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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봉사와 목회 (욥 07:1-7, 고전 09:16-19, 막 01:29-39)

첨부 1


예언자 스바냐는 요시아 왕의 재위 기간(640-609 B.C., 1:1 참조)동안 예루살렘에서 야웨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그 책은 교훈을 모은 것으로, 어떤 것은 스바냐 그 자신의 것이고, 다른 것은후대에 첨가된 것이다. 예언자의 메시지 중의 주요한 주제는 야웨의 날(the Day of Yahweh)이다. 이 크고 무서운 날에 야웨께서는 모든 땅을 치워 버리실 것이다(1:14-18, 2:2, 3:8). 스바냐는다른 어떤 구약의 예언자보다 더 심판을 강조한 자였으며, 그리고 그는 의로운 남은 자(remnant)들의 구원을 예견한 자이었다(2:3,7). 우리가 택한 본문은(3:14-20) 포로 이후 시대의 정황을나타내는 바 후대의 첨가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스바냐의 어두운 미래에 대한 조망과 조화되어, 파멸의 날(the Dayof Doom) 후에 구속의 날(the Day of Deliverance)이 있을 것을말하고 있는 것이다.

끝맺는 말에서(3:14-20)는 갱신된 이스라엘의 중심이 될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국가적인, 곧 신성한 심판의 수행자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그 도시의 사람들은 기쁨의 송시(頌詩)를 부르도록 초대받는다(15절은 비록 그 사건이 아직 미래에있을 일이지만, 이미 일어났던 것으로서, 기술되므로서, 예언적완전하므로서 묘사되고 있다). 야웨의 왕권에 대한 신앙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사 6 참조). 그 왕의 현존이 모든 빈민들을 물리칠 것이다(15절). 그리고 예루살렘은 두려움을 모르는 자로 불려질 것이다(16절). 아무도 그의 손을 피할 수 없고, 절망의 몸짓 가운데서 그의 일을 포기치 않을 것이다(16절). 17-18절을 설명한 히브리서의 본문은 해석키가 어려운것이다. 17절의 부분은 그가 그의 사랑으로(당신을)새롭게 하시리라.(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는 그릇된 해석임)로 해석함이가장 좋을 것이다. 17절 전체는 야웨의 모습을 승리 가운데서 그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는 전사(戰士)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18절은 나는 당신에 대한 불명예를 치워버릴 것이며, 당신에의비난을 없이할 것이다.로 해석되어진다. 제거되어지는 수치의본질에 대하여 19절에 설명되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흩어짐은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절름발이이고, 소외된 자, 곧 추방당한 자들이 디아스포라(Diaspora)의 망명객들이다(19절, 3:10 참조)열방들에게 조소의 대상이 되었던 이스라엘의 이름이 세계에뛰어나게 높여질 것이다. 심판이 이제 중대함의 중심이 더 이상아니다. 역사는 승리의 날(the Day of Victory), 곧 왕이신 야웨께서 그의 선택한 곳인 예루살렘에 이스라엘 민족을 실재로 다시앉히실 그 때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다.

제 2주제:고린도 전서 9:16-23
제 9장의 첫째 부분에서(1-15절) 바울은 그의 사도적 자유를변호하고 있다(1절, 3절 참조). 그의 어떤 기본적인 사도적 권리

를 포기하는 습관은 몇몇 반대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그의 신임성을 의심하도록 했었다. 다시 살펴보면, 그 문제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도가 일하고 있는 공동체로부터물질적이며 재정적인 도움을 얻는 것은 사도의 권리로서 당연시되어 왔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권리의 합법성을 비판함이 없이, 그것을 안 받는 그의 개인적인 자유를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단을 가지고, 바울 사도는 그 자신의 말에 의거하여, 주님에 의한 명령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14절). 이 사도적자유에 대한 특이한 행동의 정당화가 16-23절 사이에 표명되어지고 있다.

그는 그에게 부과되어져 왔던 필연성을 말함에 의하여 그의자유에 대한 주장을 시작하고 있다. 이 필연성이란, 그의 다메섹 도상의 개종과 그의 모태로부터 택정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선택에 귀착된다(빌 3:12, 갈 1:15-16 참조). 사도로서의 그의생은 그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아닌 것이다. 예언자들과 같은 방법으로서 지명되어진(렘 1:5, 사 49:1), 바울은 그가 피할수 없는 신성한 강제 아래 묶여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완전히 본 자유한 사람인 것이다. 그가 혹 자유로운 사람이고그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적인 보수를 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17절). 그러나, 그는 그의 뜻과는달리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임무를 위탁받는 사람이기 때문에,그는 모든 권리를 빼앗긴 노예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는 물질적 보상을 요구할 아무런 권리가 없는 것이다(17절). 그의 개인적 보수는 단지 그의 헌신적 봉사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 그것뿐인 것이다(18절).

