은 사람에게 제 1의 환경이며 기반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세상대로 그 환경이며 기반인 땅이 필요하고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대로 땅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상이 필요로 하는 땅은 세상을 세상 되게 하는 요소요, 세상을 받쳐주는 기반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필요와 같지 않다. 하나님 나라가 필요로 하는 땅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를 지향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 나라가 필요로 하는 땅은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되게 하는 요소요, 기반이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가 얻을 땅은 사람이며 그리스도다.
영이 가난한 사람은 그 가난함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되며 애통하는 자는 온유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가난하게 빈 그릇으로 지은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담게 하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만 그의 기업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가난한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열한 지파는 각기 땅을 얻었다. 그러나 레위인은 여호와를 기업으로 받았는데 이것은 사람의 영원한 기업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표면에 있는 다른 지파들은 땅을 얻었고 이면에 있는 레위 지파는 여호와를 얻었다. 세상은 땅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을 것이다.
주 예수님은 영이 가난함을 알았기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이었고 애통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온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무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고난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한(사53:1-9)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그 백성을 물려받았으며 영원한 기업인 참 사람을 얻었기 때문에 주요 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그는 참으로 온유함으로 땅을 기업으로 받은 우리의 첫 열매이시다.

천국 백성의 본성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가난한 사람은 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애통하고 애통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채워진 것이 없는 자다. 성 낼것도 없고 불평할 자격도 없는 자다. 강팍한 재료가 자신에게 없기 때문이다. 남을 판단하려면 자신에게 바름이 있어야 하고 정죄하려면 자신에게 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오직 채움만을 필요로 한다. 그에게는 부유함도 만족함도 굳셈도 없다. 그래서 그는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은 창조 안에서 가난하다. 그러나 선악과의 세계에서 얼마나 부유해졌는지! 아담의 빈 공간은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졌고 네피림의 후예들은 천사들(영들)로 채워졌다. 사람은 본래 가난했기 때문에 무엇을 채우려고 한다. 그래서 지식과 영으로 채운 것이다. 오늘날도 사정은 동일하다. 어떤 사람들은 교리적으로 지식으로 채웠고 다른 사람들은 무슨 신령한 영으로 채웠다. 그러면 사람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빈 그릇은 무엇을 담으려고 지어졌는가 그것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인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교리나 신학인가, 아니면 천사인가, 무슨 신령한 것들인가 하나님이 이런 것을 채우려고 사람을 지었다면 아예 창조때에 이런 것들 중 하나님의 계획에 맞는 어떤 것을 넣어서 창조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사람을 단지 빈 그릇으로만 지으신 것은 무슨 이유인가.
흙에 생기를 넣었다고 해서 흙이 변한 것은 아니다. 단지 혼을 산출할 뿐이지 흙은 여전히 흙인 것이다. 그와 같이 사람이 무엇을 담는다 해도 사람은 여전히 사람일 뿐이다. 재물을 소유한다 해서 내가 재물이 되는 것이 아니며 지식을 소유한다 해서 내가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교리를 갖는다 해서 자신이 교리가 되는가 무슨 신령한 것들을 갖는다 해서 자신이 신령한 것이 되는가 무엇을 그 자신위에 혹은 안에 더한다 해도 사람은 그 사람인 것이다.
창조는 참으로 오묘하다. 누구도 창조는 바꿀 수 없고 더할 수도 없다. 사탄은 하나님의 창조를 변형시키려고 도전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변형시키지 못했다. 사람이 속고 있을 뿐이지 실제는 창조 그대로인 것이다.
선악을 아는 사람, 교리나 성경을 아는 사람, 무슨 신령한 것을 가진 사람.... 그러나 무엇이 그 사람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겠는가 그것들은 모두 지나가고 그 사람은 잔치집의 빈 접시처럼 결국은 그대로 남을 뿐인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얻게 되면 자신이 변한 줄로 알지만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며 빈 그릇이고 빈 집이며 흙인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창3:19) 누가 이 말씀을 바꿀 수 있겠는가
사람은 산 혼이 되었다. 산 것은 생명 아닌 어떤 것과도 화합(化合)되지 않는다. 물질이나 지식이나 어떤 영이나 그 어떤 것과도 화합되지 않는다. 다만 물리적 결합을 할 뿐이다. 생명은 오직 생명과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화합물이 된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고 가난하며 빈 것이다.
사람이 합당한 위치 안에 있다면 자신이 빈 존재라는 것을 알 것이며 이것을 알 때 비로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될 것이다. 지식이 있고 교리가 있고 신학이 있어도 의에 주리고 목마를 것이며, 물질이 있고 영이 있어도 의에 주리고 목마를 것이다.
