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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족을 얻는 삶 (마 09: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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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강조하고 있다. 왕되신 그리스도는 사죄의 권한이 있고, 죄인을 불러서 의인으로 삼으시고, 금식이나 고행의 수도절차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에 이르며, 이 진리는 마치 새 술과 같은데, 반드시 새로운 가죽부대에 넣어야지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어떤 사람, 누구든지 예수를 필요로 하면 예수는 기꺼이 그들의 필요가 돼어 주신다는 사실이 18절 이하에 기록돼어 있다.

예수는 요한과 그의 일행이 답습한 의식을 낡은 자루에 담긴 옛 술로 비유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은 “새 술”이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새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중생을 체험한 사람들은 누구보다 새 술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새 술이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복음이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을 어디에 담고있는가 하는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옛 자루에 담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주일 낮, 저녁, 수요일, 기타 성경공부 등등에 참여 하면서 “새술”을 공급받지만 담는 그릇의 문제로 인하여 그 술에 취하지 못하고(성화)냄새만 맡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교회 문을 나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술이 모두 새어버린 후라는 점이다. 새 술을 어디에 담는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성도들 처럼 온전히 “새 술에 취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언어가 변하고 인격이 변하고 생활이 변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남을 경험할 수 있다.

마9:18 이하의 말씀은 바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믿음이 있었다. 세상에는 야이로 말고도 자신의 자녀를 어린 나이에 잃은 부모들이 수없이 많으며, 당시의 예수님 근처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들중 그 어느 누구도 죽은 자녀를 예수님을 통해 살릴려고 시도한 사람이 없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경우는 대단히 비참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여인이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고 급기야는 자신의 운명을 정복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자신의 환경에 밀어닥친 불행에 대하여 예수를 개입시켰다.

분명히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의 기적에 대하여 “남의 일”로만 여겨야 한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그 일이 있을 수 있다고 공감은 한다. 그러나 나에게도 오늘 이시간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궂이 모험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포도주의 냄새만을 맡고 살 뿐이다. 그러나 술에 취한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듯이 우리는 야이로가 돼어야 하고 열두해를 혈루증 앓은 여인이 다름아닌 나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취할 만큼의 충분한 량의 포도주가 필요하다. 우리가 술에 취하면 야이로처럼 예수님에게 “죽은 내 자식 살려달라”고 억지를 쓸수도 있고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

하나님은 이시대의 성도들에게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포도주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풍요를 허락해 주셨다. 우리에게는 포도주를 공급해 주는 매체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문제는 그릇이 준비돼지 못한 점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불행이다. 우리는 그저 그릇에 묻히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인의 흉내를 내면서 산다. 종교인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의 술에 취해서 예수에 미친 사람이 돼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며 수지맞는 인생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제일 먼저 예수의 술을 저장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대책이 필요하다. 과연 어떻게 하면 “새 술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를 만들수 있을까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남다른 필요성과 집념”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결코 타협 하지 않았다. 이들의 강력한 집념이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주님은 간절히 “찾고 구하는 자”에게 만나 주신다.

 주님은 “새 술을 담을 새 가죽부대”를 구하는 자에게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 그러나 종교생활을 원하는 자에게는 여전히 헌 가죽부대만 존재할 뿐이다. 그는 평생을 냄새만 맡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

 1.주님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새 술은 새 부대에”담아야 한다고 좀 이상한 답변을 해주셨다. 그러면서 만일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담는다면 그 부대가 터져서 술을 모두 버리고 말 것이라고 경고 하셨다.

 2.금식에서 시작된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새 술과 새 부대”라는 진리로 마무리 하셨다.

 3.본문에는 마치 술에 취한 것같은 두 사람이 소개 돼어 있다. 이들은 상식을 초월하는 행동으로 그들의 운명을 극복하고 최대의 만족을 쟁취하였다. 이들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도 만족에 이르는 길을 배우자.

 I.모든 사람의 만족의 필요를 느끼며 산다(18-21).

A.회당장 야이로.

 1.유대인이었다. 그는 아마 바리새파에 소속돼었을 것이다. 회당장이라는 직책은 지역의 유지였다.

 2.체면상 드러내 놓고 예수를 따르기 어려운 신분이었다.