물질적 보상의 권리를 포기한 바울의 선택은,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노예됨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신성한 필연성을 다룸에 있어서, 그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봉사에 있어서의새로운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다. 그는 실로 아무 사람에게든지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될 수 있는 것이다(22절).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행할 수 있었으며(20절), 이방인의 친구로서는 율법에서 자유로운 사람같이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21절). 어떤 가능한 오해도 여기에 남을 수 없다. 그는 율법주의(legalism)을 고집하는 사람도 아니며,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도아닌 것이다. 그는 그를 묶어 두기도 하고 자유롭게도 하는 규범(a norm)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에 붙잡혀(21절) 바울은 인격적 자기 신뢰를힘쓰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얻어진 자유가 그로 하여금 보답을 바라지 않는 봉사를 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확실히 그가 그들의 언어를 같이 말하고, 그들의 죄를 경험하고, 그들의 기쁨에같이 동참할 때에 그 사람들을 얻을 수(win) 있었던 것이다.

복음서 주제:마가복음 1:29-39
예수의 첫번째 이적인, 가버나움에서의 축귀 사건(1:21-28)에이어 병고침의 역사(役事)가 나타난다(29-31). 그 축귀 사건과병고침의 사건이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의 중대한 일면이라는 것은 마가의 요약에 해당하는 32-34에 의하여 잘 드러나고 있다.
두 행동 모두가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예수의주요 목적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의 도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것이다(1:14-15).

네 제자들의 출현은(29절) 병고침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같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고별 설교를 들을 권리가 주어질 것이

다(13:3 이하).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야이로의 딸의부활과(5:21-24,35-43), 변화산상에서의 사건과(9:2-8),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14:32-42)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목격자가 될수 있었다. 또한 예수께서 그의 첫째 축귀 사건은 남자에게, 그리고 첫째 병고침의 사건은 여자에게 행한 것을 살피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왕국은 남성과 여성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병고침의 중요성이 시몬(베드로)에게는 특히 잊혀질 수 없는 일이겠다. 시몬의 가족 중 한 명의 병을 고침에 의하여, 예수께서는 그의 신성한 권위로서 수제자로서의 그의 길을 나타내신 것이다. 전 사역을 통하여, 시몬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특별한 책임과 권리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34절은 메시야적 비밀(the messianic secret)의 신학을 나타내는 첫째 장면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을 향해 그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금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그들의 천명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들이 바른 것을 증거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예수가 누구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침묵할 것이 요구되어진다(3:11-12 참조). 학자들은 마가에 있어서의 이 메시야적 비밀의양상과 역할에 대해 일치하는 견해를 갖고 있지가 않다. 한 가지분명한 것은 비밀의 베일이 예수의 전 사역에 걸쳐 덮여 있다는것이다. 그의 충분한 정체가 그의 제자들을 포함한 사람들에게감춰진 채 남는다. 예수가 누구였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의 순간,사형 집행을 맡은 사람의 입을 통해 비로서 밝혀진다(15:39).

35-38절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의 갈등의 시작을 나타내고있다. 시몬과 다른 세 명은 가버나움으로부터 물러나와 있었던예수를 따르고 있다(36절, katedioxen). 그들은 그에게 첫째승리의 도시로 되돌아 갈 것을 요청하였다(37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메시지를 퍼뜨리기 위하여 또 다른 곳으로 옮길 필요성에대하여 강조하시고 계신다(38절). 그의 선교는 전 갈릴리 지역을무대로 하여야만 했다(39절).
어떤 사람은 이 본문(1:29-39)의 제목을 예수와 베드로(J.Schniewind)로 하고 있다. 예수의 병고침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예수의 목적한 바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시몬은 가버나움 도시 저편으로 빠지는 길에서 예수로부터 떨어져 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의 사역에 있어 역동적인 비젼을가진 반면, 시몬은 마음에 있어 더 한정된 목표를 가지고 있는것이다.

