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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마 0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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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저희를 찾지 않으시면 우리는 사망 가운데서 죽어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심판과 진노 아래 있는 자식임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나이다. 주님께서 외면하시면 우리는 그 순간으로 우리 생명은 끊어지며 울부짖으며 죽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을 주 앞에 고백하오니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 우리를 살리 시기 위해 독생자를 죽게하신 하나님께 생명의 성령님으로 하여금, 주의 말 씀을 가지고 우리 영혼을 살려주시며, 새롭게 하시며, 힘있게 하여 주시옵 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바로 앞에서는 영생을 얻은 자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삶의 최고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 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 거룩하 고 은혜로우신 다스림이 땅 위에, 특별히 내 삶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와같은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재림하시는 날 이 땅 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간구하 는 기도일 뿐만 아니라, 오늘 현재 나의 모든 삶의 부분들에서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실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주 기도문 중에 '우리에게 일용할 것을 주옵시고'라고 하는 기도의 참된 의미가 무엇이냐를 밝혀주는 말씀이라 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일용할 것, 육신의 필 요를 구하는 진정한 목적은 육적생존 그 자체를 위하여 먹고, 마시고, 잘 입어 즐기기 위함이 아니요,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현하는 고귀한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용할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는 진정한 목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저 육신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구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이 주께서 허락하시는 동안, 그 생명을 허락하시는 동안 내 삶 속의 나의 활동과 나의 모든 삶의 부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일용할 것들을 구해야 할 것입니 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는 기도의 다음 내용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 시고'라고 하는 기도와 관련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의 삶 은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만큼,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진정한 삶의 목표에 위배됨이 없는지를 늘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참된 삶의 목표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혀서 행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관계되는 한 아무리 엄격하게 옳고 그름을 따진다고 해도 아무 탈이 없습니다마는, 참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마 는 이 옳고 그름을 밝히는 일이 남과 즉, 이웃과 관계될 때는 반드시 주의해 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웃과 더불어 옳고 그름을 밝히는 일 즉, 남의 잘못에 대해서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가르친 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 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 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선 얼핏 들으면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우리 말에서는 남을 정죄한다는 뜻을 갖습니다마 는, 그저 판단하지 말라는 그런 말씀으로 번역할 때는 조금 우리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뭐냐하면 판단하지 말라고 하니 전혀 선악간에 판단을 내리지 말라고 하는 것인가 전혀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그저 덮 어두라고 하는 말씀인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6:36 이하에 보면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 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 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마태복음 에는 간단하게 기록된 이 말씀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 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그 말씀 사이에 누가복음에 보면 긴 말씀이 삽 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누가복음 말씀에 따르면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 다음에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이 따라오며 그 뒤에 또 용서하라는 말씀이 따라옵니다. 즉, 여기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의 뜻은 남을 정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남의 잘 못을 일일이 다 들추어 내어서 하나하나 정죄해 가며 저 사람은 나쁜 사람,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는 그 자체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숨은 동기, 마음의 자세를 문제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뾰족 한 마음, 남을 정죄해서 허물어 뜨릴려고 하는 마음, 멸시하는 마음, '너는 그런 인간이야' 하고 낙인 찍는 마음, 이런 마음의 자세를 경계하고 책망하 고 있다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비판하지 말라 남을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 다음에 정 죄하지 말고 오히려 용서하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히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도 용서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비판하지 말라'고 한 말씀은 이 주 기도문 중에 어떤 말씀과 관련되는가 하면 앞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그 말씀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을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도 정죄받지 않고 용서받으리라는 말 씀입니다.