 3.그의 문제는 12년 동안이나 애지중지 해오던 딸이 죽게된 것이었다. 그는 체면불구하고 예수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도움을 청했다.

 4.이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듣는 사건이 아니다. 이 세상에 죽은 자기의 가족을 살려보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을까 사람이 죽기 전에는 의사를 찾아가고 좋다는 비방을 써보기는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 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경우는 미친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5.열두살 먹은 딸아이의 죽음은 그만큼 중년의 가장에게는 견디기 힘든 충격이었다. 그는 이 견디기 힘든 충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를 찾았다.

 B.혈루증의 여인.

 1.혈루증이라는 병은 매우 희귀한 병이다. 그러나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대단한 불이익이 뒤따랐다.1)가족과 격리돼어야 한다(율법의 명령사항).

2)여자의 경우는 남편과 이혼해야 한다. 위자료도 없다.

3)마을에 들어와서는 안된다. 사회로 부터 추방당했다.

 2.이 여인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12년 동안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여인은 빈털털이가 돼었다(눅8 )

3.이 여인에게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노력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오직 병의 치료만이 그의 목표였다.

 이렇게 야이로와 여인에게는 얻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이들의 목표는 “만족”이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사람을 만나 주신다.

 II.예수는 우리에게 만족을 제공한다(23,25-26).

A.딸아 안심하라(22).

 1.그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간절한 필요성 때문에 예수를 찾았다.

 2.야이로는 예수가 딸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기를 원했지만 이 여인의 경우는 예수님의

옷을 만져도 날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다. 붙잡는 순간이 여인은 이미 다른 사람이 돼어 있었다.

 3.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는 밀어도 누구가 미는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호기심” 때문에 따라올 뿐이었다.

 4.이 여인은 절실한 필요 때문에 예수를 따랐다. 인생의 마지막 시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다.

 5.너희들은 호기심 때문에 나를 따라 다니고 있지만, 이 중에 단 한사람 나에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해 주셨다.6.딸아!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돼어 있다.1)버림받았던 신분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딸이 돼었다는 뜻이다.

2)남편에게서 버림받았으나, 이제는 주님께서 영원한 남편이 돼신다는 뜻이다.

3)공동체로 부터 소외당했으나 이제는 하늘나라의 구성원이 돼었다는 뜻이다.

 7.주님은 단순한 병치료로 만족하시지 않았다. 그 여인을 불러서 그를 만나 주셨다.

 B.달리다굼(25-26).

 1.달리다굼은 “어린 양이여,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거라”라는 뜻이다.

 2.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막5:43).

 3.인간은 사랑의 결핍때문에 죽고있다. 그래서 주님은 따뜻한 손으로 만지시며 부드럽고 자비로운 음성으로 “일어나라”고 하셨다.

 4.죽은 사람은 음식을 먹지 못한다.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된다.

 5.예수는 만족을 원하는 자에게 만족이 돼어 주셨다.

 모든 사람은 필요를 느끼며 살고 있다. 세상에 아쉬움 없는 사람은 없다. 예수를 통하여 만족을 얻고자 할 때, 주님은 얼마든지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무리가 있다.그들은 비웃는 자들이었다.

 III.만족은 찾고 구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23-24).

A.비웃는 자들이 있었다.

 1.그들은 회당장의 가정에 닥친 불행을 위로할려는 사람들 이었다.

 2.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울어주고 돈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이었다. 이들에게 예수의 등장은 한마디로 김빼는 일이었다.

 3.이들은 “잔다”는 예수의 말이 가당치 않게 들렸다.1)이들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생업의 수단이었다.

2)이들은 수많은 장례를 처리하면서 단 한번도 죽은 사람이 사는 것을 본 적이 없없다.

3)이들은 대단히 합리적이며 통계를 의존하는, 논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신앙은 논리를 초월한다는 것을 몰랐다.

 B.신앙은 상식을 초월해야 한다.

 1.예수는 이들을 쫓아냈다. 우리 중에도 내어 쫓길 자들이 있다.

 2.예수는 불신앙의 현장에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13:58).”

3.비평은 능력을 약화 시키지만 믿음은 능력을 강화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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