의는 하나님과 합당한 관계이다. 생명 아닌 어떤 것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당화시켜주지 못한다. 빈 그릇의 위치만이 합당한 관계를 밝혀준다. 빈 그릇으로서의 이 합당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갈망하고 주리고 목말라 한다. 동산 안에 있는 생명나무는 합당한 위치 안에서만 배부름으로 먹어진다. 위치가 합당하지 않으면 거리낌이며 미련한 것이 되어 먹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고전1:38,23)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합당한 관계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化合된 생명으로 배부를 것이다(계7:15-17). 물리적인 결합은 헛배만 부르게 할 뿐이다. 그것은 헛것들로 배부르게 함으로써 사람을 기만하고, 속이기 때문에 참 배부를 길을 막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주 참 배부른 사람을 만난 사람은 가난함을 발견하며 결국은 참 주리고 목마름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은 생명아닌 어떤 것으로도 화학적 배부름이 없도륵 창조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도록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사탄이 아무리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사람을 탈취하려고 해도 사람은 여전히 빈 그릇으로 남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다.
아담안에 있는 사람은 가난함을 모른다. 단지 땅에서 유리할 뿐이다. 그는 헛것을 찾고 헛것으로 배부르며 헛것을 찾고 배부르며 헛것을 나타내다가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전1:1).
그러나 참 부유한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사람은 자신이 가난함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밖에 없다. 가난은 상대적으로 발견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왜 부유한가 그의 위치가 합당하기 때문이다. 물은 낮은 곳에 고이고 은혜는 가난한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자란다.
온유한 사람은 반항하거나 다투지 못하고 부득이 고난을 받고 멸시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기다리고 그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된다. 주 예수님은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에 '하나님,하나님,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결국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최후까지 하나님의 의를 기다리다 지쳤지만 그래도 그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부활의 세계에서 그의 모든 주림과 목마름은 채워졌고 넘침이 확산되었다.
다윗은 곤고한 중에 의의 하나님을 찾았다(시4:1,7:1,18:16). 온유함으로 말미암아 곤란을 당한 자는 하나님의 의를 갈구한다. 부모가 자기를 버렸을 때도, 형제들이 자기를 멸시했을 때도, 사울왕이 자기를 무고히 죽이려 했을 때도, 아들이 왕궁을 빼앗고 백성이 등을 돌렸을 때도 그는 하나님의 의를 갈구하여 주리고 목말랐던 것이다. 그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하나님의 의를 찾기에 갈급했던 것이다. 세상은 악한 자에게 속하고 강포한 자의 소유가 되었다. 온유한 자는 자기몫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온유함으로 억울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공의로운 심판이 행해지기를 원했고 억울함이 받아들여지는 세계를 원했다. 그들은 이 합당한 소원이 다가올 메시야의 세계에서 강물처럼 넘치도록 성취될 것을 기대했다.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원수를 갚아줄 하나님을 찾고 있으며 공의로 통치할 자는 오지 않았고 원수를 갚아줄 하나님도 없었다. 세상은 악한 자에게 넘겨져 있는 것이다(눅4:6). 세상의 의는 강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의이지 약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롬1:17)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였다. 하나님의 의는 세상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찾을 수 없었고 하나님에게는 있지만 나타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으심으로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의가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세상에 있지 않고 부활 안에 있다.
영이 가난한 사람은 부활안에서 천국이 저희 것이며, 애통해하는 자는 부활 안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며, 온유한 자는 부활 안에서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부활 안에서 배부를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또다른 보복이 아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고 셋은 노아를 낳고 노아는 아브라함을 낳았으며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다. 사탄이 불의를 행할 때 의를 내놓았으며 사망을 행할 때 부활을 내놓으셨다. 그가 바벨론을 건축할 때 하나님은 새예루살렘을 건축하신다. 하나님의 활동은 부활이요 생명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를 기다리신다. 사람의 길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흙은 능력이 없다. 무엇이 들어와도 뱉어내지 못하고 받아 먹어야 한다. 그는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 하는 운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호흡이 필요했고 그의 갈빗대가 필요했다. 사람에게는 원래 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자기 의를 만들었다. 자기 의로 하나님의 의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의가 있는 곳에는 저주요 심판이 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 나의 의와 남의 의는 서로 싸운다. 나의 의로는 배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선악을 안 이후 사람의 세계는 싸움으로 꽉찼다. 싸움으로 배부르게 된 것이다. 모든 싸움은 사람의 의에서 나온다. 유대인의 의는 이방인을 저주했고 기독교의 의는 이교도를 저주했다. 이 교파의 의는 저 교파를 저주한다. 사람의 의는 싸움의 원천이다. 싸움의 원천인 사람의 의는 온유한 자에게서 나오지 않고 강팍한 자에게서 나온다. 강한 자는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의로써 하나님의 의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의를 갈망할 수 밖에 없다. 도살장으로 끌려간 어린양은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고 있다. 세상의 의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갈망한다. 세상은 모두 자기 의를 만들고 전시하고 과시한다. 문화와 종교와 지식과 교리의 의가 날이 갈수록 팽만해 가고 있다. 능력과 소유의 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모든 기득권은 의로 등록된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자기에게 돌아올 몫의 의가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갈망한다. 선지자들은 이 의를 갈망했었고 하나님은 결국 십자가를 통하여 이 의를 나타냈다. 이 의를 받을 때 인생은 만족함으로 채워진다. 하나님의 의는 부활이다.부활 만이 사람을 배부르게 한다. 부활은 영이 가난한 자의 천국이며 애통해 하는 자의 위로이며 온유한 자의 기업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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