 더우기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 바로 앞에 누가복음에 보면 '하나님의 자비 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남을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도 용서를 받으리라는 이 말씀은 결국 너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은 대로 남에게 긍휼 을 베풀면 너희도 긍휼을 입으리라고 하는 그 말씀과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의 잘못에 대해 정죄하려고 하는 뾰족한 마음, 정죄해서 그 사람을 허물 어 뜨리고 내려 밟아버리려고 하는 마음, 또 멸시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오 히려 그를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불쌍히,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입니 다. 왜냐하면 우리가 남을 재는 그 척도를 가지고 우리를 재시는 분이 계시 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우리를 대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남을 정죄하는, 혹독하고 엄한 마음 으로 남을 대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엄하고 혹독하게 대하실 것이요, 우 리가 남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 그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 로 헤아림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실 것은 우리가

남을 두고 긍휼히 여기면 이것이 네게 무슨 공로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 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었으니 참으 로 그 긍휼을 바로 입은 자라고 그러면, 그 긍휼을 체험한 자라면 자연스럽 게 남을 긍휼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자기 마 음이 괴로워서 견디질 못합니다. 남에게 혹독하고 엄한 마음을 품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도 그 마음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 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네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라 남의 잘못을 비판하고 정죄하려 하지 말고 그 전에 네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라. 네 자신도 허물이 많은데 아니 오히려 더 큰 허물이 있는데 어째서 남을 비판하려는 마음이 그리도 급한가 누가복음 6:39을 보면 바로 이 본문 말씀 '네 눈의 들보를 먼저 빼라'고 하는 말씀 앞 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 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네 자신도 제대로 보지 못하 면서 어찌 남의 잘못을 보고 고치려고 드느냐 정죄하려고까지 드느냐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것은 소경이나 마찬가지인데 소경된 자가 다 른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는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말지 먼저 네 자신을 돌 아보고, 먼저 네 자신의 허물과 잘못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 가 선생의 수준을 넘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제자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은 그저 선생 만큼만 되면 그게 최고입니다. 그가 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입니다. 제자가 선생보다, 선생 이상이 되리라고 바라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말씀일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제자는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 고 한다면 네가 만일 남을 가르치려고 할 경우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이래 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고 가르치려고 할 경우 결국 제자가 선생보다 뛰어 날 수 없으니까 기껏해 봐야 그 사람이 네 수준 밖에 못된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눈에 들보가 있으면서 남의 눈의 티를 가지고 야단을 할려 고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남을 가르칠려고 들면 오히려 자기보다 나은 적 은 허물을 가진 사람을 쓸어내려 자기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 되어버리니 그 결과가 어떻게 좋을 수가 있겠는가라는 뜻의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서 내가 죄짓지 않겠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죄 짓지 않는 것도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도 연약에 쌓여있는 만큼 범죄한 자를 볼 때, 먼저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 를 어찌하든지 바로 세우려고 하는 마음으로 그를 온유하게 권고할 것이요, 또 그와같이 범죄한 경우를 볼 때 항상 너 자신을 살펴서 너도 같은 시험에 떨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남의 잘못을 정죄하기 보다는 나 역시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온 유한 심령으로 실수한 형제를 도와서 다시 일으키는 일을 가리켜서 그리스 도 안에서 한 형제된 우리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길이요, 이를 통해 그 리스도의 계명,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이루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아무 것도 아니면서 무엇이나 된 것 처럼, 저 자신도 늘 실수하면서 저는 마치 평생 실수 안하는 사람인 것 처럼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달려드는 사람, 이런 사람을 스스로 속이는 자라 그럽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앞의 말씀에서는 잘못을 범한 자 특히 우리에게 빚진 자, 나에게 잘못을 범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용서와 긍 휼을 베푸는 일에 있어서 조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개나 돼 지 처럼, 짐승 처럼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은혜를 원수 로 갚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면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덤벼들 어서 그 사람을 해하고 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 면 감사하지는 않고 마치 자기가 옳아서 당연히 받을 권리로서 받는 것 처럼 꼿꼿하게 받고, 그의 잘못을 간절한 마음으로 충고할 때 오히려 지은 범죄 를 당연시하고 뉘우치지 않는, 회개치 않는, 긍휼을 베푼 사람의 값진 사랑 과 은혜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짓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긍휼 을 베풀되 지혜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긍휼과 사랑을 베풀되 거룩한 것이 더럽힘을 당하고 짓밟히지 않도록, 진리가 손상되지 않도록 진주 처럼 값지 고 소중한 것이 짓밟히지 않도록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께서도 늘 경험하시겠습니다마는 용서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없습 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단순히 그저 내가 네가 한 일을 잊어버 리겠다, 그저 그렇게 용서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요, 더 나아가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뜻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들보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도 하나님 말씀 앞에서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야 얼마든지 혹독하게 비판해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남에 대해서 이야 기 할 때 우리는 굉장히 조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적 의미에서 모두 다 소경입니다. 