설교를 위한 해석

스바냐의 제 1주제는 주의하여 설교자가 사용하여야만 한다.
우리가 한 주석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그 예언의 본질은 심판과파멸의 날이라는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만약 그것이 문맥에 따라 설교되어 진다면, 부드러운 것들(smooth things)의 예언으로서 값싸게 왜곡되어 질 수 있는 끝맺는 말이 되는 것이다. 너무 감상적인 것은 오랜동안의 잔인성이며, 교회라는 조직의 주의하여야 할 죄들인 것이다.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충격들과 실망과 전 생을 오염하는 비주들에 대해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다.
성 금요일(Good Friday)없는 부활절, 파멸의 날이 없는 구원의날인 예배자로부터 구원과 부활에 예비되는 그 자신의 상처와,절망과, 파멸의 중요성을 빼앗는 것이다.

국가주의의 우상은 그것이 희생물로서 국가적인 대적(對敵)의행동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비젼을 모호하게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적은 하나님의 심판의 몽둥이 이어왔다. 현대에는 하나님의 벌에 관한 사상에 대한 수많은 알려진 저항들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분노와 심판을 포함한다는것은 틀림없는 예언자의 메시지인 것이다. 한 민족이나 개인이하나님의 심판일 수 있다는 예언자의 메시지의 가능성을 고려함이 없이 불행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그 불행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남.북왕국의 전쟁에 있어서의 남왕국의 패배는, 만약에 국가의 적인 북왕국이 신성한 심판의 수행자로여겨질 수 있다면, 그 불행은 심판과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순한 패배에 불과한 것이다. 심지어 이역사에 대한 예언적인 견해가 가치있고 의로우며, 자기 자신의국가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를 요구치 않을지라도,어떻게 그 예언자의 메시지가 종종 비 애국적이며 믿을 수 없는것으로서 간주되어지는가를 보는 것은 쉬운 것이다. 얼마나 알려지지 않았느냐에 상관없이, 그 최종적 결과는 단순한 재난과 비극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재난 속의 은혜이며, 비극 속의 의미일수 있는 것이다. 파멸과 심판에 대하여 완전히 다시 체험하므로서 그 현실은 안심과, 희망과, 고요함과, 신념을 가져다 주는 최종적 구원의 미래와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욥기에서의 다음 번의 구약의 귀절은 설교자들에게 의인의 고난에 직면하여 생기는 절망과 분노의 어떤 돌파구를 열어 주는기회를 가져다 준다. 중요하게도 이 귀절은, 일어나는 모든 것이바로 그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어떤 사람이 그릇되게 추론할 수도있는 것을 감안하여 볼 때, 스바냐의 예언과 대조적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역으로, 고난과 죄 및 비극의 정의의 사이에는 어떤기계적이며, 일대 일적의 관계가 있다고만 주장하는 자는 거짓된자들인 것이다. 대신에, 욥은 고뇌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반대와저항 및 분노의 모델로서 적절히 나타나질 수가 있는 것이다. 하늘은 얼마나 많은 위장되고 가장된 고난에 대한 분노 및 회개가어떤 회중 내에 있으며, 또 모두에 의하여 얼마나 과소평가되기쉬운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분노가 어떤 돌출구를 찾지 못하였을 때, 그것은 그 자신을표현키 위하여 정도를 벗어난, 파괴적인 방도를 찾게 될 것이다.
통제된 분노가 올바른 분노는 아닌 것이다. 모든 분노는 대상을필요로 하며, 그것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이에 있어, 심지어 가장속세적인 문화들에 있어서도 남의 죄를 대신 지는 사람에 대한불합리한 요구, 즉 욥이 시편 기자들에게서와 같이 하나님을 향해 그의 분노를 터뜨렸다는 것, 이런 것이 가능하고 올바르다는것이, 슬프게도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거의 믿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회중이(congregation) 욥기와 시편이 우리에게 하나님 그 자신에 대하여 부당함과 분노의 감정을 정직히표현하는 기회를 허락한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나타나게 한다는것은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허락되거나적당한 돌출구나 털어 놓을 것이 없는 무의식적인 분노를 받아주는 우리의 배우자나, 지도자나나, 아이들이나, 부모나, 어른이나, 우리 자신들보다 더욱 더 잘 우리의 분노를 알아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고린도서의 귀절은 설교자에게 자유에 대한 나이 먹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오해를 수정하는 훌륭한 단서를 주고 있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대중화된 생각은 자기가 좋은 대로 택하는 것으로그것은 볼테르(Voltaire)나 라이프니쯔(Leibnitz)나 교회 내의고집적인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필연성을 무시하는 견해인 것이다. 레닌(Lenin)의 견해는자유란 필연성의 인식이라는 것으로, 그것은 한 사람에게 있어그의 뜻이 이행되어질 때만이 자유롭다는 일상적인 생각보다, 바울의 성서적인 견해에 더 가까운 것이다. 후자의 견해는 의지의 질문을 요구하는 것으로 분명히 처참한 타락과 잔인한 굴레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의지가 바라는 바를 선택하며 얻고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알콜 중독자들은 무엇을, 언제, 얼마나 많이 마실까를 선택키는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자유는 아닌 것이다. 괴물들과의 형제(Brother toDragons)라는 서사시의 작자 워렌(Robert Penn Warren)은 왜냐하면, 필연성의 인식은 자유의 시작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므로서 레닌의 통찰력을 앞서고 있다.

