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감사합니다3 (눅 17:11-19)

첨부 1


본문은 예수님께서 열 사람의 나환자를 고쳐 주셨다는 것과 고침받은 열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인 사마리아인만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했다는 이야기입니다.우리는 본문 속에서 열 사람의 나환자가 지닌 공통점과 병고침받은 후 미련없이 훌훌 저 갈 곳으로 가버린 아홉 사람과 그리고 돌아와 감사했던 한 사람의 차이점을 찾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1.공통점을 찾아 봅시다.1)열 사람 모두 나환자였습니다.
구약에도 몇 군데 나환자 이야기가 나옵니다.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모세의 손이 나병에 걸렸던 일이 있었고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웃고 헐뜯다가 나병에 걸렸었습니다(민 12:1-10).그리고 탐욕에 눈이 어두워 손대선 안 될 재물은 몰래 훔쳐서 숨겼던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나병에 걸렸었고(대하 5:25-27) 웃시야 왕이 역시 나병에 걸렸었습니다(대하 26:16-17).그리고 아랍 나라의 국방장관이었던 나아만도 나병에 걸렸었습니다(왕하 5:11).
그 가운데 고침받은 사람도 있고 고침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나병은 불치와 고통의 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본문의 나환자 열 사람도 고침받을 길이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2)멀리 섰습니다.
레위기 13:46이나 민수기 12:14을 보면 일단 나환자로 판명이 나면 집으로부터 떠나야 하고 진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그리고 역대하 26:21을 보면 나병에 걸린 웃시야 왕은 성전에도 올라갈 수 없었고 별궁에서 혼자 거하였다고 했습니다.뿐만 아니라 역대하 26:23을 보면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열왕의 묘역에 매장하지 않고 그 곁에 매장했다고 했습니다.그러니까 매장도 격리해서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기 22:4을 보면 성물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그러기 때문에 본문의 나환자들 역시 멀리 떠나야 했고 예수님을 만났으나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 서 있었던 것입니다.
3)소리 질러 긍휼을 구했습니다.
13절을 보면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일단 나병에 걸리면 신체 각 부분에도 이상이 일어나지만 성대에도 이상이 일어나 소리가 약해진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열 사람의 나환자는 모처럼 주어진 기회였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힘을 모아 소리 지르며 긍휼을 구했습니다.
성경은 군데군데 “부르짖으라”,“소리 높여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곤고할 때나 환난 날에 부르고 소리 지르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약속도 있습니다.
4)말씀대로 했습니다.
14절을 보면 주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했습니다.레위기 13:49을 보면 그 당시 나병의 진단은 제사장이 했습니다.그러니까 이미 제사장에게로 가서 보이라는 것은 그들의 나병을 고치셨다는 선언이었습니다.14하반절을 보면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말씀을 시큰둥하게 여기고 가지 않았다면 가다가 깨끗함을 받는 축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다시 말하면 가지 않았다면 병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가라면 가고,오라면 오고,거기 서라면 서고,앉으라면 앉고,일어서라면 일어서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축복받는 사람입니다.
5)열 사람이 똑같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서 있었고 소리 질렀고 순종했기 때문에 열 사람이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그들은 이미 “가서 보이라”는 순간 고침을 받았습니다만 가면서 그 사실을 발견하고 확인한 것입니다.주님의 은혜는 열 사람 모두에게 골고루 똑같이 임했습니다.열 사람이 다 축복받았고 은혜를 받았고 사랑을 힘입게 되었습니다.