희미하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소 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잘못을 우리가 잘 모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도 그런 경험이 많을 것입니다. 저 사람하는 행동보고 '틀렸다, 저래가지고 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기회가 닿아서 그 사람하고 이야기가 되어서 조용히 사정을 물어 보면 제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딴판인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 머리가 수그러지고 그저 내 얼굴이 달아 오르는 그런 경 험을 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남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고, 고치려들고, 정죄하려기 보다는 먼저 내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늘 남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항상 여지를 두어야 합니다. 우선 내가 그 사람의 참된 사정을 알 수 없기 때문이고 나도 꼭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엄하고 혹독하게 그를 대 하면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혹독하고 엄하게 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남의 잘못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겠는가에 대해 갈라 디아서 6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 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 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어떤 사람의 잘못이 드 러나는 경우 산지사방 흩어져 다니면서 그저 외고 다니지 말고, 욕하고 다 니지 말고, 그저 온유한 심령으로 그 사람을 바로 잡으라 그럽니다. 혹독한 심령으로, 사나운 심령으로 '당신은 왜 이랬어' 하고 따지고 들고, 정죄해 서 바로 잡으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심령으로 벗어난 길에서 돌이켜 보고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온유한 심령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것과, 내 자신을 돌아보아 시험 받지 않도록 조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나 역시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했을 때 '그래, 누구나 그럴 수 있지 뭐 좋아' 이렇게 해 버리면 참 마음이 좋은 사람 같이 보이나 그런식의 용서를 할 경우 무너지 는 것이 있습니다. 성결이 무너집니다. 의로움이 무너져 버립니다. 여러분 쉬운 예를 듭시다. 여러분의 자녀가 잘못했을 때 '뭐 그럴 수도 있어' 맨 날 그렇게 해보십시요, 그 아이가 어떻게 자라겠는가.

 갈라디아서 말씀에서 잘못이 발각될 경우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 사 람을 바로잡으라' 그랬습니다. 본래 떨어진 자리에서부터 본래의 자리로 회 복시키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래서 더 힘든 것입니다. 그저 용서하고 끝 나면, 나 모르겠다 하고 끝나 버리면 되는 것 같은데 용서는 그것이 아닙니 다. 그 사람을 바른 자리에까지 다시 회복시켜야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이렇습니다. 이러한 용서가 아니고 '인간이면 누구나 다 그럴 수 있지' 해 버리면 참으로 거룩한 것, 값진 것, 성결과 의가 손상을 받거나 짓밟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용서할 때도 그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바로 세우는, 의를 세우는 용서가 아 니면 그 용서는 값싼 용서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말씀은 동시 에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야할 대상에 대해 너무 순진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내가 사랑을 베풀면 상대방이 감지덕지 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 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베푸는 사랑을 짓밟고 은혜를 원수로 갚을 만큼 악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가 장 쉬운 예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얻는 것 만큼 복된 일이 어디있습니까 그러나 전도를 해보십시요. 누가 감지덕지 합니까. 귀찮다고 쫓아내기나 하 지요, 우리가 사랑을 베풀고 살아야 할 이 세상이 이처럼 악하다고 하는 것 을 염두에 두고 늘 지혜롭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지혜롭게 하라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개 약삭빠르게 행동하라는 것 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 상에 그 제자들을 보내면서 말씀하신 것이 있는데, '내가 너희를 이리 떼에 게 보내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뱀 처럼 지혜롭되 동시에 비둘기 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지혜는 성결과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말씀하시기를 위에서부터 오는 지혜 즉, 하나님에게서부터 주어지는 지혜는 첫째로 화평하고 그것과 분리될 수 없이 또 성결하다고 그럽니다. 절대 약삭빠르게 행동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 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 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앞의 부분과 연결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 견할 때 그저 한 번 얼핏 보게 되면 우선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 같고, 특별히 우리가 낙심치 말고 간절히 기도할 것을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우 리가 낙심치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들어주신다, 응답하신 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앞에 말씀드린 내 용들과 연결이 된다고 한다면,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라고 하는 이 말씀은 앞에 드린 내용을 전제로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남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께 이와같이 구할 수 있다고 하는 뜻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36:38 이하를 보면 '주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시 되 누르고 넘치도록 갚아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긍휼을 베푸는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그 삶 속에 하나님의 긍휼이 놀랍도록 풍 성하게 임한다고 하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와같은 약속이 주어져 있으니 너희는 구하라, 이와같은 용서와 긍휼의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께 간 구할 수 있고, 간구하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갚아주신다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악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긍휼을 베풀며 살 때 사람