바울의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복음 전함의 만족...이란 말씀은 자유와 필연성과 만족을 혼합한 견해이다. 자유에 대한 펠라기우스의 견해는 기독교를 근속으로서의 바울의 종교를 대신하는 통제의 종교로서 보고 있다. 기독교인의 도덕적 생활은 어거스틴(St.Augustine)이 우리에게 경고한 바와 같이 단지 죄를 짓지않는 능력(ability not to sin)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어떤 것으로, 복음을 위하여 주안에서 갇힌 자로서의(엡 4:1) 우리의의지의 변화 그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를 이겨내고, 유혹으로부터 뛰쳐나오기 위하여, 두 주먹을 쥐고, 이를 갈면서 애쓰는 슬픈 도덕 생활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 대신에 우리는단지 통제 이상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외적인 변형과 내적인 변화와 구속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에 대한 신약성서의 초상화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이를 악물고 있는 예수가 확실히 아니며, 오히려 사랑에 강요되어서 그스스로가 하여야만 할 것을 하기를 바라며, 기꺼이 하는 그런 분이신 것이다.

이 귀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필연성에 의하여 파악되어지는 만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뱅크스(Ernie Banks)는 한 때 오직 경영자측만 알고 있다면, 헛되이 야구를 한 것이며, 그렇게 게임을사랑치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거대한 봉급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힘든 훈련을 참게 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게임 자체가 매우 매력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사랑이 그를 야구에 묶어 놓았던 것이다. 확실히 그는 억지로 그의직업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보다 더 자유로운 자인 것이다. 이와유사하게 복음이 바울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것은 그가 자유로와지려는 의지 이상의 것이 된 것이며, 더 나아가 복음에 매인자로서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에게자유하였으나(19절) 모든 사람의 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본문이 가끔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들로서 그 본래적의미를 거부하는 데 인용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가 지속적인 중심과 통합을 갖고, 또 어떤 조건에 합치한 누구의 관점이나가치를 조정하는 데 있어 비평주의와 조소주의로 인용된다. 바울은 이와는 심히 다르다. 그는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자들에게 자유롭게 종(노예)이 될 수 있었다. 죠, 과음은 당신에게 고통을 줄 뿐입니다.고 술중독자에게 말한들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그와함께 있어서 그가 느낀대로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은누구에게나 목회자(종)가 되기 위한 공식이 될 것이다. 감정의상통, 동일화, 그리고 다른 사람의 구체적인 입장으로부터 온 이해가 없이 깊은 은혜나 도움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 자유로운 종의 정신이란 바울의 목회관은 마가복음에 있어서 왕국을 가르치고 선포하며 심지어 병자를 치료하는 것까지 그근본적인 것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성전에서 마귀를 쫓고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기 전에 예수는 왕국에 관해 선포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많은 병자를 고친 후에 그러므로 이런자를 위하여 왔노라.하시고 다른 마을로 떠나셨다. 그리스어로therapuo는 목회의 이 세가지 의미를 함께 묶고 있다. 이 단어는예배와 봉사와 치료로 번역될 수 있다. 바울의 예배는 동시에 그의 봉사와 만족이었다. 하나님의 왕국에 있어서 우리의 봉사와목회는 우리의 예배이며 동시에 우리의 치료와 완전함이었다. 그러므로, 왕국의 선포와 봉사는 역시 병자를 고치고 해방시키는것이다. 죄는 멍에이고 봉사는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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