2.아홉 사람과 한 사람의 다른 점을 찾아 봅시다.1)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아홉은 저 갈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한 사람 그만이 은혜와 사랑의 현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2)사마리아 사람만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뿐 나머지 아홉은 소리가 없었습니다.
나병이 치료되자 그들의 목소리도 커졌을 것입니다.한 사람은 그 큰 목소리와 건강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아홉 사람은 소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고유한 목소리를 주셨습니다.그 소리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소리가 곱다든지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주신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후두암으로 성대를 도려 내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던 어떤 성도를 심방한 일이 있었습니다.그 분과의 대화는 자연히 종이에 연필로 글씨를 쓰는 것이었습니다.저는 지금도 그 분이 떨리는 손으로 써 내려간 다음과 같은 글귀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그것은 “목사님,하나님이 저에게 다시 소리를 주신다면 온 세상이 떠나가도록 목청이 터지도록 찬송을 부르고 싶습니다.그리고 성가대를 하겠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열 사람 중 돌아온 그 한 사람만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큰 소리로 주님을 찬양합시다.찬송을 크게 힘 있게 부릅시다 찬송 소리와 그 속도는 교회 성장과 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성장하는 교회,힘 있는 교회는 찬송 소리가 크고 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매주 목요일 밤마다.찬양 예수의 밤이 계속됩니다.누구든지 나와서 함께 예수를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하다가 성령을 충만히 받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고 병고치는 역사도 일어날 것이며,회개하는 역사도 일어날 것이고 충성을 결심하는 결단의 역사도 일어날 것입니다.
3)예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경배와 경의의 표시입니다.우리는 여기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그것은 인자한 미소로 서 계신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그 발을 적시며 입맞추고 있는 한 사나이의 모습입니다.
4)사례했습니다.
열왕기하 5:15을 보면 그 당시 아람 나라의 국방장관이었던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와 나병을 치료받게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그가 나병을 고침받고 나자 많은 보물을 엘리사에게 주면서 사례했지만 엘리사는 외투 한 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한 사람 나환자는 보물을 드렸다는 말은 없습니다.그도 그럴 것이 나환자에게는 소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그는 자기의 마음과 정성을 한데 묶어 마음으로 사례를 드린 것입니다.우리는 여기서 아홉 사람과 한 사람의 가장 소중한 차이를 발견해야 합니다.그것은 본문 19절이 밝혀 주듯이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한 사람의 믿음만 칭찬받은 믿음이었습니다.그리고 그의 칭찬받은 믿음은 그의 구원과 관계된 것이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 속에서 돌아온 그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귀한 믿음이었던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경가 바클레이는 “모든 복음서 가운데 이 이야기만큼 신랄하게 인간의 배은 망덕을 묘사한 이야기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세 가지 감사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부모에 대한 감사입니다.
세익스피어는 리어 와의 입을 통해 “배은 망독한 자녀를 갖기보다는 독사에게 물리는 편이 훨씬 낫다”고 했습니다.만일 부모가 하루만 돌보지 않았더라면 살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성하게 되면 제 풀에 자란 줄로 생각하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기가 일쑤입니다.
구약의 교훈은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식은 돌로 칠 것을 가르칩니다.그만큼 효를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부모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식이 아닙니다.
둘째는 벗들에게 대한 감사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친구와 이웃들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사는 사람들입니다.그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바클레이는 “불어라 불어라 겨울 바람아 은혜를 모르는 인간에 비한다면야 너는 그렇게 차갑지가 않구나”라고 했습니다.
세째는 하나님깨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03:2에서 시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청교도들도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여 맨 먼저 한 일이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이었습니다.그들에게도 원망하고 불평할 조건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1620년 9월 16일 102명의 청교도들은 100톤 밖에 되지 않는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오로지 신앙의 자유만을 위해 65일간의 항해 끝에 11월 21일 뉴잉글래드 지방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피곤,굶주림,질병,인디언의 습격으로 절반 이상이 죽었습니다.그렇다면 감사할 것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감사를 드렸습니다.그 감사의 기초 위에 미국이 건국된 것입니다.감사하는 개인과 가정과 국가가 복을 받는 법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빌립보 지방에서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이 전도하다가 붙들려 매를 몹시 맞고 빌립보 옥중에 갇혔습니다.죄가 있어 두들겨 맞고 잘못이 있어 감옥에 들어간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바울과 실라에게는 실오라기만한 잘못도 없었습니다.그러니까 그들은 깊은 옥중에서 원망하고 불평을 터뜨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사도행전 16:25을 보면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그리고 일어난 기적이 옥문이 열리고 손과 발의 착고가 풀어졌으며,옥사장과 그의 가족이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이었습니다.
감사가 있는 곳엔 찬송이 있고 축복이 임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감사할 조건이 없다고 말하지 맙시다.감사할 조건은 너무나 많습니다.제일 많이 감사하는 사람이 제일 가는 신앙의 소유자입니다.제일 많은 원망과 불평과 투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제일로 빈약한 신앙의 소유자일 것입니다.
항상 감사합시다.어디서나 감사합시다.
주님,감사합니다.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