은 무지막지하게 은혜를 악으로 갚을지라도, 사람은 갚아주지 않아도 하나 님은 갚아주시며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 누르고 되어 넘치도록 갚아주 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에 대한 말씀 7절에서부터 11절까지에서 예수님께서 진정으 로 강조하려고 하는 점은 11절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 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악한 너희도 자식에게 좋은 것 을 줄줄 알거든 하나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자녀에게 더더욱 선한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즉, 이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구하 는 자에게 아낌없이 선을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강조가 되고 있는 것 은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입니다. 우리가 이 내용을 앞에 말 씀드린 것과 연결시켜 본다고 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은 뜻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긍휼히 베풀되 거룩한 것과 소중한 것이 짓밟히지 않도록 주 의하라고 하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의와 성결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의와 성결이 무너지지 않도록, 손상받지 않도록 하 라, 그리고 너희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은 이처럼 악한 세상이니 지혜 롭게 처신하라. 이런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는데 인색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악하고 이기적인 것이 우리의 성품인데 거기다가 함부로 선을 베풀지 말고 성결과 의가 다치지 않도록, 그리고 세상이 악하 니 지혜롭게 처신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될 수 있는 대로나 편하게, 약삭빠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우리 심정이 이렇게 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지심을 일으켜서 남을 도와줄 마음이 생기게 하셨는데도 딱 돌아서면 또 마음이 변하고 그럽니다. 어떻게 든지 구실을 찾아서 안도와줄려고 합니다.

 사실 악한 세상 가운데서 지혜롭게 살라고 하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마음이 생기기보다는, 상대 방의 악함을 구실로 삼아 될 수 있는대로 선을 행하는데 인색한 방향으로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경험합니다. 저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베풀어야 소용없어, 틀렸어, 밑빠진 독에 물 붓기지, 아무리 해봐야 저 사람은 소망 이 없어, 뭐 누구 도와준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효과를 내라는 법이 있는 가 그렇게 변명을 삼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 바로 다음에 아낌없이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조한 것은 위 말씀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 지 말라'는 것을 변명과 구실로 삼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선을 행하 며 긍휼을 베푸는 일에 있어서 인색하지 말고, 구하는 자에게 아낌없이 주시 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으라고 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 단락의 말씀이 어떻게 시작된 것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 심 같이 너희도 자비를 베풀라'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형제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대로 흔들어 눌러 넘치도록 갚 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 하라' 너희가 남이 너희에게 해 주었으면 하는 대로 먼저 남에게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먼저 행하라. 네가 먼저 사랑을 베풀라. 내가 사랑을 베풀 면 저 사람의 반응이 어떠할까 제대로 효과가 나타날까, 나에게 감사할까, 그런 것 따지지 말고 먼저 네가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이웃관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 하는 원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웃 사랑의 기본 자세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하는 자세, 남을 정죄하고 낙인찍으며, 허물어 뜨릴려고 하는 자세가 아 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자세를 가질 것을 명하십니다. 내가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아서 상대방이 어떤 아픔을 느끼며, 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서 그 사람을 일으켜 바로 세우기 위해,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남에 대해서

비판하고 정죄하는 시선을 사랑과 긍휼의 시선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 다. 남에게 잘못을 권고하고 일깨울 때 먼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 기지 않거든 차라리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 해봐야 괜히 그 사람 신경만 건드리고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라고 하는 것은 그저 잘못해도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의 근본 원리가 항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남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 다. 그런데 이런 사랑없이 그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을 망하게나 하고 자기 도 상할 뿐입니다. 남의 잘못이 있을 때 물론 그것에 대한 시비의 판단은 분명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분명해야겠으나, 내가 참으로 그 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나기 전에는 그에게 그의 잘못을 권 고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가 그 를 바라보는 눈이 비판하고 정죄하는 시선이 아니라,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시선이 될 때까지 기도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주실 때 그에게 찾아가 지혜롭게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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